수학이 필요한 순간 - 인간은 얼마나 깊게 생각할 수 있는가
김민형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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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다음 날, 요새 수능 수학 과목에는 어떤 문제가 나오는지, 내가 다시 수능을 본다면 대학에 갈 수 있을만한 수학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 작은 호기심이 들었어. 몹쓸 호기심 ...... 인터넷에 공개된 수능 수학 시험문제를 받아서 회사 점심시간에 펜을 돌려가며 풀었는데 두 번째 페이지에 갔을 때 도저히 풀지 못하겠다고 만세를 불렀단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15년 전이네. 2004학년도 수능을 준비하면서 유일하게 어렵지 않다고, 심지어는 종종 즐겁다고 느낀 과목이 수학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자신감, 열정, 좋은 기억들이 지금 당장 수학 문제를 풀어도 어느 정도는 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2003년 11월 수능을 보고 점수를 채점하고 났을 때도 수리 영역이 가장 점수가 높았거든. 그런데 15년만에 나의 현 주소를 다시 확인하고는, 지금이 바로 <수학이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생각하며 김민형 교수의 책을 읽기 시작했단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문과 생이었지만 나는 정말로 수학을 좋아했어. 잘 한다는 것과 좋아한다는 것은 일정 부분 비례하는 것이 있어서 잘 했기 때문에 좋아했고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수학에 쏟았고 또 잘하게 되고, 이런 순서였지. 왜 그랬을까. 내가 속한 문과의 세계는 정답이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어. 국어, 사회, 정치, 세계 문화, 윤리, 이런 것들은 정말 다양한 층위의 사상과 사유와 감각들로 쌓아 올려진 것들이라 단 하나의 정답이 없다고 믿었던 것 같아. 국어 영역은 언제나 낙제점을 받기 일쑤였지. 정철의 사미인곡을 읽고 나는 이렇게 해석했는데 정답은 저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지. 정답풀이에서 말하는 해석의 이유가 낯설었어. 낯선 당위성 앞에 무척 곤혹스러웠지. 나는 나를 위로했단다. 단 하나의 정답에 대한 당위성은 존재할 수 없고, 옳고 그름을 떠나서 시험 출제자들의 인식 속에 이 문제를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방식 중 하나, 이 정도가 내가 시험문제의 정답을 대하는 태도였어. 그러니까 알긴 알겠는데 그 정답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거였지.
 
그런데 수학은 언제나 정답이 있었어. 그것도 언제나 보편적으로 설명 가능하고 명쾌하고 납득이 가며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정답이었지. 명확한 당위의 영역에 수학의 문제들이 웃으며 부유하고 있었어. 실제로 수학 문제지를 마주하면 문제 하나하나가 웃으며 허공을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단다. 근의 공식을 외우고, 사인 코사인 그래프를 그리며 문제의 해답을 찾아나가는 기분은 문과의 영역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감각이었어. 수학은 암기라거나, 이해라거나, 훈련이라거나 그런 해석은 부차적인 것이었어. 수학 문제를 풀면 어쨌든 정답이 나온다는 것만이 중요했거든. 그래서 수학 문제를 풀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문제를 한 번 다 풀고 처음부터 다시 한 번 검산을 할 때였어. 꽤나 어렵고 견고해 보이는 문제를 두고, 분명 이것이다 라고 느낄 만큼 자신감 있게 해답을 구한 경우라면 내가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지?’ 라며 흐뭇해하며 계산 과정을 복기했거든. 언제나 나의 시선은 수학의 가장 마지막 지점, 정답을 향해있었어.
 
그래서일까, <수학이 필요한 순간>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건 수학은 굉장히 목적 지향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정을 천천히 아주 견고하게 쌓아 올리는 영역이기도 하다는 점이었어. 김민형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상당히 많은 수학적인 문제가 3가지 이슈를 한꺼번에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해가 있느냐 없느냐, 둘째는 찾을 수 있느냐, 셋째는 찾을 수 있어도 효율적으로 찾을 수 있느냐. 이 이슈들은 서로 관계가 있으면서 어느 정도는 독립적인 문제입니다.> (p.198-199) 수학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바뀌는 순간이었어. 수학이라고 하는 건 처음부터 태생적으로 정답이 정해져 있고, 정답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내는가, 우리들이 배웠던 수학은 대개 이러한 것이 많았지. 그러나 답이 있는지 없는지, 또 있다면 우리가 그 목적지에 끝내 도달 가능한 것인지, 이런 질문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면 수학은 이과의 영역이 아니라 문과의 영역에 해당할지도 모르겠어.
 
