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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최후의 19일 1
김탁환 지음 / 푸른숲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홍길동 - 초등학생 또는 유치원생들도 모두 아는 인물이고, 조금 더 안다면 홍길동을 만든사람은 허균이란것. 홍길동은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신분의 차별없이 모두 공평하게 사는 세상. 이것이 바로 소설속에 율도국을 탄생시켰다. 그럼 작가 혀균이 꿈꾼 율도국은 무엇이었을까?
<허균, 최후의 19>은 <불멸>을 읽은 후 작가에게 관심이 생겨서 읽게되었다. 작가의 조선중기 3부작은(<불멸>, <허균,최후의 19일>, <압록강>) 마치 제목만 다를뿐 하나의 소설처럼 느껴진다. <불멸>에서 이미 허균을 등장시켜 다음 작품을 예고했는데, <허균, 최후의 19일>에서는 다음작품 <압록강>의 주인공 강홍립과 임경업을 투입시켜 다음작품의 호기심 낳게한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 <불멸>에서 이미 허균은 나왔다. 그가 꿈꾸는 진정한 세상, 그리고 그의 고뇌 등. 심지어(소설이지만) 이순신을 찾아가 반역의 재목인지 알아보기도 한다.
반역 - 반역이라는 말은 성공한자의 역사에서 기술된 말이다. 아마 허균이 거사에 성공했으면 혁명이었을것이다.(태조 이성계를 보고 반역이라고 하지않는다. 역성혁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허균의 거사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혀주고 싶다. 허균은 왜 혁명을 꿈꾸었을까? 천민도 아니고 중인도 아닌 양반이 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을까? 아마 임진왜란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것...
작가는 허균전체의 일생을 보지도 않았고, 그의 혁명 전체를 보지도 않았다. 그가 죽기전 19일만 관찰하였다. 이런점이 아마 소설의 긴장감과 흥미로움을 증폭시켜 작가의 보는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작가의 아름다운 문체와 3인칭에서 1인칭으로 넘나드는 서술방식은 독자를 압도에 허균의 세상으로 빨려들어가게 하는 힘이 있다. 이런점이 아마 작가 김탁환의 매력일것이다.
그렇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일것이다. 소설에는 이미 픽션이 많이 가미되었다. 그렇다고 다 허구는 아니지만. 하지만 픽션이던 논픽션이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똑같다. 허균이 꿈꾸는 진정한 세상(약간은 허황하더라도), 그리고 지식인의 사유의 모습. 아마 작가가 허균의 혁명이 성공한것으로 가정해서 소설을 이끌어 나간다면 작가의 말대로 만화나 무협지가 되었을것이다. 단지 역사에 대한 객기에 지나지 않는 역사소설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줄까? 물론 극도의 재미를 주겠지만...'역사는 진보라는 거름을 흡수하여 발전하는 생물적 존재이다.' 라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 허균은 우리가 발전할수 있는 거름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공한 혁명보다 실패한 혁명이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