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을유사상고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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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쇼펜하우어의 '소품집'을 번역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을 읽으며 새해를 시작했다.

올해 끝 쇼펜하우어의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으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이 책이 내게 끼친 영향이 어찌나 크고 깊은지 글 한 편으로 그 모든 생각과 감정과 복잡한 마음들을 담아내기가 무척 어렵다. 시간과 공간 바깥에 존재하는 의지, 의지의 현상으로서의 인간, 삶을 의욕하는 의지, 절대 지치지 않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과 같은 의지, 세계는 나의 표상, 의지는 표상의 세계를 통해 의지 자신이 삶을 의욕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의지는 지치지 않고 채찍질한다, 원하라, 계속해서 원하라, 욕망하라, 멈추지 말아라...


-236쪽, 마지막으로 자신의 노력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언제나 의욕의 최종 목표인 것처럼 우리에게 보이게 하는 인간의 노력과 소망에서도 이와 같은 것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들이 달성되지마자 더 이상 최종 목표와 유사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그 때문에 곧 잊히고 폐기되며, 공공연한 것은 아니라 해도 언제나 사라진 착각으로서 무시되고 말 것이다. 소망에서 충족으로, 이 충족에서 새로운 소망으로 끊임없이 옮겨 가는 유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생명을 굳어지게 하는 끔찍한 권태이자 특정한 대상이 없는 김빠진 동경으로서, 숨 막히게 하는 우울로서 나타나는 정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아직 무언가 소망하고 노력할 것이 남아 있을 때가 그래도 제일 행복한 법이다. 이때 소망이 빨리 이루어지는 것은 행복이라 불리고,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은 고통이라 불린다. 이 모든 사실에 따르면, 의지는 인식의 빛으로 조명되는 경우 자신이 지금 여기서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늘 알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무엇을 소망하는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즉, 모든 개별적인 행위에는 목적이 있지만, 전체 의욕에는 목적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모든 개별적인 자연 현상이 이때 이곳에 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원인에 의해 규정할 수 있지만, 이 현상 속에 나타나는 힘은 일반적으로 원인을 갖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자연 현상이 사물 자체, 즉 근거가 없는 의지의 현상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로서 의지의 이 유일한 자기 인식은 전체로서 표상이며, 직관적 세계 전체다. 이 세계는 의지의 객관성이자 의지의 드러냄이며 의지의 거울이다.


-384쪽, 순수하게 그 자체로 고찰하면 의지는 인식이 없으며, 맹목적이고 제어할 수 없는 충동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충동이 우리 자신의 삶의 식물적인 부분에서뿐 아니라 무기적이고 식물적인 자연이나 그 법칙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본다. 그런데 의지는 자신에 도움이 될 만큼 발전된 표상의 세계가 추가됨으로써 자신의 의욕에 관한 인식과 자신이 의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을 얻는다. 다시 말해 의지가 의욕하는 것은 이 세계, 즉 있는 그대로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얻는다. 그 때문에 우리는 현상하는 세계를 의지의 거울, 의지의 객관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삶이란 표상에 대해 의지의 의욕이 나타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의지가 의욕하는 것은 언제나 삶이다.


-388쪽, 우리는 무엇보다 의지의 현상 형식, 즉 삶의 형식이나 실재성의 형식이 미래도 과거도 아닌 현재뿐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미래나 과거는 개념 속에 존재할 뿐이며, 이것들이 근거율에 따르는 한 인식과 관련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과거 속에 살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미래 속에 살지 않을 것이다. 현재만이 모든 삶의 형식이고, 결코 삶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삶의 확실한 소유물이다. 현재는 항상 그 내용과 함께 현존한다. 현재와 그 내용은 폭포수 위의 무지개처럼 확고해서 흔들림이 없다. 의지에게는 삶이, 삶에게는 현재가 확실하고 틀림없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바라보는 이 세계의 본질은 의지-멈추지 않는 의욕이다. 그리고 의욕은 고통을 기초로 한다. 춥거나 덥지 않게 살고 싶어 집을 원한다. 성적 충동이 우리를 채찍질해 짝을 찾는다.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성공을 추구한다. 의욕이 쉽게 충족되지 않으면 고통스럽고, 또 의욕이 너무 빨리 충족되면 무료해진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진자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사실 이 두 가지가 삶의 궁극적인 구성요소다.(426쪽)' 욕망은 끝을 모른다. 삶은 고통이다. 나라는 인간은 불변의 의지가 잠깐 꾸는 꿈에 불과하다.


