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소리 죽여 흐느끼듯 애국가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린 영재라는 걸 깨달았을 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미 합창이 시작돼 있었습니다.
자력에 이끌린 것처럼 나도 따라 불렀습니다.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리들이, 땀과 피와 고름이었던 우리들이 조용히 노래하는 동안, 어째서였는지 그들은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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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초와 일초 사이도 고통이였을 때

죽음은 새 수의같이 서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때 생각했습니다. 지나간 여름이 삶이었다면, 피고름과 땀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삶이었다면, 아무리 신음해도 흐르지 않던 일초들이,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그 모든 걸 한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리라고.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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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되는 사람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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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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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인 우리 어머니는 지금 어떤 기억을 붙들고 있는걸까.
다 놔버린 것 중 무엇이 남아있을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런 것보다는
생각보다 일상적인 것들이 아닐까


캄캄한 이 덤불숲에서 내가 붙들어야 할 기억이 바로 그거였어.
내가 아직 몸을 가지고 있었던 그 밤의 모든 것, 늦은 밤 창문으로불어들어오던 습기 찬 바람, 그게 벗은 발등에 부드럽게 닿던 감촉.
잠든 누나로부터 희미하게 날아오는 로션과 파스 냄새, 삐르르 삐르르, 숨죽여 울던 마당의 풀벌레들, 우리 방 앞으로 끝없이 솟아오르는 커다란 접시꽃들, 네 부엌머리 방 맞은편 블록담을 타고 오르는 흐드러진 들장미들의 기척. 누나가 두번 쓰다듬어준 내 얼굴, 누나가 사랑한 내 눈 감은 얼굴.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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