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정신과 전문의 최헌진 선생님의 지도로 사이코 드라마를 해봤다. 배우처럼 끼있고 광대처럼 자유로와 보이고, 감정이 풍부하고 재미있게 생기신 분이었다. 몇가지 소품(?)을 해 보고 나서 쉬는 시간을 갖고...

2부에서 참가자들에게 가고 싶은 곳을 말하라고 하신 다음, 모두 발표하고 나자, 한사람이 자원해달라고 요청하셨다. 1분 정도 적막이 흐르고... 내가 자원냈다. 비교적 분명히 가고싶은 곳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내 목까지 차 있는 당면과제를 해결해 보고 싶어서...

-장소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어느 광장, 잡시여인들의 플라멩코 춤을 보러 혼자 왔다.

-관객들을 광장으로 불러내 보라고 하셨다. 바이얼린 연주자 두 명,  아코디언 연주자 두 명, 나처럼 춤을 보러온 여행객 네 명, 무희 네 명, 그리고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 역할도 사람들이 맡았다. 오래된 사원, 나무 세 그루, 은행 건물, 비둘기 세마리, 카페, 카페 주인, 꽃가게, 꽃...이런 것들을 선생님의 인도에 따라 내가 각자 맡겼다.

-그리고 나서, 연주자들을 지휘해서 음악을 만들고, 무희들을 지도해서 춤을 만들고, 연주하고 춤추는 걸 구경하다가 '춤에 미쳐서' 무희들과 같이 춤추라고 말하셨다. 같이 춤추다가, 잠깐 모두 멈추고.

-내 자리에 나를 대신해 줄 사람을 불러내고, 내가 사원이 되어 보라고 하셨다.

-오래된 사원(아주아주 오랜 세월을 그 광장을 내려다보며 서있었기 때문에 인간들의 희노애락을 꿰뚫고 있는)더러 광장에 서 있는 나에게 말을 걸라고 하셨다.  오래된 사원(나)는 광장의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반갑고도 따뜻하게) 여기까지 오는 데 그렇게도 오래 걸렸니? 잘 왔어. 잘 쉬다가 가.")-더 크게, 더 크게 반복해서 몇 번...

-이번에는 나무를 해보라 하셨다. 아주아주 오래 살아서 지혜롭고 모든 걸 알고 있는 나무 역할 

상:무슨 말을 하겠어요? 지금 광장에 서 있는 저 여자 보이죠? 파란 윗옷을 입고 한국에서 온... 저 여자 지금 마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크게 이야기해 보세요.

나무: 아주아주 즐거워 하는구나. 그런데, 아이들 걱정을 하고 있네?

상:그렇지! 나온다. 말해줘 봐요. 하고싶은 말.

나무: 아이들 걱정 하지마. 아이들은 잘 지낼 거야.

상:어떤 점을 걱정 하는 걸까요?

나무: 아이들이 하루종일 컴퓨터만 하고 TV만 볼까봐요...

상:그렇지, 그렇지!

(모두 웃음)

상:그런데, 남편은?

나무:남편? 잘 지내니까 걱정하지마, 어머니한테 가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이번엔 비둘기 역할, 꿰뚫어보는 시각이 있어서 여자 곁을 스쳐 날아가기만 하면 마음을 다 아는 비둘기.

상: 저 여자가 어떻게 보이죠?

비둘기: 힘들어 보여요.

상:뭐가 힘들어 보이죠?

비둘기:다른 사람들에게 맞추느라 자기가 없이 살아온 시간들이 보여요. 완벽하게 역할을 하고 싶어서 힘들었던 거예요.

상: 이렇게 소리질러 보세요. "니 완벽성 때문에 힘들어"라고.

나:니 완벽성 때문에 힘들어!

상:더 크게

나:니 완벽성 때문에 힘 들 어!

상:아직도 작다. 더 크게 (시범)

나:니 완벽성 때문에 힘 들 어!!!

상:언제부터 그랬을까요?

비둘기: 세살부터. 동생이 태어난 다음부터. 엄마 마음에 들려고 무지 노력했네요...

상:오호! 이 비둘기는 심리공부를 한 비둘기네~ 저 여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 큰소리로 해주세요.

비둘기: (큰소리로)니가 세살부터 우울했던 거 알아.

