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까지 가자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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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페이지는 의리로 읽는 편이다. 그러나 <달까지 가자>의 해설은 소설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과 느낌을 명쾌하게 짚어주어서 감탄했다. 작가가 새롭게 창조했으나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세계. 그 세계를 알차게 여행하고 왔다. 책 속의 세계나 책을 읽고 있는 내가 속한 세계가 다르지 않았고, 책 속의 인물 역시 눈을 들면 볼 수 있는 사람들처럼 생생했다. 장면 장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는데 그 어렵다는 드라마화가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난 삼인방이 이더리움에 들어가는 순간 말리고 싶었고, 가치가 올라갔을 때도 어느 날 갑자기 손해를 볼까 봐 조마조마했다. 마치 내 일처럼, 내 친구의 일처럼 애타는 마음으로 지켜보았기 때문일까?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어딘지 멍하고 발이 붕 뜨면서도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 사람들을 마음 놓고 편히 좋아할 수 있었다. 이 둘과 있으면 내 삶이 딱히 별로라는 생각도 잘 들지 않았다. - P106

어느 순간,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팀장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팀장은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잘 모르는 척하면서 온갖 책임과 실무를 아랫사람들한테 떠넘기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회사를 편하게 다니고 있는 게 아닐까? 꾀쟁이는 내가 아니라 팀장인 게 아닐까? 정말 그런 걸까? - P139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더는 이 회사에 다니지 않는 때가 온다면, 그리고 그때 이곳을 그리워할 수 있게 된다면, 다른 게 아니라 정확히 바로 지금 이 장면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 나는 지금 이 순간의 한복판에 서서 이 순간을 추억하고 있었다. - P156

나 믿을 구석 하나 없는 것도 맞고 그래서 내 인생 책임져줄 사람이 온전히 나밖에 없는데, 내가 날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는 거. 그 와중에 우리 엄마 아빠 노후마저 아무런 대책이 없고 여차하면 내가 책임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 - P235

나는 열심히 하지 않고도, 노력하지 않고도, 여윳돈을 손에 쥐고 싶었다. 조금만 더 넉넉하게 살고 싶었다. - P249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을 정말로 싫어한다고. 그렇게 사람을 아래로 보면서 하는 말이 어디 있느냐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정도’라는 말 앞에 ‘나한테는 아니지만’이 생략된 것 같다고 했다. 나한텐 아니지만 너한테는 그 정도면 족하지. 그 정도면 감사해야지. 그런 말들. 기만적이라고 했다. 그런 종류의 말을 하는 사람의 면면을 잘 봐두라고 했다. 그게 정말로 자신을 포함한 누구에게나 모자람 없이 넉넉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를. - P309

언제나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혹은 나 자신의 사소한 실수에도 순식간에 곤두박질쳐질 것만 같았다. 누가 툭 건드리거나 빗물에 미끄러져서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그길로 그대로 추락해버릴 것만 같았다.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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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아침드라마 - 우리는 마치 예방주사를 맞듯 매일 아침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아무튼 시리즈 47
남선우 지음 / 위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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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교시간을 맞추려면 아침마당이 시작하기 전에는 나가야 했다. 직장인이 된 지금은 텔레비전을 켜기도 전에 나가야 한다. 아침드라마는 모처럼 시간이 날 때나 아주 어렸을 때 엄마와 함께 보았다. <엘레지>에 푹 빠져 엄마와 함께 다음 내용이 무엇일지, 저 아저씨난 왜 저러고 저 할머니는 왜 그러는지 물어보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시간에 쫓겨 엄마의 손을 잡고 달려가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TV소설까지는 봤던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표지에 나온 아드의 한 장면처럼 밈이 되어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는 장면만 알고 있는 정도.

아침드라마가 폐지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 시간에 저녁드라마를 재방송한다는 말에 다시금 놀랐다. 무엇보다 아드를 사랑하는 저자가 아드를 보는 관점이 새로웠다. 힘든 일상을 견뎌내기 위한 예방주사라니, 멋지지 않은가!

아침드라마는 아침마다 우리의 인식의 폭을 넓혀주고 편협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허무는 유연하고 급진적인 매체였던 것이다. - P40

<불새>의 세계에서 아버지가 저지른 죄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서정민은 <불새 2020> 세계에서 속죄와 사랑을 모두 쟁취한다. - P77

그때는 분명 맞았는데 지금은 틀린 것들이 보였다. - P79

아침드라마를 볼 때면 늘 조연의 순조롭고 평화로운 삶에 감탄하게 된다. 조연은 모든 면에서 대단히 출중하지는 않지만 철이 없는 대신 구김도 없으며, 쉽게 실수하고 쉽게 사랑에 빠지고 쉽게 용서받는다. 주인공에게 몰아준 위기와 고비와 역경과 운명의 장난은 조연에겐 한갓 강 건너 불구경일 뿐이다. 조연은 드라마의 협찬사가 어디냐에 따라 의료기기 매장이나 의류 매장, 치킨집 등으로 종목만 달라질 뿐 사장님이라는 자리에 손쉽게 입성한다. - P103

