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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만, 일본 3국에서 드라마로 제작된 일본 만화 원작 드라마 [꽃보다 남자]. 최강의 비주얼이라 일컬어지는 캐스팅과 함께 방영 전부터 많은 기대를 모아 화제가 되었다. 4화까지 방영된 지금, 기대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한국판 [꽃보다 남자]를 살펴보자. 

[꽃보다 남자]는 일본 만화가 원작이다. 원작이 있는 드라마는 결과물의 수준이 높은 편이다. 기본 스토리 구조가 있으니, 내용이 산으로 가거나 어처구니없는 내용으로 멘탈까지 삽질할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보다 남자]를 보고 있으면 ‘아, 원작이 있어도 졸작이 나올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드라마의 질적인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영상·대본·배우·음향·편집이다 -자본, 시간 편성 등의 외적 요소는 제외한다―. 즉, 드라마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 다섯 가지 요소의 균형을 높게 유지하 느냐가 관건이다. 그렇다고 훌륭한 균형이 곧 높은 시청률로 연결 되지는 않는다. 시청률엔 많은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높은 시청률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질적으로 훌륭한 드라마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여타 수익관계를 빼놓고 본다면, 기본적으로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감동, 웃음 혹은 그 이상 의 마음을 공유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미술작품이나 서적과 같은 맥락이다. 아주 잠깐 유행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는 작품이 있다. 그런가 하면 작가는 살아생전 배를 곪으며 떨리는 손으로 붓을 놀리더라도, 그 작품은 백년, 이백년, 혹은 더 많은 시간이 지나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작”이 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 더 좋고 나쁜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좋음과 나쁨의 차이역시 판단할 수 없다. 영원한 것은 없다. 좋았던 것이 나쁜 것이 되고, 나빴던 것 이 좋았던 것이 된다. 작가가 좌지우지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작가에게 남은 것은 “노력”이다. 그것도 제대된 방향의 노력. 그렇기 때문에 묻고 싶다. 과연 [꽃보다 남자]는 올바른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답하기 전에 다섯 가지 요소에서 발견된 [꽃보다 남자]의 문제점을 알아보자. 
 

1. 영상 -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세요.

“영상미가 있다.”, “뛰어난 영상미에 압도되었다.”등의 찬사를 받는 드라마들이 있다. 단순히 HD화질이라고 해서 영상미가 뛰어난 것이 아니다. 조각 같은 배우들을 찍는다고 해서 영상미가 올라가진 않는다. 쓰레기가 널린 길거리를 걷는 장면도 예쁜 색감으로 감각적이게 찍어내는 드라마가 있다. 그런가 하면 억 소리 붙은 의상, 신발, 가구들을 방 한 가득 꽉꽉 채워놓고 어린애 장난 수준으로 보여주는 드라마가 있다. 극의 상황에 맞는 구도, 주인공의 감정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화면을 일관성 있게 보여주는 것이 영상미다. [꽃보다 남자]의 영상만 놓고 보면, 색감은 들쭉날쭉하고 화면의 핀트는 종종 어긋난다. 여주인공 얼굴 클로즈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엉뚱한 조연들을 화면에 담는다. 아름다운 경치로 이목을 사로잡아야 하는 장면인데 기껏 물색한 좋은 장소는 손톱만큼 보이고 하늘만 주구장창 화면을 채우고 있다. 대화하는 상대가 보이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을 한다고 해도 딴 생각에 듣지 못할 여지가 있다. 하물며 사람도 아닌 화면인지라, 예쁘게 포장하지는 못할망정 어긋난 핀트의 화면만 줄곧 보여주는 드라마는 집중력을 잃게 만들 수 밖에 없다. 10년 전 유아프로그램에서 보여주던 CG를 계속 보여준다면 더더욱.

2. 대본 - 매우 유감스럽단다.

