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힘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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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유명한 성석제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인간의 힘>과의 만남을 가져 보았다. 첫인상은 '과연 설레인다'였지만 막상 그와의 대면을 끝내고 남겨진 나의 기분의 여운은 실망의 화장터다.

성석제의 소설은 작가 특유의 걸쭉한 입담으로 인한 유머가 아주 독창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찬사가 따라붙는 것일 게다. 나 역시 그런 독창적이고, 독특한 작가의 유머 앞에서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인간의 힘>은 순간순간에 지나치는 잠깐의 걸쭉한 유머로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전체적 소설의 유머로는 개인적으로 실격이다.

<인간의 힘>은 역사소설의 형식을 띈다. 아니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자체가 어울리겠다. 무엇이 되었든 여기서 부수적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이야기의 주 모태는 소설이 되어야 함은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물론 <인간의 힘>도 부수적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주 모태는 '채동구'라는 역사적 인물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해 그려내는 소설의 형식을 따르고 있긴 하다. 그리고 그 형식속에 묻어나오는 재미도 뛰어나긴 하다.

하지만 이 <인간의 힘>은 70%의 소설과 30%의 역사적 사실이 균형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 체계가 구성져 어디가 소설이고 어디가 역사인지 모르게 깨끗이 용접 되어 있는 것이 아닌, 지그재그 불안정하게 땜질 되어 붙어 있다는 것이다. 즉, 소설과 역사의 담을 허물고 하나로 어우러지는 맛이 아니라, 각자의 색깔을 가지며, 고유의 영역을 목청껏 외치며 떡하니 독립해 있다는 말이다.

작가 특유의 입담으로 이야기가 한창 진행나갈 무렵이면 작가는 꼭 '이 무렵, 정세는....'이라는 말로 단순 역사적 사실들을 요약하며 이야기의 흐름에 잠시 맥을 늦춘다. 재미가 있더라도 흥분적 긴장상태에 있는 독자들에게는 이런 늦춤의 미학이 잠시나마의 휴식을 줄 수 있어 바람직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늦춤 속에서, 작가는 그 시대에 관한 일반 역사 서적에 맞먹는 분량으로 -다소 과장하여 - 설명하고 있다. 아무리 이야이가 흥미롭고 그 진행에 매료되더라도 중간에 턱하니 10페이지 이상씩을 할애하는 단순적 역사서술은 보는 이를 짜증이 나게 한다. 그리고 한 번 나기 시작한 짜증은 제 아무리 특출한 이야기꾼이라 하더라도 가라앉게 하기는 힘든 법이다.

물론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그랬다 볼 수는 있겠다. -아무것도 모르고 듣는 이야기보다는 어느정도의 배경을 갖추면 확실히 그 재미가 배가되는 것이니 - 하지만 역사'소설'인 만큼 최대한 간략히 그리고 그 윤곽만 대충잡아주고 넘어가며 소설의 흐름자체는 끊지 말아야 할 것을, 모든 사건 하나한, 정황 하나하나에 10페이지 이상씩을 할애한다는 것은 독자를 위한 역사'소설'이 아닌 지면을 채우기 위햔 '역사'소설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역사소설이 갖는 재미는 이야기가 끝나가는 종반까지 그 어디에도 내가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거나, 역사적 지식에 시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서도 그 주변의 정황속에 몰입하여 빠져들 수 있는 점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소설 중반중반에, '자 잠시 소설은 잊고, 역사적 정황으로 돌아본다면..'식으로 그 흐름을 완전히 두손 두발 놔버린다면 읽는 사람의 집중만 떨어뜨려 놓을 뿐이라 생각한다.

나 처럼 성석제란 작가의 타이틀 하나만을 믿고 덤벼들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성석제란 작가에게는 문단의 칭찬이 유달리 많이 나오고 관대한 정황속에서 잠시의 개인적 느낌이 전달 되었음 한다. 성석제란 타이틀 하나만으로, 주변의 평가하나만으로 달려들 그런 책은 글쎄, 아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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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비글은 어디에 있을까?
로이 H. 윌리엄스 지음, 이은선 옮김 / 더난출판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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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에 안주하여 지금에 만족하며 사는 것
- 나 자신을 돌아보고 본연의 자신을 발견하는 것
이 두 명제 사이에 이는 끊임없는 갈등의 파장.

