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시대 열린책들 세계문학 48
보리슬라프 페키치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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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잔혹동화나 어른을 위한 동화 타이틀로 어린이 동화를 재해석한 책들이 유행한 적 있었다. 빨간모자의 엄마는 왜 숲속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빨간색을 권유했을까? 콩쥐팥쥐의 진짜 결말은 무엇일까? 같은 류의 이야기들.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소설 [기적의 시대]를 자극적인 타이틀로 소개해 본다면, '잔혹성경'같은 표현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


서점에서 우연히 서가에 꽂힌 이 소설을 꺼낼 때만 해도 내가 이걸 읽게 될 줄은 몰랐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가의 낯선 소설, 유고슬라비아 작가라, 그런데 유고슬라비아는 이제 없어진 나라가 아닌가? 책을 펼쳤는데 숨겨진 쪽지가 있었다. 이 서점만의 보물찾기 이벤트에 당첨된 것이다. 우연도 운명이라 생각하고 상품인 마들렌과 함께 [기적의 시대]를 챙겼다. 이런 우연도 작은 기적이라면 기적이겠지.


나는 종교가 없고, 양가 부모님도 종교가 없으시고, 종교적인 삶과 무관하다. 성경은 문화적인 기본 상식선에서 아는 정도로, 예수는 12월 25일에 태어났고 십자가에 매달렸다 3일 만에 부활한 사람,아니 인신, 신인인가? 아무튼 최소한의 지식만을 가진 상태로 성경 패러디 소설을 읽었다.


사람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인간을 구언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와 열두 제자를 거느리고 각종 기적을 일으키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뒤 십자가에 매달려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은 뒤 부활한 과정과 그 과정을 서술한 신약성경. 성경은 예수가 문둥이의 병을 고치고, 벙어리의 입을 열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하는 기적을 이야기한다. 저 분의 권능을 보라! 이분이 우리의 왕이시다! 기적에 매료된 추종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 떠난 뒤, 기적의 무대 위에 남은 눈 뜬 자들, 깨끗한 피부의 여인, 말을 할 수 있게 된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치유된 사람들은 건강한 몸으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성경에는 그 뒷이야기가 안 나오지만 아무튼 그렇겠죠 뭐.....


- 254쪽, 하지만 그 기적이라는 것이 우리 영혼에는 어떤 변화도 일으켜 놓지 못했어요. 그 까닭은 영혼이라는 것은 불멸하는 것, 하느님의 영혼과 밀접하게 맺어져 있는 것, 따라서 다시 빚어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죄악은 우리 육체로부터 지워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스스로 기억하는 죄악, 스스로 간구하는 죄악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육체는 영혼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따라서 영혼은 자격을 상실한 육체 앞에서 역시 무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성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기적은 과연 기적의 대상을 위한 것이었을까? 예수 자신의 구원자로서의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써 이용한 것이 아닐까? 자신의 권능을 증명하기 위해 죽은 자를 살리고, 예수의 기적을 부정하기 위해 지배 집단이 되살아난 자를 다시 죽이고, 다시 살리고, 죽이고, 시체를 숨겨 도망가고, 12사도들은 기적을 위해 시체를 찾아 추격하고, 소름끼치도록 우습다. 나는 이미, 운명에 갇혀, 예언에 갇혀 성서 말씀에 들어 있다.(417쪽) 예수 그 자신조차 신약성경의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 조종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유다는 왜 예수를 배신했고 예수는 그런 그의 배신을 미리 알고 있었는가? 배신 그 자체가 이미 짜여진 연극은 아니었을까?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매달린 자가 진짜 예수일까? 사실 엉뚱한 자가 호송 도중 뒤바뀌어 대신 죽은 것은 아닐까...같은 만약에, 흥미로운 만약들.


- 433쪽 행위는 행위의 주체를 선행한다, 행위에서 벗어난 행위의 주체는 불꽃을 벗어난 온기와 같은 것이다, 창조 행위는 창조주보다 더 중요하다, 가르침은 선생보다 중요하다, 구원은 구세주보다 더 중요하다...


무교인의 눈으로 본 성서 패러디 소설은 오히려 성경을 흥미롭고 입체적인 텍스트로 다시 보게 만들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존재조차 몰랐던 소설을 푹 빠져 읽었다. 번역도 번역이고, 술술 읽히는 문체와, 운명에 갇힌 인간을 말하는 주제 방식(운명 뒤에 사람 있어요!), 흥미를 자극하는 패러디 형식. 사실 소설이란 현실의 패러디가 아닌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의 기적은 독습의 산물입니다. 그의 기적은 새롭고도 독창적이었습니다. 가치 자체는 차치하고라도 그의 기적은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 기적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려 했다기보다는 그 기적을 통하여 달라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위대한 기적을 이용하되 현재를 왜곡시키는 데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의 길을 밝히는 데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결국 그를 확고하게 믿었습니다.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 P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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