원작이 된 만화나 대만, 일본의 드라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꽃보다 남자]의 내용은 별반 특별하달 것도 없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전형이다.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기란 쉽지 않다. 관건은 뻔하고 흔한 내용으로 어떻게 시청자들을 웃고 울게 만드느냐다. 내용이 뻔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대서사시라도 읊어줘야 하는 건가. 아니, 그렇지 않다. “이제 갈게, 안녕.”같은 평범한 대사로도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꽃보다 남자]의 대본은 어딘가 정리가 덜 된 느낌을 받는다. 유독 “민서연”의 캐릭터에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했단다.”, “~하지 않으련?”하는 구연동화체 말투의 느낌이 강해서 어색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인물과 인물 사이의 개연

성도 상당히 부족하다. 민서연이 고작 얼굴 한번 본 잔디에게 베푸는 지나친 호의나 굳이 이별인사를 하기 위해 수영장까지 찾아가는 모습은 “민서연의 성격”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가기엔 무리가 있다. 이별장면은 차라리 지후를 만나기 위해 그가 곧잘 바이올린을 켜는 장소에서 우연히 잔디를 만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는 흡입력이 중요하다. 드라마의 인물에 이입해서 그 인물을 해하려는 사람에게 “저 나쁜 놈!”하고 분한 마음이 들 정도로 빠지게 한다면 그건 대단한 능력이다.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면 드라마에 집중하지 않는다. 드라마에 집중하지 않으면 드라마를 감상하기 보단 관찰하게 된다. [꽃보다 남자]의 대본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써주지 않으면 그 드라마에 대한 완성도가 큰 타격을 입는다.

3. 배우 - 최강의 비주얼! 최고의 연기?

대만, 일본에서 드라마가 만들어지면서, ‘우리나라에서 만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가상 캐스팅으로 이어졌다. 많은 가상 캐스팅의 공통점은 F4에 내노라하는 미남 배우진을 포진해 놓은 점이다. F4의 캐스팅이 기사화되기를 여러 번, 확정된 캐스팅에 많은 네티즌들이 “역대 F4중 가장 화려하다”며 환호했다. 확실히 화면에 나온 F4의 모습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영상의 문제로 완전한 매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건강상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윤지후”역의 김현중은 1화부터 파르라니 한 수염자국과 함께 피곤한 기색이 보였고, 바이올린을 켜는 장면에선 신비스럽다기 보단 뿌연 느낌의 효과 때문에 외모가 가려졌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극의 히로인 “금잔디”역의 구혜선이다. 분명 교복을 입었음에도-타이트하게 줄인 교복이지만 그건 이 드라마만의 문제가 아니니 넘어간다―기초부터 볼터치까지 완벽한 풀 메이크업 상태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눈 밑의 하이라이터는 작은 별도 아닌데 시종일관 반짝거려서 괴로울 정도다. 배우의 몰입 정도 못지않게 분장도 중요하다. 고등학생이면 고등학생의 모습으로, 회사원이면 회사원으로 보여야 한다.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윤지후”, “금잔디”를 믿을 준비가 된 사람들은 때때로 보이는 김현중, 구혜선의 모습에 씁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비주얼과 더불어 배우에게 중요한 것은 연기력이다. 때로 이 연기력이 뛰어나면 비주얼의 문제점조차 사라지게할 수도 있다. [꽃보다 남자]의 출연진은 화려하다. 중년 연기자들은 손색없는 연기를 해낸다. F4도 우려와는 달리 자연스러운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여주인공 금잔디의 연기력이 괜찮은지는 의문이다. 구혜선은 예쁘고 귀엽지만, 과장된 표정연기가 극에 융합되지 않는다. 금잔디는 보여주지 않고, 구혜선만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마이걸]의 이다해가 발랄하고 코믹한 “주유린”을 보여주면서도 무게중심을 잃지 않았던 반면, 금잔디와 구혜선의 균형은 위태로워 보인다. 또 의외의 문제점은 구혜선의 발성이다. 극중에서 보통 아랫입술을 내밀고 비죽거리며 말하거나 있는 힘껏 소리지르는 두 가지 상황이 대부분이다. 전자의 경우는 너무 연극적이라 자연스러운 맛이 없어보이고, 후자의 경우는 놀래서 음량을 마구 줄여야할 만큼 소리가 크다. 연기경력이 꽤 있는 데다가 사극을 촬영한 경험도 있는데 발성의 문제일까, 역할 몰입의 문제일까. 아니면 둘 다 문제일까. 답은 그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4. 음향 - 넣어두게, 이 사람아.

