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빨간 표지의 유혹적인 색깔에 끌리어 집어들자마자 읽어대기 시작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숨이 가빠지고, 책에 빠진 나머지 생리적인 현상을(小) 망각하여 터질 것 같은 똥배...
무엇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섬뜩한 반전에서 잠깐의 가상기절까지 감행한, (오바하여) 목숨을 건
책읽기였다.

대화로 이루어진 대화체 형식의 소설. 대화에 논쟁이 귀속되어 있지만, 그래도 이들은 대화의
자연스러움보다는 논쟁의 치열함에 가깝다 할 수 있겠다.

접근하여 차근차근 역겹고 잔인한 본능을 드러내는 적의 궤변술을(증명하기 힘든 불합리한 주장에다가
던져대는 아리송한 말, 상대가 결론을 미리 예측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상대를 화나게 만들어 판단을
방해하게 만든다거나 등등...) 구경하며 아멜리 노통의 논쟁 상대로 적합한 사람이 존재하는지 의구심마저 들었다. 
쇼펜하우어라면 그녀의 상대가 될 듯도 한데 말이다.

자, 다시 각설하고. 쉽게 흘려버리는 감정이나 지나쳐버린 사건과 상황... 이런 우리에게 있어서 희미한
부분을 뚜렷한 형체로 기억하고 알고 있다는 또 다른 존재의 내가 내 속에 살아 있다는 명제가 신선하다.
이것이 건방지게 팔딱거리며 모습을 들어내는 바람에 일어나는 혼란과 속박된 느낌. 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에서 주인공은 타살과 자살을 함께 한다.

'적의 화장법'을 중심으로 전-후의 작품에 대해 비판할 수밖에 없는 사실에 통감하다가 뒤집어,
그녀의 일반적인 작품 가운데 뛰어나서 돌출 된 작품이 '적의 화장법'이라 하면 그나마 위로가 되려나?
작품을 잉태한다는 그녀가 타조알을(적의 화장법) 낳다가 계란을(시간의 옷) 낳다가 메추리알
(로베르 인명사전)까지 낳아대니 필경 그녀의 종족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서점을 나올 때 내 옆구리에 끼여있는 놈은 안타깝게도 '적의 화장법' 뿐.
나 역시 요놈을 단 한 번 읽고나서 '반했다고'하면 일순간 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잊혀진 정신의 가치, 그리고 진정 자유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제시해주는 길라잡이가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타오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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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ㅣ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박재동 외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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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국가인권위에서 기획하고 열명의 만화가가 우리 사회의 차별을 만화로 그렸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통해 특히 장애인, 장애 여성과 핍박받는 저소득층 여성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희재의 만화에서 장애 학생에게 운동을 시키는 체육선생은 정말 있을 법한 캐릭터였다.
그의 만화를 통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일반인들 위주의 사회에서 작은 일상속 배려가 없는
공간들 속에서 순간순간 얼마나 많은 좌절과 고통을 경험할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또 장애로 인해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고 그 아이를 되찾기 위해 돈을 벌려 하지만 돈을 벌면
생활보조금이 끊기는 모순속에 자살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심정은,

홍윤표의 한석봉에게 재능이 뛰어난 누이가 있었다는 가정의 만화도 신선했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이었던 마지막 작품은 꿈을 안고 한국에 온 몽골 출신 노동자의 이야기였다.

행방불명된 삼촌도 찾을 겸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에 온 주인공의 귀에 들리는 영문으로 표시된
한국 공장장의 욕설. 표현이 참 신선하면서도 슬펐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겪은 수많은 일들...

정말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싶어 너무 놀랐고 너무 충격적이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넘 부끄러웠다. 그리고 우리가 왜 이래야하는지, 우리 안의 야만에 대해 너무 놀랐다.

그리고 내 안에도 그런 야만이 숨쉬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봤다.

얼마전 아이 옷을 파는 곳에서 분홍 점퍼만 싸게 팔길래 '남자애들 껀 없나요?'하고 물은 적이 있다.

판매원이 '남자꺼 여자꺼가 어디 있어요, 남녀공용이에요.'하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웃으면서 '맞네요, 파란색은 없나요?'하고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의 편견과 너무도 당연한듯 느껴졌던 나의 첫 질문을 생각했다.
분명 그날의 사건도 내겐 충격이었다.

십시일반에서 보여주는 차별과는 또 다르지만 굳이 차이를 뚜렷이 부각시키는 것에서 차별이
싹틀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 내 안에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많은 차이가 차별과 연결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시각장애인들만 안마시술업에 종사할 수 있다는 법이 위헌판결을 받아 시끄럽다.
차이가 차별을 부르지 않고 모두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사회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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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 ㅣ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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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마디로 최고!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빨리 읽는 것이 두려웠던 작품.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레즈비언을 주인공으로 한 일명 '레즈비언 역사 소설'이다. 
'레즈비언 역사 소설'? 명칭부터 범상치 않은 이 작품을 좀 더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저자인 '사라 워터스' 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1991년 레즈비언과 게이 역사 소설에 관한 연구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녀는 성' 성의표출과 역사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19세기 런던의 삶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이 연구물들을 소설로 쓰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이다.

