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일을 핑계로 제대로 책 한 권 읽지 못하는 작금의 상황을 자책하다
키보드를 두드린다. 책을 읽으려해도 난독증이 왔는지 10페이지를 넘기기 힘들고,
영화관에서는 졸음이 쏟아지고 음악을 듣다보면 주요 패시지들을 자꾸 놓치게 된다.
이대로 가다간 카프카의 '벌레'가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함까지 들기도 한다.
나는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켜나가는데에 가장 무서운 적은 전쟁, 가난, 호환마마가
아니라 '타성'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힘에 떠밀려
쳇바퀴의 패턴을 반복하고 어떤 비판의식을 갖지 못한다면 뇌세포 또한 그 패턴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기계의 부속품이나 다를 바 없을 것 같은 그 쳇바퀴도
개인에게는 소중한 일상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에 있는다면 무엇을 해야할까. 물론 연애를 하는 것이 바람직
하겠지만 세상과의 접촉이 단절되어 있다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상황속에서 누구는 몸을 가꾸고 누구는 의미없는 수를 세기도 하고 또 누구는
책을 읽기도 한다. 그 와중에 사시나 변리사 준비를 해서 현역 시절에 합격했다라는
전설적인 이야기들도 전해진다.
내가 군생활을 보낸 강원도 양구는 5월 신록의 계절을 맞아 그 푸르름을 시인들이
예찬할 때에도 비웃듯 눈이 내리는 그야말로 양구나라 눈나라 라고 불리는 곳이다.
둘러보아 산과 계곡과 구름만이 가득한 그 곳에서 세상과의 연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신시대를 맞아 설치되어 있을 케이블 TV뿐이다. 20대의 한 때를 그 최전방의
칼바람 속에서 보내며 나는 인간이 발명한 가장 위대한 유산은 바퀴가 아니라 문자
임을 체득하고 있었다.
부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내 경우는, 내무실 계급에 따라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어, 내무실에서 누을 수 있으려면 병장 이상,
카세트를 들으려면 상병 이상, 책을 읽으려면 일병이상이어야 했다. 그러니까 이등병
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군대에서 가장 바랬던 것은 멀어보였던
전역이 아니라 일병 진급이었다.
그러나 사람 사는 곳이라 예외도 있기 마련. 내무실에서만 아니라면, 고참이 보는
곳만 아니라면 설사 그것이 공공연히 알려진다고 해도 눈감아주는 관행이 있었기에
나는 이등병 시절에도 점호가 끝난 시간에 책을 들고 화장실 흐릿한 불빛속에서
변기에 앉아 가지 않는 시간을 증오하고 또 감사하며 내가 사랑하는 문구에 밑줄을
긋곤 했다.
이등병 동안 읽은 세 권의 책.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 연구'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1'
이성복 '그 여름의 끝'
고등학교 후배이면서 전역을 며칠 남겨둔 말년 병장에게 휴가 복귀길에 부탁한 것
들이다. 어차피 흐르지 않을 시간이라면 바깥세상에서도 쉬이 읽히지 않을 것들로
정독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만한 것을 골랐다. '금일 19시에
있을 야간 작계 훈련을 위해 일보 작성을 완료하여...'와 같은 건조하다 못해 황량
하기까지한 군대안의 문체 속에서, 아름답고 유려하고 탄탄한 문체로 쓰여져 있는
저 활자들은 세상에서 유리된 신선의 언어와 같아보였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이성복, '그 여름의 끝. -
난독에 가까울만큼 머리속을 방황하는 철학과 사학과 문학의 편린들을 그토록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외고 또 외웠던 것은 저 문자들을 탐하다보면 어느 순간 시간을 흘러
있겠지하는 부질없는넋두리였을텐데 어느새 내 바램과는 상관없이 여름은 끝나고
그 다음 여름이 오고 또 그 다음 여름이 왔을 때 나는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이성복의 싯구처럼 참모부 뒷마당 공터에 옮겨 심었던 들꽃 송이들이 꽃을 피우고
잎을 떨구고 다시 치욕의 삶을 이어갈 무렵에 장난처럼 전역은 다가와있었다.
돌아보면 그 때만큼 절박하게 활자에 중독된 적은 없었을 텐데 타성만큼이나
'바쁘다'는 핑계야말로 지금의 내가 가장 경계해야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