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차(茶)주전자에서 물이 끓고있다. 어둑해진 창밖은 여전히 빗소리로 흥건하고, 나는 잠시 두개의 물소리가 만들어내는 묘한 화음에 빠져든다.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을 때의 이 느낌이... 나는 좋다. 동(銅)으로 이뤄진 몸체의열기와, 앤틱한 곡선의 손잡이를 둘러싼 사기(沙器)의 두툼한 느낌이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낡고, 충분히 그었다는 점이 마음에든다. 티백이 담긴 찻잔에 물을 따르고... 나는 라디오를 켠다. - P34

젊은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를 사랑해 온 인간의 마음은 오래 신은 운동화의 속처럼 닳고 해진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어떤 빨래로도 그것을 완전히 되돌리진 못한다... 변형되고, 흔적이 남은 채로... 그저 볕을 쬐거나 습기를 피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다 태워버려요 엄마. 그런 말을 내뱉은 나 자신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몇 번 신지 않은 운동화 같은얼굴을 서랍 깊이 파묻은 채, 나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닫을 때의 서립은 이상할 정도로 삐걱이고, 무거운 것이었다. - P68

숙제처럼 밀려 있던 앞날과, 아무런 검사도 받지 못한 지난날들이 엎드린 시신처럼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누워 있던 밤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불꺼진 방안에서한참을 생각하다 잠이 든 밤이었다. 인생이 힘든 것은예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결국 길고 긴 이 이야기도 복습에 불과할 뿐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일이라고 지금의 나도 중얼거린다. 있는 힘을 다해 복습을 하는이 순간에도 인생은 흐른다. 흘러, 간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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