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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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참 미니미니하다.

지은이 이민경은 강남 여성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한 남자가 개인적 원한이 아니라 ˝여자들이 자길 무시한 것 같아서˝ 알지도 못하는 한 여성을 살해했다. 내 기억에도 이 사건은 충격이었다. 종종 강남에 나가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나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마 많은 여성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추모객들의 포스트잇으로 뒤덮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 차별 문제가 조명받고 함께 개선하자는 공론이 모아졌다면 참 좋았겠다. 하지만 여혐을 일반화하지 말라, (남자로서)잠재적 살인마로 몰리는건 억울하다는 일부 포스트잇은 안 그래도 슬프고 억한 심정으로 나온 여성들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 후 강남역 10번 출구는 며칠동안 남혐 여혐 대결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대결 구도는 뉴스를 탔고 친구나 연인, 가족간에 이 사건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아마 그 과정에서 기득권인 남성에게 여성 차별문제를 설명하는 여자들은 답답이 고구마를 많이 먹었을 것이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는 이 고구마에 곁들여 먹을 사이다를 선사한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어떻게 볼 것인지 자세한 설명은 없다. 다만 여성들이 대화에 나설 수 있게 도와주는 실전 매뉴얼이다. ˝여성차별에 대한 생각과 경험은 내가 말하고 싶으면 말하자. 말하기 싫은데 굳이 응할 필요없다. 내가 원하는 상대에게 말하자, 안 그래도 상처가 있는데 설득되지 않을 부류에게까지 진땀빼며 노력하다 더 상처받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주된 기조다.

이제 이런 대화를 할 기회가 거의 없지만 옛 남친과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어떤 여성 직업에 대한 문제로 얘길 나누다 입장 차이가 커서 목소리가 서로 높아졌더랬다. 그땐 혈기왕성해서 마구 쏘아붙였다. 그때에 비하면 ˝여성혐오˝라는 이미 상처가 되는 말이 흔하게 쓰이는 요즘의 젊은이들은 예전의 나에 비해 더 심하게 쏘아붙이고 또 상처받을 것 같다. 상처를 덜 받자, 말하려면 잘 해보자고 쓴 이런 실전서가 젊은 여성들에게 은근 힘이 될 것 같다.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실전편˝은 이 책이 정말 실전서임을 증명한다. 소개된 실전 대답을 보면 오히려 싸움을 더 키우진 않을까도 싶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별 문제 아닌데˝ ˝요샌 남자도 살기 힘들어˝ ˝여자도 군대가야지˝ ˝다른 문제도 많은데 왜 하필 페미니즘이야?˝ 과 같은 말에 조금이라도 여성들이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할 수 있도록 말로 지지 말라는 마음으로 추린 대답들이리라.

책이 끝부분에 소개한 ˝여성신문˝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트위터에서 #한남과밥이야기 해시태그를 단 글들이 있었다. 아빠나 오빠, 남동생이 엄마에게 아침밥을 요구하거나 엄마가 아프거나 안 계시면 누나에게 밥차리라 한다는 경험담들이 쏟아졌다. 읽으며 참 안됐다 생각하다 나를 돌아봤다. (얘기에 앞서 나는 엄마, 아버지를 무척 사랑한다) 나는 남편보다도 아침밥 같이 먹는걸 중요하게 여기고, 국이 없으면 밥 넘기기 힘든데 이 습관은 온전히 친정아버지를 닮은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이 모습을 닮을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수십년 아침상에 국을 차려준 맞벌이 엄마의 공이 컸던 것이다. 트위터에 ˝원하면 자기가 차려먹지˝란 의견을 보고 충격아닌 충격을 먹었다. 아버지가 차려드실 수도 있었던 것이구나. 이렇듯 결과만 보면 과정에 들어간 여성의 공은 오랜시간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다. 오랜 세월 여성이 해오던 일이라는 이유로 자기도 모르게 여성들이 하기를 자처하는 일들도 많다. 왜 내가 해야 하는가, 내가 해주고 싶은가. 늘 생각해 볼 일이다.

이처럼 여성 스스로도 ˝여성˝이라는 틀에 많이 갇혀 있다. 이 책의 리뷰 중 겨털을 기른 여자 사진을 봤다. 확실히 낯설었다. ˝여성˝이라는 틀에 어긋난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중요한 건 ˝여성은 겨털을 밀어야 한다˝는 남들의 생각이 아니라 그 겨털의 주인인 여자의 생각이다. 그 여자가 겨털을 기르고 싶은가 아닌가. 그는 18개월간 겨털을 길렀다고 한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여성˝에 대한 틀 하나를 그렇게 깨버렸다.

책이 아닌 여성신문과 겨털 사진에서 얻은 깨달음은 결국 책을 관통하는 기조 ˝내가 하고 싶은가˝를 생각하라는 것과 닿아 있었다. 신기했다. 작고 가벼운 책에서 얻은 무게있는 깨달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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