잠시 플래시백(Flashback). 문득 대학 졸업 전 들었던 과목 하나가 생각났거든. 필수 전공과목은 모두 이수했기 때문에 아무 수업이나 자유롭게 들으며 교양과목으로 인정받으면 되던 때였는데, 수학과에서 개설한 <정수론>이라는 수업을 호기롭게 들었단다. 그리고 한 학기 내내 후회했단다. 쉽게 말해 <정수론>은 일 더하기 일이 왜 이가 되는지를 논증하고 증빙하는 과목인데, 나는 수능 시험에서 만났던 웃으며 부유하는 수학 문제들을 상상했거든. 정답을 찾기 위한 수학이 아니라 정답을 미리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정답이 왜 정답인지, 그것에 대한 답을 내려야 했어. 대학 졸업을 눈 앞에 둔 2009년의 가을. 그 과목은 C를 받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정수론 수업을 듣던 때만큼 머리를 쥐어짜야 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아. 그건 수학 공식을 외우느냐 아니냐의 영역은 아니었던 것 같아. 논리와 추론과 사고의 게임이었지. 그래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학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과목 중 하나로 남게 되었어. 치열했던 만큼 남은 것들이 더 많았어.

또 시간은 흘러 나는 서른 넷이 되었지. 돌아보니 나는 어떻게 해도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뭐라도 계속 합리적으로 만들고 나아가고 다시 후퇴하고 다시 삶의 뭔가를 건축해나가고, 이런 걸 연속해온 것 아닌가 싶어. 서른 다섯을 앞두고 떠올린 작은 생각이 15년 전의 수학 문제 풀이 과정에서 비롯되었다고, 10년 전의 정수론 수럽에서 비롯되었다고 어떻게 날름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다만, “결국 모든 삶은 수학적으로 사고할 수 밖에 없다는 김민형 교수의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아. 각자 살아가는 모든 삶에 나만의 해()가 있느냐 없느냐, 해가 있다면 그걸 찾을 수 있느냐, 그리고 조금은 덜 헤매며 해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지 …… 모두가 그 질문의 거대한 뿌리를 찾기 위해 각자만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셈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C를 받았던 그 수업을 들었던 걸 조금은 감사히 생각해도 괜찮은걸까. 


이 모든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 中


황정운. 글을 읽고 씁니다. 9년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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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행성 문학과지성 시인선 395
조용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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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가장 고민스러운 지점은 책을 다 읽었을 때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다음은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할 때는 간신히 무언가, 누군가를 이정표 삼아 다음 목적지까지 더듬거리며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책을 둘러싼 여러 지표들이 다음 목적지까지의 이정표가 되어 준다. 작가, 출판사, 번역가 ...... 최근에는 몇몇 평론가도 책을 읽는 여행길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데 신형철 평론가가 추천사를 쓴 책, 혹은 해설을 남긴 책을 의도적으로 선택했고, 그에 대한 나의 경건한 마음만큼 경건한 자세로 책을 읽었다. 그러나 사람의 리듬은 모두가 다른 법이었고, 이 다른 것에는 옳고 그름의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들 수 없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 받고 책을 추천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리듬에 어울리는 책이 있고, 어울릴 때에야 비로소 그에게 옳은 책이 될 것이었다. 옳은 것은 상당히 상대적이다.

누군가에 기대어 책을 읽는다는 것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나는 신형철 평론가가 해설을 달은 조용미 시인의 <기억의 행성>(문학과지성사, 2011) 시집을 읽어 보았고, 위험을 무릎 쓰고 이 시인이 들려주는 고요하고 쟁쟁한 아름다움의 세계에 눈을 뜬 것이 그토록 감사했다. 시집을 다 읽고 났을 때, 이 조용미 시인은 아픔이 멈추어버린 지점을 갈망하는 사람이며, 아픔이 없는 가능성이 감지될 때 생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미학적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독 시인의 시어에는 어두운 묘사가 등장한다. 아픔, 상처, 통증, 고통 ...... 이런 단어들이 종종 시어에서 발견된다. 시인은 그런 통증이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그것들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대개 그런 것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망자를 태우고 가는 꽃상여, 장엄한 종교의 세계로 들어가기 직전의 일주문, 우주의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매화초옥도 그림, 시인은 이들 앞에서 통증을 잊는다.

