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27년 열애사를 고함
1부에서는 저자가 담배를 피우게 된 계기와 흡연 사실을 안 가족들의 반응과 여러 사건을 서술하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제주도에서 모범생으로 순진하게 살았던 저자는 대학에 들어와 천영초라는 여자 선배의 권유로 담배를 피워 물게 된다. 서울 시내의 주요 대학에 휴업령이 내려지고 무장군인이 진주한 70년대의 시대적 상황은 당시의 대학생들로 하여금 술과 담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했고, 술에 약했던 저자는 자연히 담배 예찬론자가 되어갔다. 더구나 담배 피우는 여자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억압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반대로 담배를 피우는 것 자체가 주는 해방감이나 저항 의식이 더욱 컸을 것이다.
"담배는 우리가 순종적인 여성이 아님을 드러내는 표식이었고, 남자들에게 '엿 먹어라' 내지르는 감자 주먹이었고,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해원의 깃발이었다. 자연 담배를 피우지 않는 옛 친구들과는 만나도 왠지 서먹서먹하고, 거꾸로 일면식도 없는 흡연 여성에게는 오로지 담배 때문에 친밀감을 느낄 정도가 되었다." (본문 20쪽)
아주 철저하게 숨어 피우는 재주를 지닌 다른 여성들과 달리 저자는 흡역 욕구가 워낙 강해서였는지 원래 칠칠치못한 성미였던지 아니면 '될 대로 되라' 식의 막가파였는지 아버지, 어머니, 장래의 시어머니에게까지 흡연 사실이 들통난다. 이 때문에 그때까지 저자에게 끔찍이도 사랑을 퍼부었던 아버지의 사랑이 거두어지긴 하지만, '담배 불가'를 외치던 어머니는 결국 담배 뒷바라지를 자청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대학에 들어가 담배를 처음 피우게 된 사연이나 이후 담배 때문에 겪는 일화들은 담배 피우는 여성이면 으레 경험하는 일이라 공감을 자아낸다. 물론 저자와 나의 나이 차가 크기 때문에 정치적 상황은 매우 다르지만 여성의 흡연에 적대적인 사회적 분위기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광화문이나 신촌 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여성을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나만 해도 그들을 쳐다보게 된다. 그만큼 드문 일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카페나 술집, 건물 화장실에는 어김없이 담배 피우는 여자들로 가득 차 있다. 안과 밖의 차이, 이것이 정말 문제적인 현상 아닐까?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고 글도 흥미롭게 써 술술 읽어갔지만 천영초 언니의 암울한 사고를 앞 부분에 비중 있게 서술한 것이나 그 캐나다에서의 또 다른 일화가 1부 맨 뒤에 등장한 것은 좀 생뚱맞은 느낌이었다.
2부 아름다운 여자들의 연애담
2부에서는 유명 여성들의 흡연 사실을 흥미롭게 소개한다. 여기에서 서술하는 인물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명성황후, 재미 언론가 문명자, <문화일보> 기자 유숙렬, 프리다 칼로, 건축가 김진애 등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 사회적 지위 때문에 흡연 사실을 감추어야 한다는 점은 담배가 지닌 사회적 상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나이가 많은 자, 지위가 높은 자, 남성인 자에게 우선적으로 허용되는 그것. 노무현 대통령이 금연을 선언하고도 담배를 끊지 못해 보좌관들에게 얻어 피우나 보니 자연히 허물 없이 맞담배를 피우게 되었는데, 그 광경을 본 다른 정치인들이 보좌관들에게 대통령 앞에서 담배 피운다고 뭐라 했다나.
그런 지경이니 일국의 대표를 앞에 두고 혼자 담배를 피운 문명자나 남북 방송 교류를 축하하는 공식석상에서 담배를 피워 문 유숙렬의 행동은 대단히 용기 있거나 겁 없는 사건으로 기록될 법하다. 특히 평소에 담배를 많이 피우지 않음에도 의도적으로 담배를 피운 유숙렬은 남성들의 자연스런 일상 문화가 여성의 경우에는 얼마나 특별한 행위로 해석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일종의 퍼포먼스라 할 만하다. 문제는 그 당사자들이 퍼포먼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는 데 있겠지만.
이어지는 '조선 여인 흡연사'라는 장에서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문인 이옥의 책을 인용하여 당시 흡연 문화를 소개한다. 여기에서 소개한 흡연해선 안 되는 경우는 이렇다.
