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야,
아아, 네가 여기 있었더라면,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너 또한 볼 수 있었더라면, 들판에서 오전 나절을 보내는강행군에 난 아주 녹초가 됐어. 이 고장의 햇살은 사람을 아주 기진하게 만들지. 봄과는 또 전혀 달라. 하지만 뙤약볕에땅이 다 그을릴 지경인 계절로 접어들었다고 해서 자연에 대한 내 애정마저 가물 리 없지. 원숙한 황금과 구리 빛이 이제 만물에 깃들고 또 하늘의 청록이 최고로 작렬하면서, 경탄할 조화를 이루는 배색과 들라크루아를 연상시키는 색조 분할이 눈을 즐겁게 한단다. - P37

요 근래 받은 그림들을 보면서 형의 마음 상태에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돼. 그림 하나하나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색의 경지를 담고 있는데, 이런 강렬한 색의 표현은 그 자체로도 보기 드물지만, 형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가고 있어,
그런 극한 지점에까지 이르기 위해 형이, 특히 형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되기도 하고, 게다가 정신이 혼미해질 수밖에 없는 임계점에 이를 지경에까지 스스로를 몰아넣었을 걸 생각하면...
그런 이유에서 난 지금 형이 많이 걱정돼.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는 건강을 그런 식으로 시험해서 안 된다고.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간략하게 표현한 것일 뿐이래도 형이 그린 그림이라면 역사에 오래 기억되고 그 가치를 인정받을 특출함을 충분히 지닌걸..
지금껏 완성한 그림들만 해도 아름다운 걸작들이 얼마나 많은데!
용기를 잃지 마. - P106

이젤 앞에 서 있을 때가 내가 유일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는 때야.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그림을 그리는 거지. 스스로의 만족과기쁨을 위해. - P107

이유를 납득할 수 없는 인생살이의 수많은 수수께끼가 떠오를 때면, 난 밀밭을 내다봐.
저 밀밭의 이야기가 곧 우리들 이야기 아니겠니. 따지고 보면 우리도 밀과 여러모로 닮아 있잖아?
밀처럼 혹은 여느 식물처럼 자라나고, 상상력이 갈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못할 때도 있다는 점에서 밀과 마찬가지로 무력한 존재이며, 때가 되면 수확되는 것도 그와 같지.
인류의 이야기는 밀의 이야기와 무척 흡사하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구나. 흙에 뿌려져 싹트지 않는다 한들 그게 그리 큰 차이일까? 그렇대도 여전히 곱게 빻아져 빵이 되지 않더냐.
행운과 역경,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라는 것... 결국 모두 상대적인걸. - P109

지금껏 내 인생엔 행운과 불운 모두 깃들었지,
불운만 있었던 건아니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건,
기꺼이 손 내밀어붙들자고,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쟁기를 끌 거야.
그리고 함께 경이에 찬 눈을 돌려 데이지꽃과 새로이 갈아엎은 흙덩이와 봄에 싹 틔우는 관목 가지를, 청명한 하늘의 고요한 푸른빛을, 가을의 뭉게구름을, 겨울의헐벗은 나무를, 저 태양과 달과 별을 바라보자.
앞날은 예측 못할지언정, 그것만큼은 온전히 우리 몫으로 남을 테니. - P132

밤은 낮에 비해 훨씬 깊이 있고 풍부한 색감을 지녔다는 생각이 종종 들어. 자주와 파랑과 초록 빛깔의 강렬함은 밤에 유독 두드러지지.
별을 보고 있노라면, 지도 가득 점점이 박힌 도시와 마을들이 연상돼, 창공을 수놓는 저 빛의 점들이 프랑스 지도에 박힌 흑점들만큼이나 손쉽게 찾아갈 수 있는 장소라면 어떨지 상상해 보렴. 타라스콩으로, 루앙으로, 지도 위 저 점들을 목적지 삼아 기차에 몸을 싣듯, 우린 어쩌면 별에 다다르기 위해 죽음에 몸을 싣는 건지도 몰라.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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