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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개
이외수 지음 / 동문선 / 1989년 5월
평점 :
절판
들국화, 들장미, 들개.. 그들이 토해내는 그 야릇한 이미지. 바로 야성미다. 화분속의 도도한 장미, 자기 집속의 평안함에 복이 겨워 항상 혀를 내두르는 집개들과는 달리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그 본연의 순수함. 우리는 그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본연의 순수함을 숭배와 찬양의 도마위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한다. 그 순수란 위인이 숭배의 메뉴판에 오를 만큼 세상은 타락한 것일까? 때 묻은 것일까? 하던일 잠시 멈추고 곰곰히 앉아 재고해 볼 문제다.
얼마전 작가 이외수의 최근작을 읽고 적잖이 실망한 적이 있었다. 개인적 판단문제였지만 그도 유명세 만큼 상업성의 문에 힘차게 노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의 예전 작품을 살펴보기로 했다. 물론 `장수의 패배는 병가지 상사`란 개인적 화해 차원에서였다. 과거는 말해 주었다. 그때의 작가는 때묻지 않은 순수함의 전라(全裸) 그 자체라고, 또한 그의 산물 들개 역시 마찬가지라고.
작품 `들개`의 맛과 대동소이 한 것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렉싱턴의 유령`등을 들 수 있겠다. 머릿속을 맴도는 그 허무와 상실의 맛. 하지만 들개에는 좀 더 형이상학적인 아픔, 즉 고통이라는 향료가 추가됨으로써 그 맛은 달라진다.
세상이라는 상표의 짙은 회색 채찍과 버얼건 당근에 속박되기를 당당히 거부한 이들, 주인공과 한 꿰째째한 젊은 화가. 그들의 삶을 찾고자 하는 붕정만리는 너무 험난했다. 숨 조차 쉬기 힘들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를 찾고자 하는 귀소본능이 저 아득히 깊숙한 곳에 내재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세상`이란 기업의 너무나 충실한 직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끔 그 직원이길 거부하는 이를 보면 한심하게 여기곤 한다. `왜 저리 힘들게 살려고 하지?` 퀴클롭스집단에서의 인간은 `병신`이다. 타락의 구렁텅이에서 귀소본능 운운하는 자는 `병신, 이단아`다. 시대가 그렇다.
그 `이단아`에는, 그 본능을 예술, 즉 자기 표현수단으로 승화시키는 자가 있었고 자아와 세상의 중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방황자가 있었다. 전자가 예술로서 자기완성의 경지에 입문한 젊은 화가이고, 예술의 순수함과 세상과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가 바로 주인공, 그녀이다. `내가 방황한다고? 천만에 난 확고한 의지가 있어!` 그녀가 반론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세상과도 어울릴수 없었고 자기 작품의 세계와 또한 어울릴 수 없어 하던 모습에서 그 방황의 자태를 느낄 수 있다. 변명의 요지는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완성과 방황의 틈에 끼여 고통 받았다. 그들의 숨통이 조여지면 나의 목 또한 서서히 조여짐을 느꼈다. 이(異)차원적 공간에서 동시대적 동질감을 향유 할 수 있었던것은 나만이 아닐것이다.
이 작품을 `해석`이라는 칼로 도려내진 않을련다. 작가 또한 그것을 부탁한 터이다. 나는 그 칼을 내려놓고 그저 부드러이 쓰다듬기로 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가슴속에 느껴지는 그 촉감. 서로 어느 부분에서 만졌는가에 대한 차이로 그 느낌은 각각 다르겠지만 그래도 무엇이든 가슴으로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그 느낌은 가만히 가슴 속에 묻어 두면 된다. 그것이 진정 작가가 원하던 독자와의 교감이다. 그 느낌을 계속 묻어 두는한 작가와의 영원한 교감이 이루어 질 것이다.
들개. 마음 깊은 곳까지 찾아온 좀처럼 만나기 힘든 손님이었다. 가능하면 빠르게, 빠르게 이 손님을 초대하자. 좀 더 순수하고 좀 덜 때 묻었을 때. 그러면 그 손님은 조용히 마음속의 찌들고 얽힌 실타래를 풀어 줄, 구원의 손길이 되어 줄 것이다.(단, 재촉하지는 말자.) 들개. `인간은 결국 완전한 혼자가 되기 위해 살고 있을 뿐이다.`라는 생각의 음영속에서 다시금 손에 잡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