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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와 달빛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평점 :
책 속의 주인공과 내가 어딘지 닮아 있는 느낌.
이제 막 책장을 폈고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몇 줄만 읽어 내려가도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단 한 번도, 어쩌면 영영 가보지 못할 헝가리에 사는 과거의 주인공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우리 둘의 삶에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그가 과거를 회상하며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낯설지가 않다.
그러니 그처럼 나도 "폐허 속의 들쥐" 같은 모습이라도 살아남겠노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닐까.
[여행자와 달빛]
직관적이지 않고 에세이에 어울릴 법한 제목을 보자마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는데 책을 읽고 나서는 제목은 전혀 상관하지 않게 되었다. 작가가 왜 제목을 '여행자와 달빛'으로 했는지는 책을 읽어봐야만 알 수 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책에 딱 어울리는 제목이야.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더 나은 제목이 생각나지도 않는다.
신혼여행, 혼자만의 여행, 과거로의 여행 등 끊임없이 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니 여행자의 이야기는 맞다. 하기야 삶도 하나의 여행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 모두가 지구와 현재를 떠도는 여행자들이기도 하다.
한 여행자와 그가 만난 다른 여행자들의 이야기.
글쎄, '울피우시 터마시'나 '터마시' 로 제목을 지었다면 어땠을까를 잠시 생각하기는 했었다.
굳이 '터마시'라는 이름을 제목으로 상상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미하이' 다. 책 소개에 나오듯 헝가리인인 '미하이'는 '에르지'와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알콩달콩한 신혼여행의 분위기는 아니었고 어쩐지 둘의 관계가 위태로워 보이기는 했지만 '미하이'의 성격이 건조하고 냉소적인 듯 묘사돼서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다. 한데 갑자기 '미하이'의 친구가 그들 앞에 등장하여 '미하이'를 비난하고 가버리면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된다.
오래전 친구였던 '야노시'를 만난 '미하이' 가 이제 막 자신의 아내가 된 '에르지'에게 털어놓게 되는 이야기들은, 어느 독자들에게는 반항기 가득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로 끝일 수 있고 어느 독자들에게는 음울하고 죽음에 대해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정신병에게 기인하는 것이라고 단정 지어버릴 수도 있다. 그처럼 '미하이'와 그 친구들의 이야기는 아주 유별나다.
그 중심에 '울피우시 터마시' 가 있다. 그의 여동생 '에버 터마시'과 함께.
서로 완벽하게 이해한다 믿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함께 할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 아무렇지 않게 그런 인연들이 사라져버린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영화 [친구]의 포스터 문구처럼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라는 것은 요즘 말로 일진들이나 학폭의 주인공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청춘 한가운데서 맺은 정신적인 유대는 아주 오랫동안 영향을 끼친다.
'미하이'가 '터마시'를 '배신'했다고 말했던 일을 이해했기 때문에 '미하이'의 여행이 낯설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미하이'는 자신이 학창 시절의 기억에서 떠나기를 노력했지만 계속 그 자리를 맴돌고 있었고 신혼여행이 엉망으로 끝나고 나서야 길고 긴 자신만의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이제서야 오래전 기억을 가진 채로도 살아남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의 청춘 속에 갇혀있던 이들도 떠나고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삶의 여행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그런 그들은 우연치 않게 다시 마주하게 되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주인공은 현실로 돌아갔다. 그의 아내도 돌아갔다. 각자의 삶으로.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그러고는 또 다른 여행을 계속하게 되겠지.
뒤표지에 쓰인 '김화진 소설가'의 말처럼
"떠난 자리로 돌아온 것 같지만 실은 아주 달라진 채로..."
나와 같이, 여전히 기나긴 방황을 하는 길 잃은 여행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 유럽의 생소한 지명들과 각 지역 특유의 분위기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부분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주인공이 묘사했던 헝가리나 이탈리아의 지역들을 방문해 봤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