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당신을 원망하는 일이 사랑이겠습니까.
 

이제 낱낱이 저에게 스미는 것들을 찾아 
 

저는 어두워질 것입니다 홀로 빛날 당신의 


중심을 위해 저는 오래 더럽혀질 것입니다.

 

                                       - 샘가에서, 이성복



늦은 해에 군대를 갔던 내가 가장 다행스러웠던 것은사령부의 행정병이었던 탓에
막사의 화장실이 여느 일반 화장실 못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작대기 하나와 둘은
어떤 개인행동도 용납되지 않던 시절, 문자는 최대의 호사였다. 그래서 나는 취침
점호가 끝나면 화장실 변기에 앉아 담배를 피며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친구
들이 보내준 시집을 필사하며 이 긴 겨울과 여름이 두 번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도 변하고 인걸은 간데 없어도 문자만은 예전의 추억과 욕망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었기에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치욕을 일깨워주는 이성복의 시들을 특히나 사랑했다.
칙칙한 군용 종이위에 거칠게 필사해둔 그의 시들을 주머니에 놓고 가당찮은 낭만을
부리는 것은 더없는 즐거움이기도 했다. 결국 육체의 옥죄임이 정신을 풍요롭게
하지 않았던가. 한획 한획 필사할때마다 드러나는 하나의 어휘들은 그 자체로 시였고
사랑이었고 자유였다. 그 공간이며 그 시간이며 그 남루한 일상들이 때로 희뿌연 안개
속에 모호해지고 어느새 문자의 아우라가 몸을 감싸주기도 했다.

세번째 봄이 오고, 전전해에 옮겨 심어둔 들꽃들이 더 이상 향기를 뿌리지 않고 잡초처럼
무성해졌을 때 나는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어쩌면 빛을 흐리게 만드는 것은 익숙함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에도 참모부 뒷마당에는 산수유 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해석하는 시보다는 바라보는 시를 좋아한다. 참신한 비유나 혀를 내두르는 필력보다
때로 거칠고 유치하기까지한 언어로 찬찬히 쓰다듬어주기를 좋아한다. 신용목의 시집은
그런 응시, 바라봄, 쓰다듬어주기가 들어있는 시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거나 그 향기에 취하기보다는 그저 그곳에 무심히
피어있는 꽃들이 마음에 든다. 돌 사이에 피어있는 산수유처럼.

산다는 것은 산수유 꽃빛만큼 아득하다고 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물집은 몸에 가둔 시간이라 한다. 그 또한 그럴 것이다.
오랜만에 연필을 들어 필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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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수유꽃


         신용목


데인 자리가 아물지 않는다

시간이 저를 바람 속으로 돌려보내기 전 가끔은 돌이켜

아픈 자국 하나 남기고 가는 저 뜨거움

물집은 몸에 가둔 시간임을 안다


마당귀에 산수유꽃 피는 철도 독감이 찾아 옆구리에

화덕을 끼고 자다 나는 停年이 되어버렸다

 


노비의 뜰에나 심었을 산수유나무

면도날을 씹는 봄 햇살에 걸려 잔물집 노랗게 잡힐 적은

일없이 마루턱에 앉아 동통을 앓고 문서처럼 서러운

기억이 많다

 


한 뜨거움의 때를 유배시키기 위해 몸이 키우는 물집

그 수맥을 짚고 산수유가 익는다고 비천하여

나는 어깨의 경사로 비탈을 만들고 물 흐르는 소리를 기다리다

늙은 것이다

 


시간의 문장은 흉터다 둑 위에서 묵은 편지를 태웠던

날은 귀에 걸려 찢어진 고무신처럼 질질 끌려다녔다

날아간 연기가 남은 재보다 무거웠던가

사는 일은 산수유 꽃빛만큼 아득했으며


나는 천한만큼 흉터를 늘리며 왔고 데인 데마다

산수유 한 그루씩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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