그날 내게는 쑝쑝돈까스의 하얀 간판이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의 9와 4분의 3번 승강장처럼 느껴졌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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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정해연 지음 / &(앤드)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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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절반은 가해자를 다루었고, 절반은 피해자의 이야기다. 제본이 독특하게 되어 있어 앞, 뒤가 따로 없다. 가해자 분량을 다 읽고 나서야 구성이 남다르다는 걸 알았다. 같은 사건, 같은 시간대를 다루고 있는데도 긴장감이 엄청났다. 악의 없는 사람들의 삶이 망가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아냈다. 고령자 운전 사고 기사를 여럿 보았기 때문에 책장을 덮고도 생각이 길게 이어졌다. 사고는 한순간이지만 복구할 수 없는 주변인의 인생은 어떻게 회복해야 좋을까? 자극적으로 편집해 기삿거리로 올리는 정성을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같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쓸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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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최고 화신미용실입니다 오늘의 청소년 문학 34
이호영 지음 / 다른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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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읽을 땐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 첫째는 역사를 왜곡했을까 봐. 둘째는 너무 처참한 나머지 오열하게 될까 봐. <경성 최고 화신미용실입니다>는 마지막 장까지 그런 걱정 없이 읽었다. 잘못 다루면 한없이 무거워지는 주제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잘 담아낸 덕분이다. 목숨과도 같았던 머리채를 사수해야 했던 그 시대 여성들이 뼈말라로 대표되는 과도한 미의 기준에 허덕이는 요즘 여성들을 보면 뭐라고 할까?

모쪼록 요즘 여성들이 상업적 잣대에 휘둘리지 않는 튼튼한 마음으로 건강한 몸을 가꾸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할아버지가 상투를 자른 것은 당신이 스스로 한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일본의 강압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그 강압을 받아들인 것이다. - P65

일본인이 지배하는 조선에서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부터 보이지 않는 것까지 온갖 핍박과 불공평함, 차별에 익숙해지는 것이라 했다. 그것에 의문을 품고 항의를 시작하면 조선 땅에서 제정신으로 살기 힘들다고도 했다. 그래서 그걸 하루라도 빨리 바꾸려고 인덕이 부모님이 멀리 떠난 것이라고 했다. 인덕이만큼은 다른 누구의 땅도 아닌 조선인의 땅에서 조선인으로 살게 해 주겠다고 말이다. - P115

"이 경기가 남과의 경쟁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건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야. 그러니 너만의 스타일을 찾아서 연마해라. 아주 날카로운 너만의 무기를 만들어. 그럼 네 앞을 스치는 단 한 번의 기회라도 잡아 낼 수 있을 게다." - P126

"내 머리칼을 자르는 것이 여기 있는 젊은이들이 자기 꿈을 이루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는 백 번이라도 나설 겁니다. 꿈을 가지고 튼튼하게 자란 조선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조선이란 이름을 되찾아 줄지 누가 압니까? 나는 그 세상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공평하게 노력하고 경쟁하는 세상,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바를 결국 이루어 내는 세상 말입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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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당근마켓 - 우리는 그렇게 만날 수도 있다 아무튼 시리즈 59
이훤 지음 / 위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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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으로 물건을 사고 파는 지인이 있다. 괜찮은 가격에 좋은 물건을 얻을 때도 있고, 진상을 만나 물건을 팔기도 전에 진이 빠지는 모습도 보았다. 후자의 인상이 너무도 강렬한 나머지 당근을 해본 적은 없다. 앱은 깔았지만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그나마 당근에 들어가서 한 일도 살 물건을 찾는 게 아니라 정보를 찾기 위해서였다. 유용한 정보를 얻은 뒤로 방치해둔 앱을 켜보았다. 책에 언급되었던 메뉴도 보이고, 예전에 스치듯 보았던 판매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실도 발견했다. 사기가 늘었으니 조심하라는 글과 어느 산 정상에 올랐다는 후기가 같은 화면에 공존했다.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서 펼쳤던 벼룩시장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필요한 물건은 언제든 생기게 마련이니 조만간 나도 당근 해볼까?

물건은 그런 힘이 있다. 유효기간 있는 처방약처럼 즉각적인 위안을 주는. - P12

활자와 이미지로 빼곡한 SNS에서, 중고 거래의 장에서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 이름일 동안 당신은 얼마큼 당신인가. - P59

사진도 여느 물건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소실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데, 사진 또한 어딘가 보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화된 사진도 파일로 저장되는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기에, 사진 또한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자연스럽게 잊히고 바래고 지워진다. 그것을 간직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 또한 천천히 사라진다. - P66

"너희가 왜 당근 하는지 알겠어. 나도 가끔 여기서 살 것 같아. 근데 지난번에 다솔이가 말했잖아, 패션도 언어라고. 패션은 내가 유창해지고 싶은 언어는 아닌 것 같아." - P77

30여 년 동안 컵과 화병을 계속해서 찾고 들이고 아꼈을 모습이 그려졌다. 그렇게 들인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혼자 움켜쥐지 않고 놓아주기로 선택한 건 좋음이 내 반경에만 머물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었겠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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