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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면 뜰수록 나는 내가 되어 갔다 - 실을 엮듯 써 내려간 마음의 조각들
미쿠니 마리코 지음, 홍미화 옮김 / 윌스타일 / 2025년 3월
평점 :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처음에 책 제목을 보았을 때 방황하고 힘들 떄 뜨개질을 만났고, 뜨개를 하면서 자아를 찾아가고 위안을 얻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그런 부분도 있지만 그건 정말로 빙산의 일각이고, 이 책은 뜨개와 위안을 얽기보다 뜨개라는 단어가 주는 감성과 느낌을 그대로 글로 옮겨 놓은 것만 한 권이었다.
프랑스와 연결되는 삼촌, 퇴직하고 나서 손주에게 푹 빠진 외할아버지, 가족의 반찬을 책임지는 외할머니, 자음 발음이 늦었던 아들, 푹신하고 따뜻한 어둠을 선사해 준 소중한 친구 사토 군... 다양한 인물과 인형과 배경이 등장하고, 헤비코 씨, 우사긴, 우사로 등 다양한 인형과 액세서리도 등장하지만 한결같은 부분이 있다. 어딘지 살짝 쓸쓸한 듯한데, 그러면서도 따뜻하고, 가끔 위트가 툭 튀어 나오는, 무엇보다도 다정스러운 문체와 작가 마리코 씨의 시선.
스물아홉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뜨개의 한 코 한 코처럼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보드랍지만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부분은 '스물셋'이다. 4년 반 동안 이어진 도쿄 생활에 익숙해졌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숨이 막혀 와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도록 손발을 사용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 화려한 도심, 북적이는 사람들에게서 떠나 잘 먹고 잘 자고 잘 걸으며 평범해지고, 그리하여 이제 '충분해' 생각하며 다시 화려한 도심, 북적이는 사람들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 에피소드는 나의 20대를 떠오르게 했다.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나의 마음으로 인해 이어지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건 '딸기'다. 동류의 냄새를 맡아 외할머니의 딸기를 허락해 준 사짱. 하지만 사짱과는 자연스레 소원해졌고, 만 열두 살이 된 나는 더 이상 능숙하게 아이들 사이에 스며들 수 없게 되었다. 사람과의 거리를 알 수 없고 피부가 얇아진 듯 어떤 것이 닿아도 아픈 시기. 나이가 들면 좀 더 둔감해져서 사는 게 쉬워질까. 그렇게 쉬워지면 산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나 고민하는 시기. 우리 모두의 10대처럼 마리코 씨도 가냘프고 섬세하고 깨질 듯 투명한 유리 같은 시기를 건너 온 것 같아서, 그게 정겹고, 지금에 와서 둔감해졌느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모르는 것투성이인 세상을 살아 내며 강해졌고 그것을 둔감해진 것이라 말한다면 그것도 맞는 말이라고 말하는 마리코 씨가 불안한 10대와 흔들리는 20대를 불안하고 흔들린 채로 건너와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아서 애틋하다. 잡을 수 없는 공기 같은 어느 시절, 어느 순간의 한 장면, 불어닥친 두려움, 나를 위축시키던 분위기를 폭신하고도 따스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정말이지 일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시모토 바나나 작가님이 '섬세하고 대답한 문장에서 그녀의 니트 작품 같은 향기와 색채가 느껴진다. 참으로 수려한 문장이다!'라고 평한 것이 무척 와닿는 듯도 하다.
나보다 나이도 많을 테고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타국의 낯선 작가님이지만, 나와 닮은 듯한 모습, 생각, 행동들을 보아서인가 왠지 자꾸 작가님을 마리코 씨라고 부르고 싶다. 여름이 되면 캠핑을 가고 싶어진다고 말하는 마리코 씨. 하지만 남편은 캠핑을 싫어하고 아들은 친구들과 다니기를 선호한다. 혼자라도 가 볼까 하는 독백에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내가 같이 가고 싶은데요. ㅎㅎ
+)헤비코 씨, 우사긴, 우사로... 나의 친구도 소지품도 아니지만, 그래도 어떤 모습일까 상상만으로 그려 봤는데 진짜 사진이 실려 있어서 궁금증도 덜고, 마리코 씨처럼 왠지 정겨운 마음을 느끼게 됐다.
+)나이가 들어 일을 하게 되면서 친해지는 사람도 희한하게 전학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는 사실. 전학의 냄새를 진작에 사라졌을 터인데 왜 그럴까. 어쩌면 그 시절에 겪었던 외로움과 고독의 냄새가 그 사람 자체가 되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도 너무너무 좋지만 책도 너무너무 예쁘다. 아니, 책 디자인이 왜 이렇게 예쁘담. 중간에 사진이 몰려 있는 부분이 있는데 아마 다른 곳에는 색깔 하나만 넣고 이 부분만 칼라로 뽑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몰려 있는 사진들조차 너무너무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