  레즈비언과 성에 대한 무척 큰 관심을 가졌던 저자였던 만큼 이 작품에는 레즈비언의 사랑과 외설물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특히 레즈비언들의 사랑은 무척 농밀하게 동시에 섬세하게
표현되어있었다. 처음 만남과 사랑으로 이어질 때까지의 여성 특유의 섬세한 묘사, 그리고 사랑 이후에
농밀하게 짙어지는 안타까운 사랑의 감정.
정말 읽는 이의 마음을 쥐었다 놨다 히는 저자의 필력은 탁월하기 그지없다. 

 또 레즈비언들의 사랑과 사랑 없는 음란물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 위에 유산을 가로채려는 음모와 출생의 비밀과 같은 다분히 추리소설적인 요소까지
더해 읽는 재미를 배사시킨다.  로맨스 소설과 추리소설의 행복한 만남이라고나 할 정도로 서로 다른
두 가지 요소를 아주 맛깔나게 엮어놓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사회비적인 요소까지 끌어들인다.

  이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남자의 존재가 유난히도 불선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모드'와 '수전'의 아버지는 등장도 언급도 되지 않는다. 그녀들이 고아가 되든 말든.
그리고 그녀들을 결정적으로 비극의 장으로 이끈 '젠틀맨', '릴리'씨는 모두 남자들이다.
그 외에 간간히 등장하는 '존'도 한 성깔 하는 놈도 남자이다. 그에 비해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조금은 선하게 묘사되어 있다. 딸을 지키려는 어머니들, 얼뜨기지만 착한 '데인티'가 대표적이다.
물론 다는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모든 불선의 원인에는 다 남자가 있다.
'모드'의 어머니를 결정적으로 파멸시킨 사람은 오빠, 남자인 '릴리'씨이다. 동시에 '수전'을 궁지에 몬
사람은 사기꾼, 남자 '젠틀맨'이다.

  정말 이 작품을 읽으면서 19세기 런던에서 남자가 아닌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 정도로 이 작품은 그 당시의 억압받는 여자들의 삶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은 그런 남성들의 억압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성들의 연대를 제시한다.
즉 '모드'와 '수전'의 사랑(레즈비언들의 사랑)을 통해 억압적인 체제를 돌파한다(한 것 같다.)
거의 운명적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된 '모드'와 '수전'과 달리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젠틀맨'을 사랑하지
못한 '모드' 즉 남녀관계의 불능은 아마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특하면서도 동시에 아련한 사랑을 감정을 농밀하게 표현한 저자의 글쓰기에 찬사를
보내며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하는 나의 마음을 적으며 끝을 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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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황진이
김탁환 지음, 백범영 그림 / 푸른역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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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황진이

책을 읽는 며칠, 나는 내내 황진이를 가슴에 안고 살았다.
그래봐야 한 시대를 살았던 발랄하고, 발칙한 기생아니겠는가 하는
내 무지한 생각을 진이는 금새 밀어 버렸다. 책을 읽으며 진이는 시인으로, 여인으로,
때로는 시대를 앞서가는 지식인으로 내게 안기곤 했다.
그 철통같은 신분적인 한계 속에서 살았던 그녀지만,자연을 사랑하고, 시와 음악을 벗하고,
용기있는 사랑을 한 그녀의 삶은 신분적 한계를 훨훨 뛰어 넘은 '승화'라고 불러도 좋을 듯 하다.
책은 먼저 역사서로 다가왔다.
역사 속 인물 한명 한명을 짚어야 했고, 사화니 사림이니, 역주도 읽어야 했다.
수두룩히 나오는 익숙지 않은 한자어도 차근히 챙겨 읽어야 했다.
중간쯤부터는 서서히 소설로 읽혀졌다. 그의 삶이 기대되고 설램으로 다가왔다.
나와 진이는 같이 호홉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부터인가는 시를 읽는 느김이었다.
진이의 글 한 줄에 내 생각 둘셋을 보태게 했으니까 말이다.
역사책으로 소설로 시로 이 책을 쓴 작가의 능력에 놀란다.
학(學)과 재(才)를 겸비했다고 하더니, 하나 틀린 말이 아니다.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아름다운 그림은 책장을 넘기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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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피오
마르탱 파주 지음, 한정주 옮김 / 문이당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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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자신의 시선으로 그녀를 빗질하고 있었고, 그래서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들이 어떻게 빗질하느냐에 따라 그녀의 모습이나 색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p.206)

-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만이, 대문자로 쓰여질 만한 모험 가득하고 예외적인 삶을 바라는 법이니까.(p.39)

- 그땐 불행이 자연스러웠고, 웃음과 뒤섞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새로 생긴 이 대단한 행복은 그 불행만큼의 가치도 없었다.(p.258)

마르탱 파주는 참으로 기괴한 글 솜씨를 지닌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극과 극의 언어를 융합해 만들어 내는 글귀들은 소름끼치는 탄성을 자아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작가가 언어에서 조차 평범을 거부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기존의 틀을 깨는 다른 형식의 글을 읽어보길 원한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다.
글의 줄거리 보다도, 한 줄 한 줄 표현된 글을 읽어나가는 것 자체가 묘하게 재미있다.

빨간머리 피오는 피오라는 한 젊은 여자를 단순히 그림그리는 여자에서 화가로,
다시 뛰어난 화가로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예술계가와 당사자가 보여주는 혼돈을 그리는 작품이다.

스폿라이트가 사라지면 나는 과연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에 대한 예술가의 고뇌 또한 읽혀졌다.

'내 삶을 내 의지로 해결해 나갈 수 없다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감상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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