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 알았다.
그 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시작詩作메모 (1988.11)

근래에 시를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문청의 시대가 저문지 오래되어서인지
다들 집값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기도 하고 조금 교양적이라 불리는
이들은 영화와 와인에 대해서 아낌없는 헌사를 늘어놓는다. 그런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학 시절의 겉멋듦이 멀리는 소월과 백석에서부터 가까이는 기형도와 황지우를 경전처럼
받들며 논하게 만들었지는 모르겠으나 이제는 그런 지적 허영마저도 뿌리부터 말라비틀어진
우물이 되어 버린 듯하다. 짐짓 시대착오적인 모던을 봄내어 박인환을 읊어보고 더 올라가
고대 미상의 작자가 상재했던 서정시를 필사하는 것도 되울림없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고쳐 생각해보면 그 시절 막걸리와 함께 주점의 벽을 장식했던 수많은 싯구들이, 취기 올라
구토하듯 허공에 내뱉었던 싯구들이, 오래된 종이에 정서하던 싯구들이 의미없는 외침이
되어버린 것은 비단 청자의 속물됨에서 비롯된 것일까. 듣기에 지난 세기에 아버지와 같았
던 시인들은 해탈의 경지에 달한 듯 개인의 세계로 침잠했다하고 근래의 황병승이나 이민하와
같은 세련마저 넘어 '길고' '어려워진' 시인들이 쓰는 '그들의 언어'속에서는 내 '모국어의 속살'
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런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니면 내 모자람과 비겁함을 감추기 위해
시대의 이름을 빌렸다고 해야할까.
한 때 똥을 싸면서도 시를 짓는다며 서정주然 하던 내 친구는 지방의 한 동사무소에서
소리없이 서류를 넘기고 있고 소중해 보였던 이런저런 시집들이 서가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채 몇 년째 주인의 손때를 그리워하는 지금, 이미 죽어 뼈마저도 가루가 되었을 시인의
詩作메모를 들추고 있는 까닭은 가슴을 울리던 내 소중한 어휘들이, 운율들이 시체처럼
굳어버려져 삶마저도 무력감에 휩싸여져 버린 지금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의 일종이다.
일상이란 그렇게 소중한 것이었거늘 무엇이 좋은지 무엇이 싫은지조차 생각하기 귀찮아져
버리는 그런 괴물이 되지는 말아야겠다는 스스로의 경고를 그를 통해 일깨우고자 하는 바람
의 일종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이라고 한다. 그 '또 다른 세상'이 밤에 내린 눈이 '눈물이 되어 스'며
들어있는 그 세상이 눈을 받아주기도 이전에 눈의 존재와 죽음 자체도 떠올리지 못하는 세상이
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