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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0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평점 :
극단적으로 이 세계가 나와 타자 이 둘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해보자. 타자라는 말이 경직되어 있다면 당신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이러한 경우에 나와 당신이 관계를 맺고 서로 섞이는 방식은 두 종류가 있다. 먼저 관계 맺음의 시작은 나의 결함에서 시작한다. 현재 나는 삶이 불안정하고 덜 행복하고 신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실질적인 결손이 있는 상태에 놓여있다. 먼저 나의 결함이 당신과의 관계를 통해 충족되거나 극복될 수 있다고 여겨질 때, 당신과 섞이려는 나의 속력은 조급하고 거칠 것이 없다. 당신에게 가까워짐으로 인해 나는 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 경우 나의 언어는 욕망으로 가득하고 대개의 경우 파국(破局)에 다다른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멈추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언젠가는 멈출 것을 기대할 것을 기대하며 끝없이 자신을 소비한다. 나는 비극을 스스로 껴안는 존재다.
그러나 나의 결함이라는 것이 당신으로부터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성질이라면, 이러한 경우에 나는 어떤 방향으로 어떤 속력으로 달려가야 할까. 나의 결함을 당신으로부터 채울 수 없는 것과, 채울 수 없다는 점을 안다는 것의 온도는 미묘하게 다르다. 뒤의 경우가 급격하게 더 슬플 것이며 심지어는 삶의 욕망, 의욕, 열정 등의 긍정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언어를 상실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섞일 수도 없고 섞일 이유도 없을 때 나의 언어는 욕망보다는 공백으로 훨씬 더 풍부하게 채워질 것이다. 공백의 언어에는 목적이나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과 의도는 일반적으로 나 자신만이 아닌 당신과 세계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의 언어는 연극의 방백(Aside)처럼 들린다. 무대 위에 있는 다른 배우들은 나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다. 희망이든 고통이든 나의 말을 다른 에게 전달 될 때 비극이 가능해진다. 나는 비극을 스스로 회피하는 존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스물 일곱 살에 발표한 데뷔작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 1926>는 욕망의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전쟁을 겪으며 본질적으로 인간의 결함에 눈을 뜬 사람들이 있고, 전쟁 중에 사고를 당해 성기에 돌이킬 수 없는 신체적인 결함을 갖게 된 사람도 있다. 이들의 행동과 언어는 모두 땅에 단단히 딛고 있지 않고 정처 없이 부유한다. 이들은 고향인 미국을 떠나 파리, 스페인을 전전한다. 인상적인 건 이들의 대화다. 특별한 심리 묘사 없이 말과 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면 어디에서도 끈적거리는 욕망과 은밀한 대화의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의 대화는, 단지 서로 말을 나누고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듯 이루어지고 있다. 대화를 통해 얻어낼 것이 없이 대화라는 행위 자체에만 몰두한다. 언제 어느 형태로 대화가 시작되거나 대화가 종료된다고 하여도 이상할 것 없다. 때문에 이들의 대화는 소름 끼치게 미끄럽게 흘러가는데 바로 그 때문에 이들을 지켜보는 내내 나는 슬픔으로 가득했다.
스스로 비극을 회피하는 이들에게 단지 비극만이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와 당신의 관계는 당신의 시선에서 보면 당신과 나의 관계로 역전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무수한 나의 집합체이며 서로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나아가고 후퇴한다. 때문에 너에게 다가가려는 욕망을 잃어버렸을 때,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나를 제외한 수 없는 당신들, 나의 여집합들이다. 당신들은 나에게서 빠르게 달아나고 있고 점점 멀어지고 있다. <삶이 이렇게 빠르게 달아나고 있는데, 정말 철저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어. 넌 인생이 깡그리 달아나 버리고 있는데, 그걸 조금도 이용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벌써 인생을 절반 가까이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느냐는 말이야!> (p. 22,24) 책을 다 읽고 이 문장에 오래도록 시선이 멈추었던 건, 사실 욕망의 언어를 모두 잃어버린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구라도 生 전체를 부유하는 이는 없을 것 같았다.
희망과 욕망의 언어를 잃어버린 이들의 속 마음이 오히려 희망의 증거를 암시하게 했다. 이들의 언어가 점차 독백이나 방백이 아닌 대화로 가득해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니까 자꾸만 빠르게 달아나는 삶에 뭐라도 말을 걸어보는 것. 우리 모두 그것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2018.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