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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 진지한 민주주의자를 위한 선언
수전 니먼 지음, 홍기빈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4월
평점 :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를 24년 9월에 다 읽었으니 벌써 2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의 많은 대목이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인데, 그만큼 인상이 깊었다는 의미가 되겠다. 아니, 단순히 인상 깊었던 수준을 넘어, 내가 끌어올 수 있는 공감을 모두 보낸 후에 남의 공감을 빌려 보내고 싶을 정도로 잘 읽었다.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저자인 수전 니먼의 주장은 제목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말 그대로 “워크(woke)는 좌파가 아니”라는 것. 여기에서 워크란 정체성과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 등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최근 좌파의 화두로 여겨져왔던 것들이 사실은 좌파의 것이 아니라는 뜻인데, 책에서는 몇 가지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한다. 가령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신의 시를 낭독하면서 이름을 알린 미국의 젊은 흑인 시인 아만다 고먼은 네덜란드어 번역본의 번역자로 논 바이너리 백인 작가를 추천했다. 하지만 한 흑인 패션 블로거가 고먼의 작품을 흑인 여성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해당 번역가는 번역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이 경우에는 인종차별에 맞선 사례가 될 수 있을까? 일단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워크의 관점에서는 ‘그렇다’고 답했겠지만, 수전 니먼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특정 인종의 정체성만 남았을 뿐, 조건 없는 보편적 평등이라는 좌파의 가치가 구현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조르자 멜로니가 이탈리아의 첫 여성 총리로 취임했을 때, ‘여성 총리’라는 사실에 찬사를 보내면서 멜로니의 이념이 전후 역대 이탈리아의 어떤 지도자보다 파시즘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무시한 점을 비판한다.
그래서 니먼이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보편주의의 복원이다. 인종, 성별, 성적지향, 계급 이 모든 걸 아우를 때, 누구나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이 주장에 매우 깊이 공감했고 또 지금도 마찬가지다. 특히 특정 소셜미디어에서 펼쳐지는 몇몇 정체성 집단의 주장에서 평등보다는 특정 집단의 우월주의와 반대편 집단에 대한 혐오를 자주 목격하다 보니, 그의 주장에 더욱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에 대한 혐오가 정체성 정치의 귀결처럼 보였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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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은 지 2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그의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몇 가지 의문이 생겼다. 가령 니먼은 정체성 정치로 인한 공백을 들춰냄으로써 보편주의의 필요성을 구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정체성 정치는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현상인데, 옳고 그름만을 따져 물으며 보편주의를 회복할 수 있을까? 여러 정치가와 비평가가 극우가 나쁘다는 사실을 수없이 논증했지만 극우화라는 현상 혹은 그 지지자들을 소거하지 못했듯이, 이미 존재하는 현상을 논증만으로 극복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사회문화적 조건을 따져 묻지 않은 대목 또한 무척 아쉽게 다가왔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한 개인에게 덧씌워지는 정체성이 계속해서 늘어가는 그 조건에 대한 이야기다. 니먼은 인종/성별/성적지향 등을 언급하지만, 이제는 연령, 성별, 직업, 뇌 발달 스펙트럼, 재직회사의 매출 규모, 거주 아파트까지, 심지어 계급 내에서도 수많은 정체성이 파생되었고, 몇몇은 강제된 정체성 때문에 사회적인 불이익을 감당하며 살아간다. 니먼의 정체성 비판이 그들을 얼마나 설득해낼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니, 솔직히 ‘대단히’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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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의 몇 가지 구절을 인용해보자. 정치학 박사이자 외교전문가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에서 “자유주의의 합리적 사고방식은 (...) 신에 대한 경이로운 믿음을 대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한편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불안 세대』에서 많은 문화권에서 “신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나 장소, 행동, 물체를 신성하고 순수하고 숭고한 존재로 지각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인 조 피에르는 『집단 망상』에서 “사회에서 종교적 신앙이 쇠퇴하면 세속적 이념이 점점 더 일종의 종교적 열정 같은 걸로 대체”된다는 정치학자 샤디 하미드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때문에 “모든 깊은 신념은 승화된 종교”로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세 저자의 주장을 모아놓고 보니, 가설 하나를 세워보고 싶어졌다. 신이든 신념이든 인간은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를 갈망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정체성이 우리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아닐까? 많은 나라에서 정파 간 정체성 대결에서 비롯된 사회 갈등이 심각해지는 것에서 종교적 헌신을 엿본다면 근거 없는 비약일까? 자카리아는 위와 같은 책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가 국가의 구조적 쇠퇴에 대응하기 위해 정체성 정치를 활용했다고 말한다. 정체성에 대한 헌신을 통치에 활용하기 위해서였을 터. 그렇다면 내 짐작이 아주 큰 비약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수전 니먼의 보편주의, 그리고 보편주의의 기원으로서 계몽주의를 신뢰한다. 그러나 ‘신’의 자리를 차지한 정체성을 수전 니먼의 정체성 비판 논증으로 극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너선 하이트가 『바른 마음』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마음으로 먼저 판단하고, 이성은 판단을 뒷받침할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휴머니즘의 복원을 시도한 세라 베이크웰의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을 읽으면서 설렘을 느꼈더랬다. 인간적인 호기심 때문에 목숨을 바치고, 결국 동료 인간을 존중하게 된 휴머니스트들을 뒤따르고 싶어졌다.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를 읽은 직후 니먼의 논설에 동의했지만, 여러 날이 지나고 다른 책을 읽으면서 나를 움직인 것은 설렘이라는 결론을 다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