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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이야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평점 :
201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모옌(莫言) 작가의 <열세 걸음(2003년作, 2012년 문학동네 펴냄)>을 읽고 책을 덮고 났을 때 가장 먼저 국어사전을 펼쳤다. 국어사전을 열고 환상(幻想)을 찾아보았다. 사전에 정의된 환상은 ‘현실성이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이라고 했다. 어딘가 개운치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모옌 작가의 책을 읽으며 체험한 강렬한 환상적 리얼리즘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세 걸음>은 현실과 환상, 진짜와 거짓, 화자와 청자가 서로 치환되고 교차되면서 서사를 진행시킨다. 현실에 현실이 아닌 것들이 끼어들어 목소리를 낸다. 그런데 현실적이지 않은 것들이 현실에 끼어든 순간, 바뀌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것들이다. 다시 말해 이방인들이 섞여있는 이상한 현실도 원래 그대로의 현실인 것처럼 여겨졌다. 이것은 가능성이 없는 헛된 세계라고 결코 생각되지 않았다. 어딘가에 이런 세상이 있을 것만 같았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언어와 정서와 사상이 마음에 들었다. 라디오를 켜고 이리저리 주파수를 돌리다가 나와 정확히 일치하는 채널을 찾고 명료한 라디오 너머 목소리를 듣는 듯 했다. 톨스토이에 이어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읽고 나자 그제서야 다른 러시아 작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니꼴라이 고골의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는 예전 러시아의 수도였던 뻬쩨르부르그를 배경으로 한 다섯 편의 단편을 싣고 있다. 어느 것 하나 환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단편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결코 마주할 수 없는 낯선 가능성들을 제시하며, 이것도 경험하지 않았으나 언젠가 경험할 수도 있는 또 다른 현실이라고 말한다. 빵 속에서 다른 사람의 코가 발견되고(코), 이름 모를 노인을 그린 초상화는 밤마다 살아나 섬뜩한 눈동자로 우리를 노려본다. (초상화) 대개의 관리와 장교들은 부패했고 민중의 삶은 궁핍과 처절함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골은 유쾌했다. 부패, 가난, 궁핍, 몰락 이런 삶의 가능성과 어두운 감정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대신 옆에 서서 소개하고 지켜보고 있다. 그가 유쾌할 수 있는 건, 유쾌하다는 감정의 근원을 지금이 아닌 다른 가능성들에서 찾고 있었다. 이는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는 유쾌할 수 없음을 이미 알아버린 것과 같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삶을 정확히 직시할 수 있는 유령을 현실로 데려와 지금 이 곳을 그나마 유쾌해질 수 있는 현실로 만들어보자. 고골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프랑스의 환상문학(1951년 作>을 쓴 카스텍스는 환상이란 “현실의 삶의 테두리 안으로 갑작스럽게 침입하는 신비”라고 했다. 고골은 현실이라는 삶의 테두리에 신비한 유령을 초대했고, 풀어놓았고, 사람들이 당황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웃었다. 웃고 있는 것은 고골 혼자였다. ▨
(2018.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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