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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필요한 순간 - 인간은 얼마나 깊게 생각할 수 있는가
김민형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8월
평점 :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다음 날, 요새 수능 수학 과목에는 어떤 문제가 나오는지, 내가 다시 수능을 본다면 대학에 갈 수 있을만한 수학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 작은 호기심이 들었어. 몹쓸 호기심 ...... 인터넷에 공개된 수능 수학 시험문제를 받아서 회사 점심시간에 펜을 돌려가며 풀었는데 두 번째 페이지에 갔을 때 도저히 풀지 못하겠다고 만세를 불렀단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15년 전이네. 2004학년도 수능을 준비하면서 유일하게 어렵지 않다고, 심지어는 종종 즐겁다고 느낀 과목이 수학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자신감, 열정, 좋은 기억들이 지금 당장 수학 문제를 풀어도 어느 정도는 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2003년 11월 수능을 보고 점수를 채점하고 났을 때도 수리 영역이 가장 점수가 높았거든. 그런데 15년만에 나의 현 주소를 다시 확인하고는, 지금이 바로 <수학이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생각하며 김민형 교수의 책을 읽기 시작했단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문과 생이었지만 나는 정말로 수학을 좋아했어. 잘 한다는 것과 좋아한다는 것은 일정 부분 비례하는 것이 있어서 잘 했기 때문에 좋아했고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수학에 쏟았고 또 잘하게 되고, 이런 순서였지. 왜 그랬을까. 내가 속한 문과의 세계는 정답이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어. 국어, 사회, 정치, 세계 문화, 윤리, 이런 것들은 정말 다양한 층위의 사상과 사유와 감각들로 쌓아 올려진 것들이라 단 하나의 정답이 없다고 믿었던 것 같아. 국어 영역은 언제나 낙제점을 받기 일쑤였지. 정철의 사미인곡을 읽고 나는 이렇게 해석했는데 정답은 저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지. 정답풀이에서 말하는 해석의 이유가 낯설었어. 낯선 당위성 앞에 무척 곤혹스러웠지. 나는 나를 위로했단다. 단 하나의 정답에 대한 당위성은 존재할 수 없고, 옳고 그름을 떠나서 시험 출제자들의 인식 속에 이 문제를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방식 중 하나, 이 정도가 내가 시험문제의 정답을 대하는 태도였어. 그러니까 알긴 알겠는데 그 정답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거였지.
그런데 수학은 언제나 정답이 있었어. 그것도 언제나 보편적으로 설명 가능하고 명쾌하고 납득이 가며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정답이었지. 명확한 당위의 영역에 수학의 문제들이 웃으며 부유하고 있었어. 실제로 수학 문제지를 마주하면 문제 하나하나가 웃으며 허공을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단다. 근의 공식을 외우고, 사인 코사인 그래프를 그리며 문제의 해답을 찾아나가는 기분은 문과의 영역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감각이었어. 수학은 암기라거나, 이해라거나, 훈련이라거나 그런 해석은 부차적인 것이었어. 수학 문제를 풀면 어쨌든 정답이 나온다는 것만이 중요했거든. 그래서 수학 문제를 풀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문제를 한 번 다 풀고 처음부터 다시 한 번 검산을 할 때였어. 꽤나 어렵고 견고해 보이는 문제를 두고, 분명 이것이다 라고 느낄 만큼 자신감 있게 해답을 구한 경우라면 ‘내가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지?’ 라며 흐뭇해하며 계산 과정을 복기했거든. 언제나 나의 시선은 수학의 가장 마지막 지점, 정답을 향해있었어.
그래서일까, <수학이 필요한 순간>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건 수학은 굉장히 목적 지향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정을 천천히 아주 견고하게 쌓아 올리는 영역이기도 하다는 점이었어. 김민형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상당히 많은 수학적인 문제가 3가지 이슈를 한꺼번에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해가 있느냐 없느냐, 둘째는 찾을 수 있느냐, 셋째는 찾을 수 있어도 효율적으로 찾을 수 있느냐. 이 이슈들은 서로 관계가 있으면서 어느 정도는 독립적인 문제입니다.> (p.198-199) 수학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바뀌는 순간이었어. 수학이라고 하는 건 처음부터 태생적으로 정답이 정해져 있고, 정답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내는가, 우리들이 배웠던 수학은 대개 이러한 것이 많았지. 그러나 답이 있는지 없는지, 또 있다면 우리가 그 목적지에 끝내 도달 가능한 것인지, 이런 질문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면 수학은 이과의 영역이 아니라 문과의 영역에 해당할지도 모르겠어.
잠시 플래시백(Flashback). 문득 대학 졸업 전 들었던 과목 하나가 생각났거든. 필수 전공과목은 모두 이수했기 때문에 아무 수업이나 자유롭게 들으며 교양과목으로 인정받으면 되던 때였는데, 수학과에서 개설한 <정수론>이라는 수업을 호기롭게 들었단다. 그리고 한 학기 내내 후회했단다. 쉽게 말해 <정수론>은 일 더하기 일이 왜 이가 되는지를 논증하고 증빙하는 과목인데, 나는 수능 시험에서 만났던 ‘웃으며 부유하는 수학 문제’들을 상상했거든. 정답을 찾기 위한 수학이 아니라 정답을 미리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정답이 왜 정답인지, 그것에 대한 답을 내려야 했어. 대학 졸업을 눈 앞에 둔 2009년의 가을. 그 과목은 C를 받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정수론 수업을 듣던 때만큼 머리를 쥐어짜야 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아. 그건 수학 공식을 외우느냐 아니냐의 영역은 아니었던 것 같아. 논리와 추론과 사고의 게임이었지. 그래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학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과목 중 하나로 남게 되었어. 치열했던 만큼 남은 것들이 더 많았어.
또 시간은 흘러 나는 서른 넷이 되었지. 돌아보니 나는 어떻게 해도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뭐라도 계속 합리적으로 만들고 나아가고 다시 후퇴하고 다시 삶의 뭔가를 건축해나가고, 이런 걸 연속해온 것 아닌가 싶어. 서른 다섯을 앞두고 떠올린 작은 생각이 15년 전의 수학 문제 풀이 과정에서 비롯되었다고, 10년 전의 정수론 수럽에서 비롯되었다고 어떻게 날름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다만, “결국 모든 삶은 수학적으로 사고할 수 밖에 없다”는 김민형 교수의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아. 각자 살아가는 모든 삶에 나만의 해(解)가 있느냐 없느냐, 해가 있다면 그걸 찾을 수 있느냐, 그리고 조금은 덜 헤매며 해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지 …… 모두가 그 질문의 거대한 뿌리를 찾기 위해 각자만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셈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C를 받았던 그 수업을 들었던 걸 조금은 감사히 생각해도 괜찮은걸까. ▨
이 모든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 中
황정운. 글을 읽고 씁니다. 9년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marill00/221400697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