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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 속의 유령 암실문고
데리언 니 그리파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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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작가 데리언 니 그리파의 국내 첫 번역본을 읽었다. 목구멍 속의 유령이라는 책인데 암실문고에서 새로 나왔다. 내절친(나 혼자만의ㅎ) 을유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주셨다. 감사히 소중히 소장할게요,, 책을 읽다가 작가의 시집이 읽어보고 싶어서 찾아봤더니 이 작가의 책이라곤 국내에 오직 하나.. 바로 이 책... 0개 국어라 너무 속상했다.

영어로 시집 읽기vs번역본 기다리기

과연 뭐가 더 빠를까..ㅎ 처음 암실문고 책을 읽었을 때는 암실문고라는 시리즈 자체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냥 리스펙토르 작가가 너무너무 좋아졌다. 근데 한두 권 암실문고 책을 읽다 보니 이 시리즈가 넘.. 넘.. 좋아졌다. 특히 목구멍 속의 유령은 내가 느끼기에 암실문고의 의도가 그대로 담겨있는 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니언 니 그리파는 많은 자녀를 키우고 있고, 살림을 하고 있고, 시를 쓰고 있다. 하나 낳아 키우기도 벅찬 세상... 작가 역시 어느 순간 삶의 중심이 작가에서 엄마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작가는 아일린 더브라는 작가의 시를 발견하고 작가에 대해 찾아보며 삶의 중심을 다시 맞춰가기 시작한다. 책의 시작에 나오는 페이지인데 나는 이 페이지를 암실문고 홍보문으로ㅎ... 사용하면 너무 좋을 것 같다. ㅋㅋㅋㅋㅋㅋ

이것은 여성의 텍스트, 21세기에 쓰였다. 얼마나 늦었는지. 얼마나 많은 게 변했는지. 얼마나 변한 게 없는지.

이 짧은 문장에 내가 암실문고 책을 읽으며 느낀 모든 감정이 함축되어 있다. 모든 책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여태까지 읽은 모든 책에는 여성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훌륭한 여성만이 적혀있진 않았다. 어리석고 소외된 여성도 많았다. 암실문고는 서로 다른 색깔의 어둠을 하나씩 담아 책장에 꽂아두는 작업이라고 한다. 이러한 어둠들을 내 책장에 꽂아둘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이런 책들을 읽기까지 얼마나 늦었는지, 과거의 책 속에 비해 현재가 얼마나 변했는지, 그 여성의 삶에 비해 지금의 내 삶은 여전한지, 이런 생각들을 가만히 하다 보면 그것만으로 이 책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작가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저 페이지를 한참 동안 읽었었다.





이 문단을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너무 일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 이 폭력적인 이타심은 본인조차도 눈치채기 어렵다.





아일린 더브의 삶을 끈질기게 쫓았지만 결국 그리파는 완벽하게 아일린의 인생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괜찮았을 것이다. 어느 순간 자기와 다른 한 여성의 하루하루를 발견하는 일은 그리파에게 가장 간절한 일이 되었다.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가 생각났다.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이지만 그리파는 엄마로서의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지 않을까? 그런 일을 간절히 바라던 중 아일린 더브의 시가 그리파에게 닿았다. 그리파가 수전 같은 결말을 맞지 않아서 기쁘다. 우리의 삶은 과거와 변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가끔 느낀다. 얼마나 많은 게 변했는지.





하나씩 지워가던 단어를 대신 새로운 말들을 떠올리는 작가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며 책은 끝난다. 이 책은 정말 온전히 여성의 이야기였다. 아일린 더브의 삶을 쫓는 그리파를 따라온 나..ㅎㅋ 결말에 이르러서 나는 어떤 삶을 살게될까? 내가 이런 책을 적기 시작한다면 어떤 결말로 끝이 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쭉 한 번 더 읽어봤다. 두 여성의 숨결이 내 목구멍 어딘가를 스쳐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파가 너무나 사랑했던 시를 천천히 조금씩 읽고 있다. 이 책은 그리파가 아일린 더브에게 바치는 애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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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구아 비바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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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펙토르 사랑하지 마

그게 뭔데

리스펙토르 사랑하지 말라고

..그거 어떻게 하는건데

그거 어떻게 하는건데...ㅠ 내 마음 속 리스펙토르 인기 순위 1등 아구아 비바 드립니다... 다 읽고 너무 좋아서 침대를 데굴데굴 굴렀다. 진짜임ㅠ 아구아 비바도 제일 먼저 읽을 수 있게 보내주신 을유출판사,, 감사합니다 (저희 이제 이 정도면 친구 맞나요?)