쉼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의 체계 속에서 톱니바퀴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가 과연 그 어지럽게 돌아가는 틀을 깨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이 잠시 쉼으로 주변의 매커니즘은 한없는 정체와 혼란을 겪을 것이고 그 혼란의 야기는 바로 나의 위치를 박탈당하는 결과로 치닫는 스피드시대에서 그 위치를 잠시 떠나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는 것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내 비글은 어디에 있을까>에서 주인공은 흔히 지식층, 엘리트층이라 불리는 변호사란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항상 손수건을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반딱이는 구두를 신고 언제나 시간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아주 정신없이 바쁘지만 고급스럽고 만족스러워 보이는 삶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지적이고 대단해 보이는 삶에서는 자신을 되돌아 볼 여유도 없어 보일뿐더러 굳이 그렇게 해야할 필요성조차도 실상은 찾기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외면적으로는 완벽스러움을 가지고 있어 보이는 삶도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것을 <내 비글은 어디에 있을까>가 보여줌으로써 현실과 자신의 갈등 체계 속에 구심점을 제공해 주었다.

작품 속의 변호사의 모습은 무엇인가가 결여된 반쪽뿐인 자신이었다.-주인공과 비글에게 주어진 이름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 진다- 반쪽뿐인 불완전한 자신이었기에 변호사는 역경이 닥치자 말자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말았는데, 결국은 완벽해 보이는 삶일지라도 그 내면은 알맹이는 없는 위태로운 껍질일 뿐인 것을, 그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에 드러낼 외경심은 실상은 별게 아니란걸 그 모습에서 다시 한번 드러내 보여 주었다. 결국은 무엇인가? <내 비글은 어디에 있을까> 속의 여행은 실상 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내면을 향한 여정이란 게다.

인생이란 자신을 알아가고 또 자신을 조금씩 발견해 나가는 한정된 여행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을 새로이 발견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 인생의 궁극적 목표중의 하나란 것을, <내 비글은 어디에 있을까>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깨달음을 던져 준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인해 우리는 내면으로 향한 여정을 떠날 수 있는 마음의 채비를 갖춘 것이다. 그동안의 인생이란 한정된 여행 속에서 우리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어떤 사고를 지니고 있었는가?

진정한 자기 모습은 내버려둔 채, 근시안적인 만족만을, 근시안적인 적응만을 위해 한정된 여행의 시간을 소비하는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변호사가 손수건을 사각형으로 접고, 구두를 닦고 정확히 시간을 지켰는지 안절부절 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역경 속에서 엉덩이가 까발려지고 구두가 더러워진 것을 보고 허탈해 하고 마는 변호사의 모습에서 그것이 인생 속에서 얼마나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의미를 지니는지 알았다. 근시안적인 모습을 모두 져버리고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 노력은 힘들지라도 보상은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소중한 것이다.

일시적인 만족을 쫓을게 아닌 자신의 궁극적 의미가 숨쉬는, 그 도달점을 알아가는 것. 그 도달점이 바로 데스티나이였으며, 그 곳의 존재 의의가 우리는 왜 자신의 비글을 찾아 떠나야하는지에 대한 답안을 아스라이 들려준다. 자신의 비글을 찾아 떠나는 내면의 여행, 결국 본연의 나 자신을 찾는 것과 동의어인 그 인생의 통과의례적 시련.

