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결혼과 섹스는 충돌할까 - 현대 성생활의 기원과 위험한 진실
크리스토퍼 라이언 & 카실다 제타 지음, 김해식 옮김 / 행복포럼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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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웬만하면 지하철에 들고 다니면서 시간 죽이기를 좋아하는데 이 책은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어디 들고 나가기가 참 민망했다. 아니, 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라고 표지에 박아놓기는 했지만, ‘섹스’라는 단어 앞에 ‘헐~’ 하게 되는 시추에이션이 아닌가. 집에서도 ‘넌 뭐 그런 책을 읽냐’며 마치 포르노잡지라도 보고 있는 것 마냥 취급되는 이 경건한 가정에서, 이 책이 어떤 책인지를 설명해보기 위해 괜한 진땀을 뺐다.



어떤 책이냐.



먼저 진화론을 앞세운다.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 책은 진행이 불가능하다. 나는 당연히 창조론쪽이기에, 이 책은 나한테 지식적으로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 서평에서 ‘진화론’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진화론은 베이스고 이 책은 그 베이스를 밟고 2루까지 뛰고 있기 때문에.



진화론에 입각하여, 인간은 유인원에서 갈라진 호모사피엔스 종이다. 여기서 하나 집자면, 인간은 저자가 말한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 진화론적 측면에서 따져준다고 해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다. 단어 하나지만 한끗 차이가 아니다. 둘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후자는 전자를 압도하는 능력을 지녔다. 저자가 언급한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도 포함한다.



보노보와 호모 사피엔스의 DNA 형질이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보노보는 사회성애적 행동과 유아 발달 형태가 인간의 그것과 비슷하다. 근데 이것들은 난교를 한다. 그래서 난교에 대한 긍정적 측면을 역설하고자 이 책을 집필했다. 그리고 선사시대부터 수렵채집을 했던 모계 사회로서 부성 약화의 긍정측면을 강조하며 원시부족 난교파티의 성性적 효과를 좋게만 바라본다.



일부일처제가 도덕적이라는 관념을 일체 무시한다. 역사 속에서 일부일처제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잔혹한 실태를 더듬으면서 지금의 문명국의 모든 문화적 교육을 전면 거부한다. 오히려 원시부족의 성적쾌락을 위해 하는 집단성교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고대가 남긴 인간본성의 측면이라고 확신한다. 왜 이걸 포기하고 문명의 틀 안에 자신을 가두며 성적 스트레스를 받느냐는 것이다.



문화는 불분명한 목적을 위해 우리를 길들인다. 우리 행동과 성향의 특정한 면을 육성하고 촉진하면서, 방해되는 것은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p. 100)



쾌락을 위해 여러 파트너들과 섹스하는 것은 동물적이라기보다 ‘인간적’인 것이다. (p. 103)



저자의 뉘앙스는 이것이다. “개인의 쾌락추구를 위해서 일부일처제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고, 난교를 활성화하면서 즐기는 인생을 살아라. 원시부족의 쾌락을 우리는 왜 못 누리면서 이렇게 한 부인에게 정조를 지킨다는 장막을 쳐놓고 지루하게 살아야 하나!”



지금이 씨족사회인가. 엄연한 국가를 지닌 체제아래서 법제도의 확립으로 질서를 지키면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살아야 할 책임을 지우는 사회가 아닌가. 인류의 질 자체가 다른데도 저자는 마치 인간의 행복추구의 핵심에는 섹스가 전부인 것처럼, 쾌락적 성생활이 영위가 안 되면 정신병자가 될 것처럼, 사회문화가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처럼 떠들고 있다. 저자는 역설은, 지금의 인류가 일부일처제라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였으니 어떻게든 난교를 합리화하여 고대사회로라도 달려가서 성기 동하는 여성 몇 명 붙들고 놀아나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욕구충천의 지적승화로 들리기도 한다.



문명은 이미 발달했고, 그 문명을 이룩한 인류는 분명 선사시대 고대민족의 삶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에 존재하는 원시부족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발전된 삶을 살고 있다. 저자가 언급했듯 먹을거리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가 있는 원시부족은 남아도는 무료한 시간을 자손번성을 빙자한 성적 쾌락추구에 이바지했다. 본성에 충실한 미개한 방법으로 말이다. 난교를 하든, 계간을 하든 제재할 이유도 없고 지들 좋으면 그만 아닌가. 침팬지도 마찬가지고.



