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가 없어서 핸드폰으로 찍어 구린 칼라가 되어 버린 왼쪽의 책은 박*연씨가 정성들여
구해준 포르투갈어본 장미의 이름 O nome da rosa 이다.  다음 컬렉션은 아마 중국어본
이나 러시아본 정도가 되지 않을까 스스로 예상하고 있었지만 전혀 생각지 못한 인연의
을 빌어 쉽게 구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포르투갈어본이 서가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쁜 일이다.  주연, 그라시아스.

포르투갈이라고 해봤자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은 기껏 부루마블을 통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수도 리스본 (리스보아)이나 지리상의 발견을 논할 때 의례 등장하는
마젤란, 바스코 다 가마, 바르톨로뮤 디아스같은 탐험가들의 이름, 가까이는 에우제비오로
시작해 루이스 피구로 계승되어 호날두로 이어지는 축구 천재들의 계보 , 거기에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로 대표되는 전통음악 파두 정도일 것이다.
예전에 기억나는 오렌지 쥬스 CF에서 Tao Bon 따봉!! 이라는 말도 그리 낯설지는 않다.

아시다시피 포르투갈어는 대항해 시대의 제국주의 침략에 힘입어 이베리아 반도의 그리
크지 않는 나라인 포르투갈이외에도 브라질과 몇몇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중국의 마카오,
의외로 인도의 한 지방에도 쓰이고 있다. 이것은 이 나라의 역사가 한때 그들의 입장에서는
찬란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의 차이, 본토 포르투갈어와 브라질산 포르투갈어의 차이는 예전에
잠시 언급한 적이 있으니 넘어가고, 특이한 정관사 O를 제외한다면 이름을 나타내는 명사
nome는 이탈리어어의 nome의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nombre(스),
nom(불), name(독), namn(스웨던) 등과 같이 친족관계를 이루는 언어들의 분화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전치사da 역시 de la, der, della와 멀어보이지 않고 rosa는 말할 필요없이
이 낯선 언어가 옛날 로마 제국의 언어였던 라틴 속어에서 갈라저 나온 수많은 로망스 제어
중의 한 무리에 속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그러니까 초급 스페인어 정도에 익숙한 이라면, 

  Quero ver o libro da poetica de Aristoteles, aquele que todos consideran perdido,
  ou jamais escrito, e do qual tu guardaz talvez a unica copia, (엑센트는 생략) 

라는 포르투갈어 문장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책을 보고 싶습니다. 모두가 사라졌다고, 아니면 아예 쓰여지지도
   않았다고 생각하는 아마도 당신이 가진 유일한 한 권의 그 책 말입니다
." 

라는 정도의 의미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 

위의 문장에 관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자면, 기나긴 현학과 교리 논쟁과 여러 사람의 죽음을
뚫고 마침내 음모의 정점에서 '웃음' 이라고하는 것의 실체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윌리엄의
지혜와 호르헤의 경륜이 불꽃튀며 작렬하는 순간, 독자는 공허함과 경박함의 표상으로서
반대로 공포를 극복하고 진정한 인간성에 다가설 수 있게만드는 도구로서의 웃음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인류가 형상을 인식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또는 문자로 대상을 나타내는 능력을 습득한 이래로
그들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을 희화화시킴으로서 그 공포를 극복해내왔다. 동굴벽화
에서부터 민화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목숨을 위협할 만한 맹수와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적
존재들은 거의 대부분 예외없이 혈거인의 손에서부터 화공의 손을 빌려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과의 투쟁의 장에서 조금씩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범부들에게는 웃음을 제어할 무기가 없기 때문에 이들을 영생으로 이끌고 배와 엉덩이와  
   먹을 것과 더러운 욕망으로부터 이들을 구하자면 마땅히 목자들은 이를 엄격한 규율 아래  
   에다 두어야 하는 것이오. - 호르헤 수사

그런 웃음을 '그리스도가 웃지 않았다'라는 하나의 명제로서 억압하고자 하는 시도는 덧없어보인다.
독실한 이의 입장에서는 경건함의 대상이 되어야할 존재가  회화화 되는 것을 나아가그 존재 또한
어떤 대상을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에코의 손을 빌려
아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제 1부에서 우리는 비극을 다루면서 이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야기시킴으로써 카타르시스    
     의 창출을 통해 이러한 감정을 씻어 내는 과정을 검토해 보았다. 이제 약속대로 희극을 풍자    
     광대극과 거불어 다루면서 이 희극이 어리석은 자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비극과 같은 작용을    
     하는 과정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라는 문장을 통해 오래 전 문명의 총화를 누렸을 그리스인들이 어째서 비극과 동시에 희극이라는
장르를 창조해냈는지, 그리고 양 극단에 서있을 법한 희극과 비극이 실상 같은 효과를 노렸다는것을
알 수 있다. 사라진, 어쩌면 쓰여지지도 않았을 희곡으로 유추하는 것은 어려우니 비극을 통해 추론을
해보자면, 김상봉 교수는 그리스인이 비극을 만들었던 이유는 비극을 통해 슬픔을 생각하고 "슬픔의
의미와 고통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리고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다시 '장미의 이름'의 대미 부분에 나오는 윌리엄의 말,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일일듯 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과 일맥상통한다. 결국,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넘어서 그리도 유치에 보이는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이 웃음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장미의 이름'이 소중한 이유는, 그리고 내가
끊임없이 이 서책을 모으려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은 다시금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