누구나 아름다움을 쫓을 것이다. 그러나 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종종 무시된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혹은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을 찾는다며 목적과 수단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이유로 우리는 저마다 아름다움을 찾는다. 조용미 시인이 감사했던 건 적절하게 스스로 미학적 인간을 추구하는 이유의 단서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아름다움이야 말로 나를 지탱해주고 변화시키고 다른 세계로 한 걸음 내딛게 하며, 한 번 겪고 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실제로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좋다. 한 번이라도 진실된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나면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시인의 고백이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통용되길 바랬다. 빙산의 일각이라도 우리 역시 감전된 것 같이 아름다움 앞에 숨을 멈추었던 적이 있지 않던가. 최소한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희망이라도 품어본 적 있지 않았던가. 시인은 "문장은 결국 너를 낚아채고야 말았다"고 했다. 시인은, 나를 낚아채고야 말았다. ▨

(2018. 11. 16)


  
한 가지 色()에 깊이 들어앉은 다른 색을 발굴하기까지의 기나긴
과정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일은 가능할까
나약한 존재를 자극하는 섬세한 색의 변화를,
그 미묘한 느낌의 일렁임을

문장은, 너를 낚아채고야 말았구나
너를 지탱해주고 변화시키고 다른 세계로
한 걸음 내딛게 하는 순간들
한 번 겪고 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 자리를

- <미학적 인간에 대한 이해>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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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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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모옌(莫言) 작가의 <열세 걸음(2003년作, 2012년 문학동네 펴냄)>을 읽고 책을 덮고 났을 때 가장 먼저 국어사전을 펼쳤다. 국어사전을 열고 환상(幻想)을 찾아보았다. 사전에 정의된 환상은 ‘현실성이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이라고 했다. 어딘가 개운치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모옌 작가의 책을 읽으며 체험한 강렬한 환상적 리얼리즘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세 걸음>은 현실과 환상, 진짜와 거짓, 화자와 청자가 서로 치환되고 교차되면서 서사를 진행시킨다. 현실에 현실이 아닌 것들이 끼어들어 목소리를 낸다. 그런데 현실적이지 않은 것들이 현실에 끼어든 순간, 바뀌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것들이다. 다시 말해 이방인들이 섞여있는 이상한 현실도 원래 그대로의 현실인 것처럼 여겨졌다. 이것은 가능성이 없는 헛된 세계라고 결코 생각되지 않았다. 어딘가에 이런 세상이 있을 것만 같았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언어와 정서와 사상이 마음에 들었다. 라디오를 켜고 이리저리 주파수를 돌리다가 나와 정확히 일치하는 채널을 찾고 명료한 라디오 너머 목소리를 듣는 듯 했다. 톨스토이에 이어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읽고 나자 그제서야 다른 러시아 작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니꼴라이 고골의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는 예전 러시아의 수도였던 뻬쩨르부르그를 배경으로 한 다섯 편의 단편을 싣고 있다. 어느 것 하나 환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단편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결코 마주할 수 없는 낯선 가능성들을 제시하며, 이것도 경험하지 않았으나 언젠가 경험할 수도 있는 또 다른 현실이라고 말한다. 빵 속에서 다른 사람의 코가 발견되고(), 이름 모를 노인을 그린 초상화는 밤마다 살아나 섬뜩한 눈동자로 우리를 노려본다. (초상화) 대개의 관리와 장교들은 부패했고 민중의 삶은 궁핍과 처절함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골은 유쾌했다. 부패, 가난, 궁핍, 몰락 이런 삶의 가능성과 어두운 감정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대신 옆에 서서 소개하고 지켜보고 있다. 그가 유쾌할 수 있는 건, 유쾌하다는 감정의 근원을 지금이 아닌 다른 가능성들에서 찾고 있었다. 이는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는 유쾌할 수 없음을 이미 알아버린 것과 같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삶을 정확히 직시할 수 있는 유령을 현실로 데려와 지금 이 곳을 그나마 유쾌해질 수 있는 현실로 만들어보자. 고골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프랑스의 환상문학(1951년 作>을 쓴 카스텍스는 환상이란 “현실의 삶의 테두리 안으로 갑작스럽게 침입하는 신비”라고 했다. 고골은 현실이라는 삶의 테두리에 신비한 유령을 초대했고, 풀어놓았고, 사람들이 당황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웃었다. 웃고 있는 것은 고골 혼자였다. ▨