어른 앞, 아들이나 손자가 아버지나 할아버지 앞, 제자가 스승 앞, 천한 자가 귀한 자 앞, 어린 자가 어른 앞, 제사 때, 대중이 모인 곳에서 혼자 피우는 것, 다급한 때, 곽란이 들어 신 것을 삼킬 때, 몹시 덥고 가물 때, 큰바람이 불 때, 말 위 이불 위, 화약이나 화창 가, 매화 앞, 기침병을 앓는 병자 앞.
이 때만 해도 여자의 흡연을 반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금지하는 분위기도 없었던 듯하다고 저자는 전한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여자의 흡연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생겼는데 그런 중에도 기생, 나이 든 여자, 사연 있는 여자(남편이 일찍 죽었거나 아들을 잃어 혼자됐거나 시부모 똥오줌을 받아내는 효부이거나 회충으로 속 앓이를 하거나 남펴이 바람을 피워 마음이 괴로운 여자)는 예외로 쳤다 한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시기는 보통 17세기 광해군 때로 본다고 한다. 여성의 흡연이 금기시되는 과정을 문화사적으로 추적해보는 작업도 흥미롭겠다는 생각을 했다.
3부 어둠 속에 피어오른 담배연기
3부에서는 저자의 20대 시절, 유신 반대 시위에 가담 협력했다는 이유로 교생 실습차 내려갔던 고향 제주도에서 형사에게 강제로 서울로 끌려와 조사를 받고 구치소에 갇히기까지 했던 엄혹한 경험 속에서 빠짐 없이 함께했던 담배의 추억을 서술한다. 저자는 이 시기를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라 이름 붙였는데 비단 저자뿐 아니라 이 시기를 통과한 세대라면 공통적으로 겪었을 암울한 이야기이다. 가방 속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발견한 형사의 말, "이 년들이 다 이렇다구. 갈보들처럼 담배나 뻑뻑 피워대면서, 뭐 나라 걱정한다구? 네 년들이나 똑바로 해." 담배 피우는 년이나 '갈보'나 볼 장 다 본 년이라는 점에서는 능히 혐오받아 마땅한 인간으로 치부된다. 이 때 담배는 타락의 상징이기도 하다.
3부의 뒷부분에는 우리나라 담배 정책의 변천사, 흡연을 조장하는 사회문화적 기제(군대, 영화, 드리마) 등에 관해 서술하는데 앞부분과의 연관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런 구성의 문제는 이 책 곳곳에서 등장하는 것 같다.
4부 흡연 여성 잔혹사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 내지는 억압을 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저자가 여성 흡연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의 많은 여성들이 그동안 계기가 없어 말하지 못한 가슴 절절한 사연, 또는 분통 터지는 사건을 말해준 것이다.
입덧을 가라앉히기 위해 시작했다가 습관이 들어버려 그 때문에 이혼까지 당한 어머니의 사연을 보내준 사람도 있었다. 다른 여자는 다 돼도 내 여자 만큼은 안 된다는 애인, 남편 때문에 사람 없는 공간을 찾아야만 하는 여자, 시집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다 시어머니가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황급히 불을 끈다는 것이 불을 내고 만 여자, 옥상에서 담배 피우고 내려오다 컴컴한 계단에서 굴러버린 여고생 등 담배에 얽힌 기막힌 사연은 나이가 적건 많건,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주변에서 심심찮게 전해들을 수 있을 정도이다.
5부 누구, 나 좀 말려줘요
저자가 정계 은퇴 발언 이후 다시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을 인터뷰할 당시 흡연 욕구 때문에 인터뷰를 중단했던 이야기를 시작으로 정치인들의 흡연 일화를 소개하고 사람들의 다양한 흡연 습관을 소개하는 등 잡다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6부 신(新) 중독 일기
담배를 끊으리라는 굳은 결심을 한 이후 피눈물나는 절연의 시기에 돌입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담배의 각종 해악과 담배를 피우지 않음으로써 누리게 된 찬란한 경험을 소개한다. 왠지 교훈적인 마무리가 된 것 같아 뒷맛이 조금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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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의 저자가 쓴 책이기에 부담 없이 술술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다. 담배를 피웠던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흡연을 직접적으로 다룬 책을 썼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주고 싶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고, 이 책을 계기로 여성의 실제 경험과 갈등하는 문제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한데 책 자체의 완결성을 놓고 보자면 장과 부 구성의 체계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이 책을 함께 읽은 친구도 이 문제에 공감하였다.) 한 편 한 편 따로 써놓은 것을 엮음에 있어 고민에 부족했던 듯 싶다.
이 책을 보면서 우리나라 여성의 흡연을 문화사적으로 조명하는 책도 쓰여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뿐 아니라 여성이 경험하는 소소한 일상의 문제들도 문학, 교양서, 학술서, 나아가 영화, 연극, 미술 등의 여러 모습으로 조명되고 이야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