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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평점 :
미술관에 전화벨이 울린다. 그림 속의 왕들은 한 나라를 다스렸을 지 모르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다. 흰 대리석으로 영원히 남겨진 영웅들은 굳어버린 손을 뻗어 전화를 받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반응'에 익숙한 예술품들에게 잘못 전화를 건 어떤 인간, '하지만 그는 엄연히 살아 있다, 그래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실수) 시인은 미술관에 갔다가 우연히 잘못 걸린 전화벨소리를 듣고 이 시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시는 그런 것이다. '평범하다'고 쉽게 얘기하는 일상의 매 순간이 모두 시다.
우연히 깨어난 새벽 네 시는 '삼십대를 위한 시간'이자 '다른 모든 시간의 바닥'이 된다.(새벽 네 시)
가족 사진첩을 보며 그들이 무심한 세월 속 극적인 사건 없이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며 보통의 인간들을 조명한다.(사진첩)
'이제는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수많은 나날 중 하나.'(1973년 5월 16일)
평범하다고 말하기조차 평범한 어떤 하루를 호명하며 시인은 시를 쓴다. 온 우주의 모든 날들을, 60억명의 모든 인간들을 시로 적지 못한 윤리적인 책임감에 시달리며.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60억의 사람들.
내 상상력은 늘 그랬듯이 언제나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거대한 숫자는 감당하지 못하고,
사소하고, 개별적인 것에 감동을 느낀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얼굴들만 닥치는 대로 비추곤 한다.
그럴 때 뒷줄에 있는 나머지 얼굴들은 모조리 생략되고 만다.
기억 속에서도, 회한 속에서도 그들은 영원 속으로 도태되고 만다.
-<거대한 숫자>중에서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을'(작은 별 아래서) 통감하는 시인은 역사가 쉽게 저지르는 잘못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는데, 전쟁이나 강제 수용소의 수많은 죽음을 숫자 하나로 뭉뚱그려버리는 태도를 말한다.
역사는 유골들을 어떻게든 제로(0)의 상태로 결산하려 애쓰고 있다.
천 명에다 한 명이 더 죽어도, 여전히 천 명이라고 말한다.
그 한 명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어딘가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야스오의
강제 기아 수용소>중에서
시는 이래야 하는 것이다. 천 명에서 누락된 한 명의 죽음을 목도하고 그를 기록하는 것. 내가 잠든 동안 죽어간 목숨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지구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전쟁, 내가 멍하니 흘려보내는 매 분 매 초의 시간들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려 애쓰는 노력. 이 세상에 평범한 것은 어디에도 없고, 왜 사는지 모르겠는 나라는 존재 자체부터 평범하지 않은 기적과 같은 결과물이니까.
우리는 정확한 단어를 찾아(단어를 찾아서) '잘 모르겠어'의 답을 해결하려 애써야 한다.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고요'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나는 이미 정적을 깨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결코 무에 귀속될 수 없는
실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가장 이상한 세 단어>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