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온톨로지 - 사랑에 관한 차가운 탐구
조중걸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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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읽다가 보면 사랑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아서 제목에 낚였나 싶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어떤 하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전제해야할 것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먼저,

사랑라는 것은 실증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왜 침묵해야 하는지를 또 설명한다.

(내가 예전에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지금은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때 내 마음에는 그것이 진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 분석한다.

섹스, 혈연간의 사랑, 애정. 크게 이렇게 세 가지 인 것 같다.

이것들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인간사 전반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도입한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로부터 독립하려는 지향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과 인간은 세계에 포함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두 가지의 길항작용으로 인간의 역사와 예술과 철학 등등을 설명하고,

위의 저 세가지를 분석해낸다.

분석의 결과는 물론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사랑이 될 가능성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에 이르러 저자는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아주 짧막하게나마 말한다.-그런데 이 부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인간은 자연에 독립된 존재다.

이 두 가지 명제 사이에서 많이 고민했었다.

둘 다 진실이면 안된다는 법이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마지막 부분이 이 책의 일관성을 보장해주고 있는 것 같다.

사랑을 완전히 해체해버린다면 저자는 인간이 세계에 포함된 존재일 뿐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고,

사랑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을 그저 믿어버린다면 인간을 세계로부터 완전히 독립시켜보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구성 자체도 저자 자신의 관점과 일관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조중걸 교수의 철학에 대한 관점이 설득력 있는 것 같고, 

실증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저자의 또 다른 책인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를 읽고 있다.

과거의 믿음이 변화해왔다는 사실이 현재의 이념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

진정한 교양은 먼저 스스로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사랑이라고 불릴 수 없는 다른 어떤 것이라고 밝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신과 아름다움이 어쩌면 존재할 수 있듯이 사랑도 존재할 수 있다. 이것과 관련해서도 마지막에 얘기할 것이다. 나는 사랑을 포착하고자 하지 않는다. 단지 어쩌면 그것일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우리의 어떤 경향성과 심적 희구에 대해서 결국 말하고자 할 뿐이다.

철학은 결국 인간 지성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의 문제다.
물질주의자들은 거리낌 없이 스스로가 동물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물론 동물이다. 그러나 이들은 차별성과 차이를 혼동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차별성은 없다. 모두가 우연히 존재하는 우연한 동물들이다. 동물에게는 세계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의지도차도 없다. 그러나 인간 내면에는 그것이 분명히 있다. 물질주의자들은 세계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인간의 경향에 완전히 눈감는다. 그들은 지성에 일말의 의미조차 부여하지 않는다. 부여한다면 위선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동물임을 말하며 물질주의자임인 자신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침팬지나 바퀴벌레가 스스로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적 이상주의자가 저지르는 오만이 최악은 아니다. 오만은 단지 지적 이상주의의 그늘이다.
상스러움 혹은 기만으로 덮힌 물질주의적 천박함이 최악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과 물질적 향락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 물론 이것은 취향의 문제다. 법률을 어기지 않는 한 모든 세계관과 거기에 준하는 사회적 행위는 결국 취향의 문제로 귀결된다. 슬프게도 여기에도 위계가 존재한다. 솔직한 사람에서 위선적인 사람에 이르는.
취향은 비난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기만은 비난받는다. 그것은 삶에 해악을 끼친다. 우리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세계에 어떤 희망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자들은 세계에서 스스로를 독립시키는 이상주의자와 세계에 스스로를 일치시키는 사람 양쪽 모두에 걸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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