언젠가부터 드라마 O. S. T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드라마의 주제곡이 드라마와 조화를 잘 이루면 이룰수록 당연히 드라마 자체의 완성도는 완벽에 가까워진다. 거리에서, 카페에서 어떤 드라마의 주제곡이 흘러나오면 “아, 어떡해. 눈물 날 것 같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드라마의 내용이 생각나며 기쁘거나 슬픈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떠오른 것이다. [꽃보다 남자]도 그러한가라고 묻는다면 지체 없이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없다. 눈물이 고인 인물, 쓸쓸한 인물이 화면에 보이는데 발랄한 주제곡이 원박자 그대로 시원하게 흘러나온다. 조금 느리게 가사 없는 MR을 사용하면 덜 이상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결국 귀에 들려오는 가사 내용이 비극적인 상황을 희극적으로 만들어버린다. 게다가 “슉”, “띠용”, “ 삐이이익”하고 들어가는 음향효과는 고급 요리를 누가 먹다 남긴 음식물로 보이게 하는 탁월한 효과를 선보인다. 
 

5. 편집 - 순간이동과 타임머신.

위의 4가지 요소가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편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용없다. 편집으로 인하여 극의 흐름이 자연스러워 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한다. [꽃보다 남자]의 편집은 후자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시간의 흐름과 사건을 무시한 채 매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3화를 예로 들어보자면, 분명히 수학여행을 가 있었는데 바로 다음 장면에선 학교 수영장이다. 수영장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가 싶은데 다시 학교로 걸어가고 있다. 그새 하루가 지났는지, 아니면 일주일이 지났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 빠른 건 좋은데, 느린 것만 못하다. 적어도 정류장에서 기다고 있는 승객은 태우고 갔으면 좋겠다.

[꽃보다 남자]는 엉성한 편집 때문인지, 각 캐릭터의 특성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잔디는 갑자기 화냈다가, 장면이 바뀌면 시무룩하기도 하고, 또 몇 초 지나면 다른 곳에서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있다. 너무 순식간이라 공감할 틈을 주지 않는다. 자연히 모든 캐릭터들의 감정변화도 낯설게 느껴진다. “쟤 왜 저래?”하는 반응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슬프다면 슬픈 걸 보여주고, 보는 이의 슬픔을 이끌어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 슬퍼. 알겠지? 자 다음, 나는 이제 기뻐 그리고 지금 나는…….”하고 자기 말만 두다다다하고 끝내버린다.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려고 했던 시청자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제법 거창하게 문제점들을 열거했지만, 말하고 싶은 것은 “드라마 팬 사이에 두고두고 회자될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서 아쉽다”이다. 물론, 보는 눈은 차이가 있으니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한다. 기본예절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귀찮은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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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쿠 제1장 - 권력의 시작]


오오쿠 시리즈의 두번째. 2004년 작인 [오오쿠 제1장-권력의 시작].
오오쿠의 여제로 군림한 카스카의 일생이 그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후쿠(훗날의 카스카)와 에요(히데타다의 정실)의 대립이 치열했던 초반부.

