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군주 - 근대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 이산의 책 26
다카시 후지타니 지음, 한석정 옮김 / 이산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마루야마 마사오는 그의 저작 '겐큐'의 영어판 서문에서 오진 천황의 한자를 잘못 표기한 것     때문에 동료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여 '삼가 아래와 같이 고칩니다'라는 정정문을 내야만했던    40년대 일본 학계의 풍토를 언급한적이 있다. 정중히 정정하지 않았다면 사상 경찰의 표적이   되어 학계 내외적으로 곤란을 겪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50년이 지난 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는 한 인터뷰에서 사르트르처럼 노벨상을 거부할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 이것은 유럽의 작가와는 달리 일본의 한 작가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에게 주어지는 상이므로 받겠다는 말을 했다. 이후 그는 천황이 하사하는 상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본극우세력의 테러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에서는 '천황' '텐노' '미카도' 를 논하는 것은 아직도 극히 조심스런 일이다. NHK를 통해  들려오는 료헤이카 (兩陛下)에 대한 아나운서의 멘트는 극진할 정도다. 만세일계, 천조대신으로 부터 면면히 이어져와 하나의 혈통을 순순하게 지키고 있다는 일본 황가의 내력. 다카시 후지타니는 그의 저작 <화려한 군주>를 통해 일본에서의 실제적인 '천황'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수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낸다. 니체, 푸코가 사용했던 계보학의 방법론을 빌려 지금은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상들이 그 기원을 파고 들어가면 필연적인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 매우 '우연한' 계기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후지타니가 말하는 '천황제'의 실제적인 기원은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가 아니라 '메이지 유신'이라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메이지 유신의 공신들은 막부를 타도한 후 국민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일본'이라는 국가적 정체성과 '일본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여기서 구심점으로 삼은 것이 그 동안 막부에 밀려 블라인드 속에 갇혀있던 '천황'이라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직접 왕위에 올라 진두지휘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유신의 과정에서 주도자들은 막부뿐만 아니라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서남전쟁처럼 토막파의 한때 동지들과도 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존왕양이의 기치를 혁명의 적당성으로 삼고 천황에서 우선 충성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국민들을 구슬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천황'의 권위를 키우기 위해 메이지 신궁과 삼전을 세우고 국토 순행을 통해 국민들에게 장막속에 갇혀있던 천황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천화에 관련된 수많은 의식과 행사들을 만들어낸다. 왕가의 일을 관장하는 궁내성이 어떤 면에서 대장성보다 더 은밀한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도 이때부터다. 

일본에서 천황의 문제는 결국 그 흔하디 흔한 '근대성'의 문제다. 후지타니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의 파놉티콘을 인용하며 천황이 원형감옥 속의 감시자와 같이 모든 사람들을 굽어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여 일본사회의 구심점이 되어왔음을 지적하며 권력과 제도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이 문제에서 우리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박정희의 10월 유신 - 웃기다. 維新이라니. 헌법을    쓰레기통에 용도폐기하고 어록 몇 개로 나라를 움직였던 긴급조치. 그딴것들이 뭘 새롭게 할 거라고 유신이라는 말을 쓰고 있나.- 과 그 이전 정치 사회 경제적 제도의 많은 부분들을 일본에서 도입해왔던 우리나라는일본의 구조를 많이 닮아있다. 만세일계, 수천년을 이어온 순수함.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한국의 근현대사에는 이와 비슷한 장면들이 많이 발견된다. 메이지 교육칙어를 베껴와 국민교육헌장이라는 이름으로 둔갑시키고 길을 걸어가다가도, 야구장과 농구장에서도 애국가가 울려처지면 멈춰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을 칭송하며 반만년 역사속에서 수천번의 외침을 물리치고 꿋꿋이 이어온 백의 민족. 야마토타마시와 배달정신의 차이가 무색해지는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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