어떤 동물도 그 본성과 조화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의 위협을 받아서는 안 된다. (p. 117)



어떤 동물이 그 본성과 조화되는 행동을 하는 것에 시시비비를 가릴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 그 동물본성에 끼어들어서 조화되려고 하고, 일부다처제라는 법적 틀을 동물본성이라는 도구를 앞세워 비방거리로 삼는 저자의 인식나부랭이가 웃길 따름이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개인과 사회, 모두를 고려할 때 난교는 반드시 장려되어야 할 하나의 성적 지표다. 또한 여러 지면을 할애하여, 남성보다 여성의 성적 욕구가 더 강하다는 점과 여자는 난교를 하기 위한 징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자세히 다룬다.



실험을 비롯하여 역사적 관점에서 인정할 부분도 더러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성적 본능이 유인원과 같고, 원시인과 같아서 혼외 관계를 하면 더 행복해진다. 괜히 결혼이라는 족쇄 때문에 얽매이지 말고, 누구하고나 성관계를 맺는 시스템으로 나아가 우리 모두 난교의 열매를 맺어보자.” 이건가?



많이 배웠다는 사람의 주장치고는 너무 어이가 없다. 인류가 국가를 이룩하고, 문명의 제도아래에서 법과 질서를 지키면서 그 문화와 교육이라는 큰 흐름을 창조해낸 것은 난교파티에 눈이 먼 족속으로서 해낸 것이 아니다. 농업사회로의 이행이 대부분의 개인에게 사실상의 재앙이었다(p. 100)고 말하는 저자의 입장은 아주 편협하다. 인류가 두뇌를 이용한 지속적인 발전 없이 낮잠이나 자면서 이집 저집 성관계나 맺으러 돌아다녔다면 지금의 저자는 그 정도의 사고력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22개의 챕터를 통해 많은 말을 했고, 나도 책에다가 이런 저런 반박들을 수도 없이 적었지만, 각설하고 이런 얘길 해본다면. 사회는 이미 성적으로 갈 데까지 간 상태다. 난교를 안 하나, 스와핑이 없나, 계간을 안 하나, 청소년 임신이 없나. 말 그대로 할 놈들은 다 하고 산다. 그런데 굳이 여기서 난교의 당위를 제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미개한 생각이다.



절제는 미덕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도 자유지만, 할 수 있어도 안하고 사는 것 또한 자유의 근본이다. 그리고 안하고 싶은 사람을 안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 역시 사회의 역할이다.



일례로 학생들에게 흡연을 금지시키면, 필 놈은 몰래 지 혼자 숨어서 핀다. 담배에 부정적인 인식을 교육시켜 놓으면 담배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그것이 사회적 인식이다. 그렇다면 담배의 해로움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흡연을 허용하는 학교는 어떻게 될까. 안하는 놈이 병신취급당하고, 따 되는 것이다.



저자가 언급한 원시인의 사회에서도, 난교가 열리면 무조건적으로 여자는 순응하고 따라야 한다.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성적인 질서가 난교로 잡혀있다. 안 하고 싶은 여자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만약 우리 사회가 혼전 관계를 인정하는 데도 혼전순결을 지키는 여자가 있다면 그는 보호받지 못할 대상, 혹은 세상 흐름에 부합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녕 저자가 인식하는 건강하고 올바른 사회인가. 만약 어느 한 쪽이 사회의 비주류로써 부정적인 취급을 받아야 한다면, 문명국은 당연히 사회적 질서를 깨뜨리는 저자의 팔로워들을 택할 것이다. 일부 일처제와 같은 사회적 관념이나 법 질서 또한 발기부전 유부남들이 질투심에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사회에 살면서도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문화가 설정한 제도의 근본을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서 원숭이 같은 짓거리를 하고 살자고 인류의 제도를 폄하하는 이와 같은 발언들은 대체로 인정할 수 없다. 많은 쾌락을 추구하고 성욕해소에 전력을 다하라고 이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 아니다. 또한 지금의 인류가 살아가는 목적도 후대에게 더 좋은 사회를 공헌하고자 하는 보다 큰 목적을 품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침팬지의 난교를 들먹이며, 개인의 성적 욕망을 사회적 가치 위에 두는 것은 ‘그렇게 사는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의문이 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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