에요는 제 손으로 자식을 기르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명에 의해 후계자가 될 장자는 유모의 손에 기르도록 되어 있었다. 에요는 원망할 수 없는 존재였던 이에야스 대신, 유모로 선발되어 온 후쿠에게 그 증오의 시위을 겨누었다. 큰아들 타케치요를 사랑했으나 후쿠의 존재가 거슬렸던 에요는 모성을 억누르고, 뒤이어 태어난 차남 구니치요에게 고였던 사랑을 쏟아붓는다. 급기야 에요가 구니치요를 후계자의 자리에 앉히려 하면서 후쿠와의 대립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때, 에요가 후쿠에게 “배신자의 딸은 믿을 수 없다.”라는 말을 한다. 이는 에요의 외삼촌인 노부나가를 가신이었던 미츠히데가 배반한 “혼노사의 변”과 관계가 있다. 후쿠의 아버지는 미츠히데의 가신이었기에 후쿠를 “배신자의 딸”이라 칭한 건 에요의 입장에서 보면 무리는 아닐 것이다. 드라마의 초점이 후쿠의 일생에 맞춰졌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상당히 축약되서 간단하게 짚고 넘어갔다. 그나마도 후쿠와 관련된 부분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에요에 관한 부분은 “노부나가의 질녀”라는 사실 뿐이다. 그러나 에요의 삶 역시 후쿠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뭐든지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는 법,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에요의 과거사에 대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난세에 피어난 꽃]

에요는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오이치의 3녀 중 막내딸이다.
난세의 여자의 삶이란 대개가 그렇듯 전장에 나가 싸우는 남자들 못지않은 고통과 아픔이 있게 마련이다. 물론 오이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노부나가에 의해 아사이 나가마사와 정략결혼을 했다-부부의 금슬은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그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딸과 두 아들을 얻은 오이치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천하재패를 목적으로 싸우던 노부나가에 의해 공격받게 된 나가마사는 오이치와 세 딸을 노부나가에게 보낸다. 이때 히데요시는 자신이 열렬하게 사모하던 오이치를 자신에게 달라는 청을 하는데 거절당했다. 오이치는 히데요시를 싫어했는데, 히데요시의 신분이 비천하고 추남인데가 그녀의 아들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오이치는 세 딸-차차, 하츠, 에요-과 함께 오다가에 돌아온다(오이치의 장남은 살해당했고, 차남은 출가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오이치는 오다가의 비호를 받으며 9년여 동안 세딸과 지내게 되는데, 노부나가는 질녀들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노부나가 사후, 오이치는 노부나가의 가신인 시바타 가쓰이에와 재혼하게 되는데, 이 역시 정략결혼이었다. 가쓰이에는 히데요시와 주도권 싸움을 하게 되는데 패하여 후퇴하는 상황이 된다. 자신의 본거지인 기타노소 성마저 포위당한 가쓰이에는 할복한다. 이때 오이치는 도망가라는 말을 뿌리치고-“히데요시의 측실이 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라고 말했단 이야기도 전해진다- 가쓰이에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이 때에도 오이치와 그 자녀들을 구하려고 했다고도 하는데, 갈 곳 없는 세 자매를 보호한 걸로 봐서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로 보인다. 세 자매는 친아버지와 새아버지, 남자형제들의 원수에게 보호를 받게 된다. 오이치의 세 딸들은 미인이었던 어머니를 닮아 모두 외모가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그 중 오이치와 가장 흡사한 외모를 지녔던 차차는 히데요시의 측실이 된다(후에 후계자인 히데요리를 낳는다).

차녀 하츠는 히데요시 사후의 도요토미 가문과 이에야스 가문을 중재했다고 한다. 그리고 막내 에요는 히데타다와 재혼하여(3번째 혼인이었다) 이에야스 가의 며느리가 된다. 에요의 전남편인 도요토미 히데카츠 사이에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은 에요가 재혼할 때 차차가 데려가 길렀다고 한다. 오오쿠에서는 8살 연하의 히데타다를 쥐락펴락하며 실권을 과시하지만, 그 이면엔 이처럼 굴곡진 사연들이 많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같은 장면이라도 더 넓고 깊은 감상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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