(2018.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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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0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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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이 세계가 나와 타자 이 둘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해보자. 타자라는 말이 경직되어 있다면 당신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이러한 경우에 나와 당신이 관계를 맺고 서로 섞이는 방식은 두 종류가 있다. 먼저 관계 맺음의 시작은 나의 결함에서 시작한다. 현재 나는 삶이 불안정하고 덜 행복하고 신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실질적인 결손이 있는 상태에 놓여있다. 먼저 나의 결함이 당신과의 관계를 통해 충족되거나 극복될 수 있다고 여겨질 때, 당신과 섞이려는 나의 속력은 조급하고 거칠 것이 없다. 당신에게 가까워짐으로 인해 나는 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 경우 나의 언어는 욕망으로 가득하고 대개의 경우 파국(破局)에 다다른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멈추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언젠가는 멈출 것을 기대할 것을 기대하며 끝없이 자신을 소비한다. 나는 비극을 스스로 껴안는 존재다. 

그러나 나의 결함이라는 것이 당신으로부터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성질이라면, 이러한 경우에 나는 어떤 방향으로 어떤 속력으로 달려가야 할까. 나의 결함을 당신으로부터 채울 수 없는 것과, 채울 수 없다는 점을 안다는 것의 온도는 미묘하게 다르다. 뒤의 경우가 급격하게 더 슬플 것이며 심지어는 삶의 욕망, 의욕, 열정 등의 긍정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언어를 상실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섞일 수도 없고 섞일 이유도 없을 때 나의 언어는 욕망보다는 공백으로 훨씬 더 풍부하게 채워질 것이다. 공백의 언어에는 목적이나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과 의도는 일반적으로 나 자신만이 아닌 당신과 세계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의 언어는 연극의 방백(Aside)처럼 들린다. 무대 위에 있는 다른 배우들은 나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다. 희망이든 고통이든 나의 말을 다른 에게 전달 될 때 비극이 가능해진다. 나는 비극을 스스로 회피하는 존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스물 일곱 살에 발표한 데뷔작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 1926>는 욕망의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전쟁을 겪으며 본질적으로 인간의 결함에 눈을 뜬 사람들이 있고, 전쟁 중에 사고를 당해 성기에 돌이킬 수 없는 신체적인 결함을 갖게 된 사람도 있다. 이들의 행동과 언어는 모두 땅에 단단히 딛고 있지 않고 정처 없이 부유한다. 이들은 고향인 미국을 떠나 파리, 스페인을 전전한다. 인상적인 건 이들의 대화다. 특별한 심리 묘사 없이 말과 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면 어디에서도 끈적거리는 욕망과 은밀한 대화의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의 대화는, 단지 서로 말을 나누고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듯 이루어지고 있다. 대화를 통해 얻어낼 것이 없이 대화라는 행위 자체에만 몰두한다. 언제 어느 형태로 대화가 시작되거나 대화가 종료된다고 하여도 이상할 것 없다. 때문에 이들의 대화는 소름 끼치게 미끄럽게 흘러가는데 바로 그 때문에 이들을 지켜보는 내내 나는 슬픔으로 가득했다. 

스스로 비극을 회피하는 이들에게 단지 비극만이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와 당신의 관계는 당신의 시선에서 보면 당신과 나의 관계로 역전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무수한 나의 집합체이며 서로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나아가고 후퇴한다. 때문에 너에게 다가가려는 욕망을 잃어버렸을 때,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나를 제외한 수 없는 당신들, 나의 여집합들이다. 당신들은 나에게서 빠르게 달아나고 있고 점점 멀어지고 있다. <삶이 이렇게 빠르게 달아나고 있는데, 정말 철저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어. 넌 인생이 깡그리 달아나 버리고 있는데, 그걸 조금도 이용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벌써 인생을 절반 가까이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느냐는 말이야!> (p. 22,24) 책을 다 읽고 이 문장에 오래도록 시선이 멈추었던 건, 사실 욕망의 언어를 모두 잃어버린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구라도 生 전체를 부유하는 이는 없을 것 같았다. 

