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 타자기를 위한 레퀴엠
요나스 메카스 지음, 금정연 옮김 / 시간의흐름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이와 타자기. 종이를 보면 나는 글을 쓸 생각부터 하고, 타자기를 보면, 완전 미쳐버린다. 글쓰기는 다른 무엇과도 별 관계가 없다. 종이와 타자기가 전부다. 그래요, 데리다 선생님. 여기, 아마도 제가 궁극의 해체주의자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더라도요. 실로 의미 있는 어떤 것도 없다. 단어들, 단지 단어들. 혹은, 좀 더 정확하게는, 문자들. 당신은 그냥 앉아서 타자기를 두드린다. 그게 전부다. 문자에 이어지는 문자, 단어에 이어지는 단어. 어떤 단어일 수도 있고, 다른 단어일 수도 있다-별 차이는 없다. 그저 타이핑일 뿐. 문학은, 친구여, 저기 바깥의, 현실 세계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네, 현실 세계 같은 게 있다면 말이지만.


요나스 메카스, 수동 타자기를 위한 레퀴엠, 시간의흐름


지난 가을, 책과 노트를 챙겨 자전거를 타고 야외 좌석이 있는 카페로 달려갔다. 집에서 자전거로 십 분 거리에 있는 카페는 유치원이 바로 앞에 있어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소리지르며 뛰어다니는 소리가 잘 들린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긍정하게 된다. 지금처럼, 무엇이든 쓰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쓰는 것보다 낫다고 긍정하는 긍정법.


글쓰기는 종이와 펜만 있어도 된다. 노트북이 서운해 할 수 있으니 슬쩍 껴 준다. 이 글의 초고는 노트에 썼다. 이렇게 한 글자씩 이어가며 썼다. 이 글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틈도 주지 않고 썼다. 그게 전부다....방금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었다. 기도 소리 같은데 뭔가 비밀스러운 종교의 배 안쪽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는 아-소리 같은 이 소리는 뭐지? 


고개를 들어 보니 카페가 위치한 건물 3층에 스피치 교습소가 있었다. 평일 오전에 스피치를 연습하러 학원에 와서 발성 연습을 하는 사람들의 긍정성에 대하여 쓰기...지금 11시가 넘었으니 점심 시간에 틈을 내어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달려온 갓생 직장인일수도 있다. 과연 우리는 어른이 된 뒤로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


점심시간이 되었고 곧 이 글을 마무리한 뒤 가장 좋아하는 김밥집에서 김밥을 포장해 근처 공원으로 갈 것이다. 무엇이든 썼다. 이것도 문학이 될 수 있을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다. 문학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는 뭘 썼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