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짐작에, 그 시절 비공식적으로  가장 인기있었던 무협지는 만화방 구석에서 파란색 표지를 
 둘렀었던 와룡강의 작품들이었겠지만 역시나 최고는 김용의 영웅문 3부작이 아니었을까. 물론
 영웅의 신화가 나중에 녹정기를 통해 부정되기는 했어도 가장 무협지다운 플롯과 개성을 지닌

 소설로서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의 3부작은 중고등학교 내내 읽고 또 읽어 책이 다
 닳아버려 또 사서는 밑줄칠 만큼 대단한 애정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영웅문을 좋아하는 친구들
 끼리 영퀴를 나누듯 '장무기가 광명정에서 멸절사태와 싸울 때 제일 먼저 구사했던 초식은 무슨
 파의 무슨 초식이었을까' 라든가 '홍칠공이 여생에게 전수해줬던 초식은 항룡십팔장 중의 제
 몇 장 무엇이었는가' 식의 영웅문 퀴즈를 서로 내곤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에어울프가 세냐
 전격 Z 작전의 키트가 세냐 식으로 김용의 작품 중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에 무림 최고의 고수 는과연 누구일까하는 것도 단골 메뉴 중의 하나였다. (아마도 독고구패)




 요즘에야 홍콩 드라마를 챙겨 볼 일이 없고 대세 또한 미드와 일드로 넘어간 지 오래이기는해도
 예전 홍콩 TVB에서 나오던 무협지 시리즈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흥미로운 볼거리 중의 하
 나였다. 주윤발과 유덕화의 치기 어린 시절도 포함되어 있고 지금은 영화사에 기록되어도 모자람이 없을 양조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혹여나 중간에 누가 하나를 빌려가서 이빨이 빠져 있으면 그거 기다리는 애환이란 마치 중요한 택배 기다리는 학의 심정의 그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신필이라 불릴만한 김용의 필력이야 장대한 3부작 내내 유려하게 이어지기는 하지만 나는 수많은
 그의 문장 중에서 이막수가 읊조리던 싯구 '세상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생사를 가름
 하느뇨' 를 아직까지도 가장 사랑한다. 냉정하고 잔인한 야차의 모습을 지닌 그녀이지만 양과와 
 소용녀의 모습에서 자신을 버린 옛 연인를 떠올리고 결국 절정곡 (정을 끊어버리는 계곡일세)
 으로 몸을 던지며 내뱉던 그 싯구는 신조협려 문장 중의 가장 백미라 할 만하다.  소설 속에는 
 일부만이 인용되지만 량서우쭝이 지은 '강호를 건너 무협의 숲을 거닐다'에 보면 그 속에 얽혀
 있는 문헌사를 상세히 전하며 전문을 게재해 놓았다. 

 
         問人間                           세상사람들에게 묻노니
         情是何物  直敎生死相許  정이란 무엇이기에 끊임없이 생사를 가름하는가
   
         天南地北雙飛客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저 새야,
         老翅幾回寒暑                 지친 날개로 추위와 더위를 몇 번이나 겪었던고.
         歡樂趣 離別苦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 속을 헤매는 
         是中更有癡兒女              어리석은 여인이 있었네.
    
         君應有語                        님께서 말이나 해주시련만
         渺萬里層雲 千山幕景       만리 첩첩이 구름 덮힌 산에 노을질 때
         隻影爲誰去                     외로운 그림자 누굴 찾아 날아갈꼬.
    
         橫汾路  寂寞當年蕭鼓      분수의 물가를 가로 날아도 그 때 피리와 북소리 적막하고
         荒煙依舊平楚                  초나라엔 거친 연기 의구하네.

         招魂楚些何磋及               초혼가를 불러도 탄식을 금하지 못하겠고
         山鬼自啼風雨                  산귀신도 비바람 속에 몰래 흐느끼는구나.
         天也妬 未信與                 하늘도 질투하는지 더불어 믿지 못할 것을
         鶯兒燕子俱黃土               꾀꼬리와 제비도 황토에 묻혔네. 
       

         千秋萬古 爲留待騷人       천추만고에 어느 시인을 기다려 머물렀다가 
         狂歌痛飮                        취하도록 마시고 미친 노래 부르며
         來訪雁丘處                     기러기 무덤이나 찾아올 것을.


   금나라 시인 원호문의 '매피당' 중의 일절인 이 구절은 기러기의 죽음에 빗댄 절절한 가사로서 
   연인을 잃어버린 한 여인의 피토하는 서정가이자 16년 또한 오직 한 사람만을 기다렸던 양과와
   소용녀의 이야기를 대변해주는 애절한 연가이도 하다.  한 가족 몰살하는 것쯤은 아무렇지않게
   여기는 비정한 살수이지만 이쁘니까 다 용서되는 이막수와 선녀의 용모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소용녀는 그러니까 그 시절 남중고딩들이 한번쯤 가질만한 판타지의 여인들인 것. 나는 비교적
   현실적으로 조민을 가장 좋아했다. 

 


   (조민(여미한), 장무기(양조위), 주지약(기억 안남) )

 

   내 취향으로는 사조영웅전이 장대한 스케일을 만끽하는 재미가 있었고 신조협려는 양과와 소용녀
   의 가슴아픈 사랑에 감정이입을 했었어도 읽는 재미 자체는 장무기의 의천도룡기가 으뜸이었다. 4권
   이 지나야 본격적으로 그의 활약상을 볼 수 있는 것이 분량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지만 
   (3부 1,2,3 권은 언제부터인가 책꽂이에서 보이지 않았다. ) 그만큼 또 밀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좋았고 압도하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어도 그 나이때에 그럴 법한 우유부단한 성격 또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좋았다.  후에 여러 편이 다시 제작되어 몇몇 배우가 장무기의 역을 맡았어도 
   양조위가 그 역활에 가장 어울려 보였던 것도 아마 그런 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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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영구 선배와 함께 일을 나갔다가 의천도룡기가 새로 번역되어 나왔음을 들었다. 김일강
  의 번역으로 익숙했던 것을 다시 보니 어투가 현대식으로 많이 바뀌었고 예전에 누락되었던 부분
  들이 많이 보완되어 원래 6권짜리였던 것이 8권으로 증보되었다. 전체 작품을 '백량체'의 구성으로
  40장으로 나눈 각 장마다 제목을 붙인 것도 달라진 부분이다. 주요 부분들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몇몇 인물들의 이름표기가 변한 것 - 소소, 은이정 - 이라든가 여운을 많이 남겼던 마지막 부분 -
  세 번째 소원 이야기로 즐거워하던 조민과 장무기앞에  주지약이 나타나 훼방을 놓던 - 이 원작에 
  따라 약간 늘어지는 것등 의 변화는 낯설고 아쉬운 부분들도 있다.  시네마 천국처럼 차라리 몰랐
  더라면  더 좋았을 법한 감독판을 보는 기분이랄까. 헌 것이 새 것보다 나을 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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