소설,, 수필,, 대체 뭐지,,? 하면서 읽다가 이 책은 일종의 선언문이기도 하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다. 과거에서 미래,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에는 현재라는 순간이 이어져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제목 그대로 흘러가는 물처럼.. 해파리처럼... 작가님이 그려놓은 어딘가를 부유하게 된다. 그러다가 페이지가 끝나고 다시 나의 현재로 돌아왔는데 삶과 죽음을 한번 경험한 기분이 들었다. 내 삶으로 돌아온 그 순간이 굉장히 소중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이 책이 너무 좋아졌다. 누군가는 철학과 사유가 쓸모없다고 하지만 나는 정말 좋아한다. 단 삶에 대한 고찰과 존경이 필요하다. 고찰만해서는 안 된다. 결론은 삶에 대한 의지로 이어져야 한다. 왜냐면 내가 철학을 읽고 사유를 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내가 잘 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니까 ^__^




살아 있는 물, 해파리. 강제하는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구아 비바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런 것이라고 한다. 제목처럼 이 책에는 정해진 형태가 없다. 화자가 있고 청자가 있는데 그마저도 명확하지 않다. 소설 같기도 하고 수필 같기도 하고 그냥 독백을 나열한 책 같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님 책 중에서 제일 난해한 책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나보다.. 근데 그것까지 이 책의 제목을 완벽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가 아닐까..ㅠ




내가 이 책을 제일 좋아하게 된 이유를 하나만 설명하라면 이 문단을 보여주고 싶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삶이란 몰까,, 답을 알았다면 나는 니체 선생님보다 유명한 철학자가 되어있겠지?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인생에 대해 질문하고 계속 생각한다. 


오직 시간과 함께 태어나고 시간과 더불어 성장하는 삶만을 다짐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문장이 다시 생각났다. 내가 이 책을 일종의 선언문이라고 생각한 이유도 이 문장 때문이다. 작가님도 이 책을 쓰며 저렇게 살 것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R=vd..처럼...^^....ㅋㅋㅋㅋㅋㅋㅋㅋㅠ (이 책을 읽고 이런 표현밖에 못 하는 내가 밉ㄷㅏ)




미래를 맞이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늘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미래가 되고 , 모든 시간은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된다.

너무 먼 미래가 잘못되진 않을까 걱정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오늘에 충실하자..! 작가님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이런 문장이 나오면 감동받고,, 다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고,, 하다보니까 책이 끝나서 놀랬다. 여러 번 읽게 되는 페이지가 많아서 두께치고는 오래 읽었는데 이상하게 책이 짧게 느껴졌다.



몇 번씩 다시 읽었던 페이지들.

오직 걸어야만 걷는 법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 얼마 전에 읽었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생각났다.

확실치는 않지만 다음 판자가

마지막 판자일 것이다 ㅡ

그래서 위태롭게 한 걸음 내디뎠다

경험이라고도 부르는 한 걸음을.

실수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설 자유가 점점 줄어드는 요즘 세상,, 그럼에도 경험해 봐야 걷는 법을 알 수 있다.

책을 계속 곱씹다 보니 한강 작가님의 흰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삶에 대해 자전적인 표현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똑같았다. 그렇지만 흰에서는 죽음에서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진다. 반면 이 책을 읽다 보면 삶 또는 죽음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붙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시간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하나의 순간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영문판의 제목인 삶의 흐름(Stream of Life)은 그런 의미에선 별로인 것 같기도... 근데 흐름(Stream)이라는 단어가 가진 물의 느낌,,을 생각하면 또 괜찮은 초월번역 같아서 좋기도 하다. 물론 난 0개국어닉가,, 내가 뭐라고 이런 생각까지 하나 싶긴 하지만..ㅎ...ㅎㅎ.ㅎ....




