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갑자기 휴즈가 나가서 가뜩이나 채광도 안좋은 방이 달빛마저 없으니 칠흑빛이
되어 버렸다.  구석을 뒤져 촛불을 꺼내 밝혀두고 있으니 초라함이 없지 않으나 은근한
풍취가 오는 듯하여 과히 나쁘지 않다. 벽 한켠을 비워두고 어릴때 했던 그림자 놀이
장난도 하면서 독수리며, 개며, 꽃봉오리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모습들을 보며 홀로
청승을 떨고 있는 것도 즐겁지 않다할 순 없겠다.

플라톤 같은 이들이 봤으면 사물들이 모두 이데아의 한심한 그림자일테고 또 그 사물의
그림자를 가지고 여흥을 즐기려하니 그야말로 그림자의 그림자에 혹한 우둔한 짓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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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산을 잘 모른다. 
주입식 교육의 탓에 그가 '목민심서'의 저자이며, 수원성 건축때 거중기를 이용했으며
서학에 적극적이었고 머나먼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어 초당을 지어 살았다는 얇은 정보가
내가 아는 거의 대부분이다. 그의 대표적 저작인 '목민심서'는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는
그 현대적 의의를 논하기에는 과문하고, 제목만 들어 알고 있는 흠흠신서니 경세유표니
하는 저서들은 구하려는 시도조차도 해본 적이 없다. 다만 그가 오규 소라이를 알고 있었다
는 것과 시대에 열린 인물이었으며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으면서도 각각의 깊이가 얇지
않았음은 어렴풋이 느낄 정도이다. 




 
얼마전 분황을 보기 위해 경주행 기차를 올라타면서 유마경 강의록과 다산의 문집 한 권을
챙겨간 적이 있었다. '뜬 세상의 아름다움'이라는 낭만적인 제목을 단 이 책은 다산이 저술
한 '여유당 전서' 가운데서 격조가 뛰어난 글들을 가려 엮은 것이다. 조선 후기 유학에 있어
선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무게를 넘어 이 속에는 흔히 유학자들에게 가지는 선입견인
꼬장꼬장함의 인상을 단순히 넘게해 줄만큼 다양하고 인간적인 면모들이 담겨 있다. 

 




개중에는 악보를 빌려달면서 '째째하게 굴지말고 빌려주십시오' 라고 한다든가  개고기를
맛있게 요리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같이 유배를 갔던 형 약전에 대한 그리움,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감, 의미없어 보이는 세상에 대한 애착,  친한 친구들에 대한 우정이 가감없이
펼쳐진다.

나는 이 속에서 '그림자 놀이 菊影詩序'를 아껴두고 음미하는데 그 내용이 사뭇 낭만적이다.
짧지 않은 중후반부를 인용해보면,


    하루는 남고와 윤이서에게 들러 그와 이야기하다가, 
    "오늘 저녁에는 저희 집에서 주무시면서 저와 국화 구경이나 하십시다" 
    하였다. 이서는 
    "국화가 아름답기야 하지마는 무슨 밤에 구경할 거리가 된단 말인가."
     하더니 병을 핑계로 사양한다. 


    나는 
    "한 번 보시기나 하십시오"
    하고는 굳이 청하여 함께 돌아왔다. 저녁이 되자  짐짓 동자에게 촛불을
    꽃 한 송이에 바싹 갖다대게 하고는, 남고는 끌어다 보여 주며, 
     "기이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남고는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상하이. 자네 말이, 나는 이것이 기이한 줄 모르겠네"
    한다. 그래 나도,
     "그렇지요"
    하였다. 

    잠시 후 다시 동자에게 원래 법식대로 하도록 시켰다. 그래서 옷걸리며 책상 등
    산만하고 울멍줄멍한 물건들을 모두 치우고, 국화의 위치를 정돈하여 벽에서 
    약간 떨어지게 한 다음, 촛불을 적당한 곳에 놓아서 국화를 비치게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기이한 무늬, 이상한 형태가 온 벽에 가득 찬다. 
 
    그 중에 가까이 있는 것은 꽃과 잎이 서로 어우러지고 가지와 곁가지가 정연해서
    마치 묵화를 펼쳐 놓은 듯하다. 그 다음 것은 너울너울 얇은 깃털 옷을 입고 춤추듯
    나풀대는데 마치 달이 동쪽으로 고개에 뜨자 뜰의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비치는
    것 같다. 그 가운데 멀리 있는 그람자는 구름이나 노을이 엷게 깔린 듯 흐릿하고 
    모호한가 하면, 파도가 질펀하게 일렁이듯 사라져버리기도 하고 소용돌이치기도
    해서 언뜻언뜻 비슷한 듯도 하지만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이것을 보자 이서는 큰 소리를 지르며 기뻐 날뛰더니, 손으로 무릎을 치며 
    "기이하구나! 이상도 하구나! 천하의 절승이로구나!"
    하고 감탄한다. 

    감탄이 진정되자 술을 내오게 하였다. 술이 거나해지자 함께 시를 지으며 즐겼다.
    이때 주신과 혜보과 무구도 같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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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국화를 오상고절 傲霜孤節 이라 부른다. 그것은 가을의 서리를 오만하게 여길 정도의
절개를 나타내는 말이다. 세도정치와 당쟁의 먹구름이 가을 서리처럼 차갑게 세상을 덥고
있을 때에도 정약용은 경전을 가려 읽고 당대의 목민관들이 가져야할 응당한 윤리에 대해서
논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던 과학에도 눈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오상고절의 국화
는 그에게 잘 어울려 보인다.

늦가을이라 하기엔 이미 차가워져 버린 공기가 피부에 와닿은 한 밤에 그림자 놀이에 취해
있다가 문득 예전에 읽은 얇은 책을 꺼내들고 잡생각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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