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눈이 몹시 많이 오고 난 이후의 어느 날이었고, 우리는 눈 덮인 센트럴파크를 걸어보기 위해 만났다. 진흙투성이의 잔디밭엔 흰빛이 가득했고, 눈이 쌓인 채 넓게 얼어붙은 빙판은 겨울 햇살에 황금색으로 빛났다. 5번가의 높다란빌딩들에 둘러싸인 아이스링크에는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청록색 침엽수들이 울타리를 이루는 눈길위엔 커다란 눈사람이 서 있었다. 언니가 그 말을 한 건우리가 쉽 미도우를 지나 베데스다분수 즈음 이르렀을 때였다. - P68
그녀의 이목구비나 실루엣, 목소리의 높낮이와 이름 같은건 세월 속에 지워졌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에 일렁이던 특별한 빛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는데, 그건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에서만 볼 수 있는 빛이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가 당신을 황홀한 듯 바라볼 때 당신의 눈동자에 비치는그 빛, 터무니없는 열망과 불안, 기대가 뒤섞인. 지금까지 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는 건, 그녀 옆에서 개리를 바라보던 언니의 얼굴에서도 그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 P65
우리는 사진을 찍었고, 해변을 조금 거닐었다. 나는 조금감상적인 마음이 되었는데, 더 이상 낮이 아니지만 아직 밤도 아닌 미확정의 시간대가 육지와 바다의 경계선을 그었다 지우는 파도의 철썩이는 소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머지않아 어둠이 몰려오면 보랏빛이 되었다가 검게물들 테지만, 아직은 사방이 핑크빛으로 가득했고 그 사이사이 부드러운 오렌지빛이 깃들어 있었다. 그 놀라운 장관,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놓는 시간과 시간의 경계를 언니와개리의 친구 그리고 나는 모래밭 위에 앉아 넋을 놓은 채바라보았고, 개리는 밀려오는 파도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 P64
나는 가보지 못한 곳이라 2차원의 그림을 그리며읽지만 뉴욕을 가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금방 떠올리고 그곳의 냄새등이 기억날 것 같다.
언니와 단둘이 베이글이나 도넛을 사서 유니언스퀘어 근처 공원에 앉아 있거나, 브루클린브리지 밑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을 구경하러 가는 날들이 한동안 이어졌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도로에 줄지어 있는 옐로캡이나 건물 앞에 펄럭이는 성조기, 타임스퀘어 전광판 따위를 보거나.. - P47
부모를 딛고 일어선 아이들 ㅠ
엄마 아빠가 해석할 줄 모르는 한시를 내가 읽고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잘 지내고 있냐?‘라고 쓰는 아빠나포스트잇에 ‘시게 약 살 것‘이라고 적는 엄마는 내게 설명해줄 수 없는 to부정사와 동명사의 차이를 내가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예민하게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밖에 소나기가 떨어지거나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하면 나는 세탁소의 유리문 너머를 영화 스크린 보듯 바라보며 조용히 it‘sstarting to rain이라거나 it starts snowing이라고 발음해보곤했다. 묘한 슬픔이 뒤섞인 우월감을 느끼며, 많은 이들이 그렇게 자기의 부모를 딛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 P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