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생각해보기로 한다. 이게 중요한 문제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머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니지. 음.. 유목주의는 침략주의인가? 이정우씨를 포함한 모든 논자들이, 유목주의가 자본의 유목주의를 가리키는 한 대답은 예스인 것 같다. 1.유목주의1(자본의 유목주의) = 침략주의 그런데 문제는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유목주의2)이다. 그들이 자본을 대변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홍윤기씨는 적어도 유목주의2가 유목주의1과 문제의식 수준에서 같은 곳에 놓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국가와 유목민의 대립이 중요하다. 물론 이정우씨는 아니라 한다. 이정우씨는 유목주의1과 유목주의2의 대립이 들뢰즈/가타리 문제의식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이다. 2.국가 <=> 유목주의1, 유목주의2 (홍윤기) 유목주의1 <=> 유목주의2 (이정우) 이렇게 보면 홍윤기씨의 주장엔 유목주의1과 유목주의2의 구분이 빠져있고 이정우씨의 글에는 국가 대 유목민의 문제의식이 없다. 하지만 아니다. 두 가지 국가의 외부를 말하는 이정우 도식은 이미 국가와의 구분을 전제하고 있다. 3.국가 <=> 유목주의1 <=> 유목주의2 (이정우) 그렇다면 문제는 국가와 유목주의 일반의 구분만큼이나 유목주의1과 2의 구분이 중요하냐는 것. 내가 알기론 매우 중요하다. 유사유목주의에 맞서는 건 국가에 대한 저항만큼이나 들뢰즈/가타리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었다. 자본의 시대에 사는 철학자가 어찌 아니그럴 수 있겠는가? 자본에 반대하고 유목주의에 호의적인 사람이라면 이 둘의 구분에 당연히 사활을 걸 것이다. 당연히 이정우씨도 이걸 강조하였고. 홍윤기씨는 이정우씨에게 들뢰즈/가타리의 문제의식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이 글들로만 보면 정작 문제의식이 부족한 것은 홍윤기씨이다. 홍윤기씨는 어떻게 자본과 전투할 것인가를 고민함으로써 그 문제의식에 있어서 맑스/엥겔스의 후계자인 들뢰지/가타리는 보지 않았다. 그들은 절대적 도주선을 개척하려 무척이나 노력하지 않았던가. 이제 남은 것은 유목주의2가 정치적으로 유효한가라는 문제. 이제까지의 논쟁은 결국 유목주의2의 정치적 효과를 통해 판단될 것이다. 홍윤기씨등은 그걸 믿지 못하는 거고 노마디즘 쪽은 그걸 발휘하려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두 가지를 구분한 건 맞는데 한국에서 그게 구분될까가 문제이고 구분되는 활동들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가가 문제이다. 들뢰즈는 참 좋아하는(잘 아는 것과는 별개로-_-) 철학자긴 한데 이부분 좀 회의적이다. 그들이 관념적이어서도 아니고 실천적으로 포괄적인 전략가도 못되었기 때문도 아니라 한국에서 진정 유목주의2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수유연구소나 조정환씨, 네그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활동이 정치적으로 좋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 (음.. 마지막 문장은 그냥 넘어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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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9-05-19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어.
그 곳에선 잘 지내니.
널 생각하면서 눈물이 나오지 않게 된지, 1년이 좀 넘은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가끔씩은, 너의 흔적을 찾아보곤 한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