-438쪽,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을 외부에서 보면 얼마나 무의미하고 보잘것없게 흘러가는지, 안에서 갖는 느낌으로도 얼마나 막연하고 정신없이 흘러가는지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이들의 삶은 빛바랜 동경이자 괴로움이고, 보잘것없는 일련의 생각을 품고 인생의 사계를 거치며 죽음을 향해 꿈결처럼 허우적거리며 걸어간다. 이들은 태엽이 감기고는 왜 그런지 알지도 못하고 가는 시계의 태엽 장치와 같다. 한 인간이 태어날 때마다 인생이라는 시계의 태엽이 새로 감기는 것인데, 이는 이미 수없이 연주된 손풍금 곡을 악절마다 소절마다 보잘것없게 변주하여 거듭 되풀이하기 위함이다.

모든 개인, 인간의 모든 얼굴과 그 인생행로는 자연의 무한한 영, 즉 삶에의 불변하는 의지의 짧은 꿈에 지나지 않고, 자연의 영이 공간과 시간이라는 무한한 백지에 재미로 그려 보는 덧없는 형상에 불과하다.


한 해의 끝을 마무리하는 글로 지나치게 우울하지 않은가? 정작 쇼펜하우어를 읽는 내내 크게 슬프지 않았다. 의지라는 개념을 알게 된 것 자체가 내겐 하나의 구원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무얼 원하는지도 모른 채 원하는 고통에서 나를 충동하는 근원을 깨닫는 것. 지치지 않고 산 위에 바위를 올려야만 하는 인간의 고통은 삶이 고통이라는 인식 자체부터 시작이다. 생각 없이 살 때는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세계의 베일 너머 '의지'를 인식하기, 예술 작품을 통해 순수한 의지를 인식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거나 종교의 성인들과 같이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꿰뚫고 의욕하는 것을 멈추기, 구원은 이미 존재한다. 우리의 선택이 중요할 뿐.


내년은 쇼펜하우어가 보여 준 의지로서의 세계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해가 될 것 같다. 이 책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감히 말하진 않겠다. 애초에 나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읽지 않는다. 철학'하기'를 위해 도전한다. 덧없는 삶의 고통 속에서 잠시나마 고통을 잊기 위하여.


-518쪽, 그 자신의 본성과 수많은 쓰라린 투쟁을 거친 뒤 결국 완전히 극복하는 인간은 순수하게 인식하는 존재로서만, 세계를 맑게 비추는 거울로서만 남아 있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에도 불안해하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에 우리를 묶어두고 계속적인 고통에 시달리게 하면서 욕망, 두려움, 질투, 분노로서 이리저리 휩쓸리게 하는 의욕의 온갖 수천 가지 실마리를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조용히 미소를 띠고, 한때 그의 마음까지 동요시켜 괴롭혔지만 이제는 승부가 끝난 뒤의 장기의 말처럼, 또는 축제의 밤에 우리를 놀리고 불안하게 한 가장 무도회의 복장이 아침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는 것처럼, 그의 앞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존재하는 이 세상의 환영을 되돌아본다. 삶과 그 모습은 덧없는 현상처럼, 이미 꿈에 현실의 햇살이 새어 들어와 더는 그를 속일 수 없는, 반쯤 깨어난 사람의 가벼운 아침 꿈처럼 그의 눈앞에 어른거릴 뿐이다. 또 이 꿈과 마찬가지로 삶의 모습도 급기야는 무리한 변천을 거치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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