희망과 욕망의 언어를 잃어버린 이들의 속 마음이 오히려 희망의 증거를 암시하게 했다. 이들의 언어가 점차 독백이나 방백이 아닌 대화로 가득해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니까 자꾸만 빠르게 달아나는 삶에 뭐라도 말을 걸어보는 것. 우리 모두 그것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2018.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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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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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톨스토이를 시작으로 러시아 문학을 읽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도스토옙스키를 읽겠다고 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과 사랑에 대해 말하는 톨스토이에 비해 도스토옙스키의 글에서는 어둡고 치밀하게 응축된 감정이 느껴졌다. 그의 작품은 레몬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 밤이 아니라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겨울에 읽어야겠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그만이 톨스토이의 대척점에 있다고 믿었다. 고골, 고리키, 투르게네프, 체호프 ...... 읽고 올라서야 할 러시아의 문호들은 너무도 많았으나, 오직 도스토옙스키만이 톨스토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순서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톨스토이의 작품 분량은 압도적이다. 그래서 흔히 도스토옙스키를 먼저 만나고 이어 톨스토이를 만난다. 누구를 먼저 만나는지 여부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처음 경험한 것들이 기준점이 되어 그 이후를 비교하는 척도가 된다. 비교는 공평하지 않다. 먼저 살다간 것에 보다 종속적이다.

기우였다. 겨울에 읽은 도스토옙스키가 봄에 읽은 톨스토이에 비교되지 않고 종속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둘이 전혀 다른 성격의 화법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톨스토이가 영화라면 도스토옙스키는 연극이었다. 영화는 거대한 서사가 시계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움직이고 흘러간다. 인물과 사건에 초점이 비추어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사는 계속 앞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동적이다. 연극은 그에 비해 스타카토로 진행된다. 인물과 인물이 무대에 올라 말과 행동을 섞으며 격돌한다. 서사의 시간이 잠시 정지한 채 각 등장 인물들은 한없이 자신의 심리를 꺼내어 보인다. 아래로 파고 들다가 갑자기 조명이 꺼지고 어두워진다. 암전. 그리고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고 다시 시간이 멈춘 채 다시 아래로 파고 든다. 정적인 순간과 동적인 진행이 교차된다.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하는 정적인 순간은 톨스토이에게선 발견되지 않는 것이었다. 둘의 화법은 달랐다. <죄와 벌>을 읽으며 톨스토이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좋았다.

도스토옙스키의 언어가 연극처럼 다가왔다고 했다. <죄와 벌>을 무대 위에서 상연한다고 하면, 세 가지 장면에서 나는 숨이 멎을 뻔했을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전당포 주인 알로냐와 그녀의 이복동생 리자베따를 죽일 때. 라스꼴리니꼬프를 찾아온 뽀르피리 예심판사가 그가 알로냐를 죽인 범인임을 입으로 소리 내어 단언할 때. 라스꼴리니꼬프의 동생 두냐의 사랑을 끝내 얻지 못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권총으로 자살할 때. 이 세 장면만큼은 눈으로 소설을 읽고 있었으나 어두운 관객석에 앉아 눈 앞의 무대를 홀로 지켜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토록 말과 말이 서로를 죽일 수 있는 날카로운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오랜만에 기억해냈다. 적당히 아름답고 적당히 보편적인 말로 사람의 감정을 위로하는 말 장난이 아니라 여겼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을 시작으로 다섯 편의 걸작을 완성했다. 그러나 여기 쓰여진 문장들은 이 작품이 生의 마지막 작품인 것처럼 한 없이 치열하게 쓰여져 있지 않은가 ......

연극을 마친 라스꼴리니꼬프가 무대에서 내려와 관객석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그가 어딘가 슬프게 기억되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그때 알고 싶었던 거야, 어서 알고 싶었어.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인가, 아니면 인간인가를 말이야. 내가 선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아니면 넘지 못하는가! 나는 벌벌 떠는 피조물인가, 아니면 권리를 지니고 있는가 ...... (p.615-616)」그는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비범한 인간이라고 믿었다. 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알로샤를 도끼로 죽인 것 역시 그것을 단지 시험해보기 위함이라고 했다. 나는 시험이라는 단어를 ‘증명’이라고 바꿔 이해하고 싶었다. 그는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아니,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존재였다. 가치를 증명해야 존재가 성립되는 삶이었다. 그는 스스로 권리를 지닌 독립 인간이라 믿었지만, 사실 타인과 세계에 종속적인 피조물에 가까웠다. 얼마나 역설적인가. 나의 슬픔은 이 괴리감에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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