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후에 곡성에서 <이세 모노가타리>와 <순수이성비판>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전에 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 우연히 알라딘을 검색하다보니 <아무도 모를 내 다니는 사랑길>이라는 제목으로
이세 모노가타리의 개정판이 나와 있다. 원역자인 구정호씨가 원문의 출전을 더하고 이전의
보충 설명을 충실히 보완한데다 겐지스타일의 멋진 표지까지 더해져있다.  퇴근 후 반디앤루니스
에 들러서 개정판과 함께 같은 역자의<만엽집>을 같이 구입해서 몇 시간동안 읽고 있자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바쇼, 마사오카 시키의 하이쿠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와카 특유의 부드러움 (부드럽다 못해
간드러지기까지 하는)과 함께 농축된 표현에 마음이 흔들린 경험이 있을텐데 헤이안조의 옛
무명씨들이 흩뿌려놓은 이 정결한 언어들은 15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한 주술을 가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도 모를 내 다니는 사랑길 지키는 이는 내 지나는 밤마다 잠들어버렸으면


커버 스토리를 장식하는 이 짧은 노래도 멋있지만 몇 해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싯구는 바로 다음
단에 걸려있는 와카이다.


    저기 흰 구슬 무어냐고 그녀가 물었을 때에 이슬이라 답하고 사라져 버릴 것을.


이 구절에 대한 해설은 다음과 같다.
 

   - 옛날에 한 남자가 있었다. 도저히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 없었던 여자였는데 오랫동안
     사귀어 그녀의 집에 드나들다가 겨우 보쌈을 해서는 어두울 때에 도망쳤다. 아쿠타가와라는
     강가로 여자를  데리고 도망가던 중, 여자가 풀 위에 맺힌 이슬을 보고 '저게 뭐에요?'라고
     남자에게 물었다.

     갈 길은 멀고, 천둥마저 심하게 치고 비도 심하게 내렸기에, 허물어진 헛간에 여자를 밀어
     넣고 남자는 활과 전통을 매고는 문간에 서있었다. '어서 날이 샜으면'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을 때 귀신은 그녀를 한 입에 삼켜버렸다. 여자가 '아!아!'하고 외쳤지만 천둥소리에
     남자는 들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날도 새고 해서 들여다 보니 데리고 왔던 여자도 없어졌다.
     발을 구르며 한탄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 시대를 정확히 그리고 있는 오카노 레이코의 명작 <음양사>에 세이메이와 히로마사의 대화 가운데
바로 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낭만적인 비사로 보이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어이없음을 세이메이는
이렇게 전한다.
 





'남자 체면에 여자를 도로 뺏겼다고 할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귀신이 잡아먹었다고...'
 (히로마사의 저 벙찐 표정.)


궁중의 암내가 섞여있는 치열한 파워게임을 배경으로 깔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또 우아한 5-7조의
와카로 만들어놓은 당대의 인간들도 귀여워 보인다. '술집 여주인인줄 알았다'라는 식과는 격이
달라 보이지 않는가.

전쟁사를 연구하는 학자는 선사시대의 한 혈거인이 다른 혈거인의 머리를 돌도끼로 내려친 이래로
이 지구상에서 전쟁이 멈춘 날이 과연 몇일이나 있을까라고 자문하며 인간에 내재된 폭력성과의
해후를 지겨워하지만, 한 씨족이 다른 씨족을 멸해버리는 상황에서도 그 대척점에는 중국의 시경
이나 구약의 아가서, 그리고 헤이안 시대의 만엽집과 이세모노가타리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깃발
을 흔들던 그 손으로 동시에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러니 섣불리 성악과 성선을 말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것이 비록 격식에 사로잡힌 허울이라 할지라도.

무사시노의 숲은 아니지만 세속과 떨어진 곡성의 갈대밭에 누워서 5-7조의 와카집을 읽고 있으면
1500년전의 무명의 필자들의 속삭임이 충실하게 바람을 타고 전해진다. 천성이 이재에 밝지 못해
자기 계발서나 경영서를 읽는 것이 체벌처럼 느껴지면서도 (사실 읽어본 적도 없지만) 풍진 가득한
사회의 칼바람 속에 떨어져있는 이상 언제 다시 그런 호기를 부릴 날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 봄날
따뜻했던 햇살만큼이나 온기서린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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