이 책이 던져준 그것을 생각해 보는 것은 오직 읽는 이의 몫일 게다. 이 시대를 살아가며, 나름의 인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개개인의 가슴속에 <내 비글은 어디에 있을까>가 지금을 반성하는 교훈이 될 것인지, 한낱 쓸모 없는 파지 묶음으로 전락해 버릴 것인지에 관한 물음. 결국 내면의 여행을 위한 첫걸음을 땔 것인가,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에 대한 또 다른 선택이 독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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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베토벤 - 시성과 악성의 운명적 만남과 사랑
로맹 롤랑 지음, 박영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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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성과 악성인 괴테와 베토벤에 관한 글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른바 천재라는 존재들의 만남이란 시대와 국적을 떠나 보는 이를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괴테와 베토벤>은 다소 실망스럽다. 괴테와 베토벤의 만남이 잠깐, 아주 잠깐 동안만 이루어졌고, 그래서 그 연결의 끈이 두껍지 않다는 점도 있겠지만 이 책은 주로 괴테에 관해 다루고 있다. <괴테와 베토벤>이라는 책의 제목과는 별개로 괴테의 삶과 생각, 생활을 나타낸 것이 대부분이다. 앞부분은 괴테보다는 베토벤에 관해 다루고 있는듯 하나, 실상은 괴테와 베토벤의 사이에 중개역할과 동시에 연인의 역할을 해준 베티나에 관한 서술이 오히려 주를 이룬다.

그리고 작가의 지나친 천재숭배경향이 묻어나오는 문체도 그닥 달갑지는 않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괴테와 베토벤에 관해 고르게 서술한것이 아닌 치우친 책의 편성도 제목과의 비교에서는 엉성하기 그지 없다.

베토벤과 괴테에 관해 어느정도는 알고 있는 분들이 읽기에 괜찮을 듯 하다. <모차르트, 천 번의 입맞춤>같은 경우는 모차르트에 관해 모르더라도 모차르트라는 한 인간을 볼수 있었고 부족한 지식은 저자의 주를 통해 보강할수 있었다. <괴테와 베토벤> 역시 인간 괴테를 여실히 볼수 있었으나, 인간 베토벤에 대해서는 다소 소홀한 면이 있었고 또한 <모차르트, 천 번의 입맞춤>과 같은 이해하기 쉽고 쓰인 주가 부족한것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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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
신용구 지음 / 뜨인돌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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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박정희? 나라를 살린 위인이냐, 나라를 말아먹은 천인이냐? 박정희에 대한 글들은 무수히 많다. 조갑제씨와 같은 글들 - 그래서 박정희를 극도로 추켜세워 위인으로 만드는, 반면에 최상천씨와 같은 글들 - 그래서 박정희를 극도로 깎아 내리고 도저히 한국인이라 보기 힘들다는. 이렇게 아웅다웅 깎고 올리고 다시 세우고 하는 과정 속에는 좌파냐, 우파냐라는 정치적 색깔. 다시말해 이념적인 공격적, 방어적 색채가 강하게 묻어 나온다.
그리고 이런 두 갈래의 치열한 다툼이 이제껏 우리가 가장 흔히 접하는 책들이였기도 하다.

이런 극과 극의 책을 접하는 독자들은 자신의 이념적 색깔에 맞는 책에는 점수를 주고 그렇지 않은 책은 내팽겨쳐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피곤하다. 옥신각신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문체로 - 그 진위의 여부를 완전 떠나서 말이다. - 진행되는 글들을 읽고 있으면 독자는 자연스레 흥분하게 되고 머리는 피곤하게 된다. 이념적 색깔이 묻어나오지 않는 뭔가 편안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그런 박정희에 대한 책은 없을까라는 피곤함의 한탄, 슬며시 묻어 나올법도 하다.

2. 그래서
이 책이 그 피곤한 한탄에 대한 해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우파, 좌파란 이념적 색채에서 벗어난 정신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정신과 전문의로서의 위치로 박정희를 보려고 한다. 재밌지 않을까? 박정희란 한 개인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따른 분석이 아닌 철저히 개인심리를 바탕으로 분석을 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끌리게 된 것이고 이제껏 사실 위주, 또는 작위적 해석위주의 책이 아닌 개인을 분해하는 흥미로운 서술에 끌리게 된 것이다.

3. 그리고
저자는 단순한 정신분석학자, 정신과 전문의가 아니다. 물론 직업적으로는 정신과 전문의라고는 하지만, 저자는 그런 직업과는 별개로 항상 역사란 분야에 관심을 두며, 그리고 연구에도 몰두해온 인물이다. 즉, 이 책은 절대 가볍지 않은, 개인의 단순한 흥밋거리는 아니란 소리겠다. 두서없이 한 개인을 이리 뜯고 저리 뜯은 것이 아닌,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해 놓았다는 말인 게다.