상:세살이라... 재밌네. 그럼, 세살 때로 돌아가 볼까요?

나: 네

상: 말안듣고, 기저귀 안간다고 떼 쓰고, 울고불고 하는 세살 연기를 해 봅시다.(바닥을 가리키며) 자, 여기서 뒹굴어요. 안한다고 떼 쓰면서.

나: (서서 발 구르며) 싫어싫어, 나 안해.

상: 그렇게 서서 우는 세살이 어딨어요. 뒹굴어요.

나: (바닥에 뒹굴며) 싫어 싫어 나 안해! 안할거야!

상: 그렇게 얌전하게 뒹구는 아이가 어딨어요. 다리도 좀 더 벌려서 힘껏 뒹굴어요

나:조금 더 뒹굴다가, (상담자를 향해) 싫어 싫어.

상: 좋아요, 자, 일어나시고...

-이제 부다페스트를 떠날 시간입니다. 의자에 올라서서 연주자들과 춤추는 사람들과 사원과 나무들과 비둘기들, 건물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세요.

나: 모두모두 고마워! 또 만나!

상:더 크게

나: (목청껏-하지만 여전히 뭔가 막힌 소리) 모두모두 고마워! 또 만나!

(여러번 소리 지르도록 시키셨는데, 목청껏 소리질러도 작다면서, 선생님보다 더 크게 하라고 하며 몇번이나 시범을 보이셨지만, 선생님 음량의 반 정도밖에 안 나왔다-그런데, 기억도 잘 안나는 그 내용들보다도, 그렇게 울며불며 목청껏 소리질렀다는 것 자체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준 것 같다. 무지 시원하다. 그리고, 막춤도...선생님이 시범을 보이며, 팔다리를 따로따로 마구 흔들며 춤추라고 시키셨는데, 아무리 막 하려 해도 규칙적으로 하게 된다.-어쨌거나, 웃기고 재밌었다.)

상:어디로 가시죠?

나:아이들에게요. 영원한 내 혹들. 제 역할에 또 충실해야겠죠. 하지만, 지금과는 다르게, 좀더 활기있게요.

-자리를 정리해서 앉고...

상:그렇게 홀가분하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나:아이들 걱정, 남편 걱정... 아이들이 컴퓨터에 빠질까봐 걱정되는데요, 문제가 있는 건가요?

상: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아픔이지요. 아픈거예요. 일류대학 가면 행복해질 줄 알고 아이들한테 좋은 성적 거두라고 기대하는데...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거든요... 집을 열흘만 비워보면 아이들이 훨씬 건강해져 있을 겁니다.

나:정말요?

상:네. 자유를 실컷 누리고 나면 스스로 하려는 마음이 생겨요. 엄마한테 고마움도 더 많이 느끼고... 가끔씩 미치는 게 필요해요. 우리는 '내일'을 늘 염두에 두기 때문에 못 미치는데요, 아이들이 '엄마! 미쳤어?"하는 건 아이들이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샤워할 때 가끔들 벌거벗고 거울 앞에서 '이 년아! 너 참 예뻐.'라고 말해 보세요.

(웃음)

상: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나:굉장히 후련해요. 마음 속에 걱정이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남편이 변하는 나를 어디까지 받아줄 건인지- 속이 텅 빈 느낌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서, 식사시간에 선생님 옆자리에 앉게 돼서, 술을 마셔도, 나혼자 있어도  나 자신을 놓아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 하고 나서, 축구보다가 남편이 욕하면서 소리 지르는 걸 봐도 '뭐 그렇게까지 열을 올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축구보면서 소리지르는 게 얼마나 정신건강에 좋은데요. 욕하고 소리지르고 하면서 직장에서 상사한테 받은 스트레스, 일때문에 받는 스트레스 다 날려버리는 거예요." 라고 하셨다. "원래부터 그렇게 흥이 많으셨는지 궁금해요." 했더니, 아니라고, 이 쪽 공부를 하면서 점점 더 그렇게 되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청계천을 갖고 있다고... 새가 살고 물고기가 사는...그런데, '인간'이라는 영역에 자신을 한계짓기 때문에 생기가 없어지는 거라고 하셨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본 건데, 나를 가로막는 건 남편보다 나자신이 더 큰 것 같다. 남편의 감정 표현도 내가  가로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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