4. 하지만
정신, 심리학에 보통의 사람들은 거의 문외한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구강기 욕구, 오이디푸스적 거세불안 등등 어디선가 들어 대충은 알만한 -물론 뜻은 모르고 듣기만 해 본것도 있겠지만 - 용어가 나와 어렵지 않다는 장점이 있긴하다. 하지만 어떤 인간의 행위, 사소한 행위조차도 '이 행위는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해 볼 때 구강기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불안한 심리상태가 무의식적으로 축적되어....' 등등 따위로 분석을 풀어놓으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지나쳐 보이고 괜히 짜증이 날 법도 하다. 무슨 행위든지 심리학에서 무조건 해석 가능하고 또 그것이 맞다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는 심리학에 문외한인 사람들의 동의를 과연 100%로 얻을 수 있을 지는 의문이란 말이겠다. - 이 책 역시 박정희의 사소한 문제까지도 정신분석을 행하기 때문에 가끔 나의 짜증을 돋게 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참신했다. 박정희의 어린시절에서부터 성장기, 쿠데타, 10·26까지 모든 부분들을 정치적, 사회적 색채를 일체 배제하고 오로지 심리학으로만 분석했다는 것은 읽는 이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비록 가끔은 짜증이 날지라도- 주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정치적, 사회적 색채가 묻어나는 공격적인 문체의 박정희 글보다는 가끔, 어떻게 보면 부드럽기까지한, 그러면서도 결코 객관이라는 길을 벗어나지 않는 책이 그리워지지 않을까?

6. 덧붙여
정신분석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박정희의 정신을 심리학으로 풀어놓은 것이지만, 결코 어렵지는 않다. 가끔 다소 생소한 용어가 나오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쓰임은 쉽게, 쉽게 되어 있어 누구나 읽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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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근대 - 100년 전 영국이 평가한 한국과 일본의 근대성
박지향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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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근대>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의 초반까지. 한도 많고 탈도 많아 시끌벅적하던 그 시대의 한국과 일본을 서양 강대국, 즉 영국에서의 관점이 어떠했는가를 깨끗하고 부드럽게, 또한 흥미롭게 나타내 주었다. 동양인이라는 틀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시대를 판단했던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관점의 제시는 우리가 생각해 보지 못했던 면을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살펴 볼 수 있어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정작 저자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 즉, 우리의 역사관점 - 피해자라는 역사의식을 떨쳐버림과 동시에 민족주의의 틀을 깨자는 그 의도는 도대체 무엇으로 나타내려고 했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다. 앞서 말했듯 그 시대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면, 또는 일본과 조선이라는 시각의 틀에서 벗어난 서양의 눈으로 보았던 동양정세에 대해서는 독자들에게 또 다른 면을 제시해 주었을런지는 모르지만, 오로지 그것만으로 우리의 역사의식을 다시 대체시키고 민족주의라는 틀을 깨자고 하는 저자의 의도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고 본다. 저자가 머릿말에서 밝혔던 거창한 주제와 의도는 책을 읽으면서 잊어먹기 일쑤란 말이겠다.

저자는 우리의 근대를 제대로 알고서, 남의 탓으로 돌리곤 하는 우리의 의식을 우리자신부터 각성하여 탈식민지화, 탈근대화를 논하고자 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다소 불명확한 영국의 관점 하나만으로는 우리의 근대를 제대로 알수 없을뿐더러,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근대의 일그러짐을 되살펴 각성하기에도 무리다.

그 당시의 열강인 영국은 동양인 일본과 조선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또 어떤 생각으로 이용하였을까하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궁금점과 흥미성만큼은 이 책이 충분히 제공하여 준다. 더구나 군데군데 들어가 있는 삽화는 배껴내고 싶을 만큼 정곡을 찌르고 풍자성이 넘친다. 다만, 그것이 우리에게 근대가 일그러졌었다는 것만을 시사해 줄뿐, 우리의 근대가 어떻게 일그러졌었고 우리는 그 일그러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지는 전혀 제시점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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