나는 전집이나 시리즈를 모으는 데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근데 어쩌다 보니 암실문고 책들이 좀 모였는데.. 생각보다 예쁘네요.. 이래서 모으나..?

아무튼 아구아 비바까지 이제 리스펙토르 작가님의 책을 5권 읽었다. 아구아 비바는 그중에서 당당히 1등... 이주 좀 안되는 시간 동안 온전히 다 받아들이기엔 너무 깊은 책이지만 그래도.. 그래도...ㅠ 이만큼만 이해해도 좋았다. 외국인들 자기들만 이렇게 좋은 책 읽고 있었나..?

앞으로 제일 큰 문제: 이제 더 읽을 번역본이 없음;

5권이 국내에 나온 번역본 전부라는 게 슬프다.. 대학교 다닐 때 스페인어 과를 갔어야했나..?ㅜ unnie korean plz :(.. 이 말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ㅠ 암실문고 응원합니다.. 다른 책도 내주세요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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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6
에밀리 디킨슨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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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작가를 처음 들어봤다. 생전에는 그 시절 독신 여성이 그러하듯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사후에 페미니스트 비평가들 덕분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시작해서 지금은 무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시인!이라는 수식어를 받고 계신다. (수식어 출처: 버지니아 울프)

  번역 시를 읽다 보니 원문이 너무 읽고 싶었다. 시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가 있지만 리듬 앤 라임,,,^_ㅠ 작가가 표현한 운율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슬펐다. 그래서 반 정도는 시가 아니라 산문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다.. 조금 슬펐는데 마지막 챕터에서 디킨슨의 생애와 시에 대한 해석이 잘 적혀있어서 조금 위안이 됐다. 정말 많은 고민을 거쳐 나온 번역본이라는 것이 느껴져서 좋았다. 에밀리 디킨슨 디에센셜을 읽은 기분..? 좋은 책을 보내주신 을유출판사(이 정도면 이제 절친 가넝합니다) 감사합니다><





   내 기억에 제일 남았던 시 두 편.


  시집을 읽다 보면 느껴지는 감정들이 희망 가득이라 좋았다. 요즘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는데 결국 까짓거 그냥 해보죠,, 이런 마음이 막 솟아났다. ㅋㅋㅋㅋ 특히 875번 시는 너무 좋아서 원문도 찾아봤다.

 

I stepped from Plank to Plank

A slow and cautious way

The Stars about my Head I felt

About my Feet the Sea.

 

I knew not but the next

Would be my final inch?

This gave me that precarious Gait

Some call Experience.

 

  앞에 있는 판자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딛는 그 한 걸음을 경험이라고 부르자. 알면서도 발을 내딛는 사람들이 바보가 되어가는 각박한,, 요즘 세상,, 경험에 도전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쉽지 않다. 타인의 평가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 디킨슨이 남기고 간 이야기라 더 마음에 남았다. 책 뒤의 해설을 읽고 찾아보니 디킨슨은 사실 상실과 아주 가까운 삶을 살았다. 인연, 가족, 소중한 무언가를 떠나보내는 경험에서 오는 상실에 대한 깊은 사유가 느껴져서 어떤 시를 읽을 땐 한없이 슬퍼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은 디킨슨 역시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꿋꿋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여성의 이야기는 언제 알게 되더라도 너무나 큰 힘이 된다.





  태양을 알게 된 이상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늘 속에서 잘 살아갈 바에야 야성적인 내가 될 것이다,,! 서늘한 그늘 속에서 살고있는 많은 사람들(여성들)에게 이 시를 읽어주고 싶다.









  + 인상 깊었던 해석들. ㅡ연속적인 선적 시간의 노예에서 벗어나 시간에서 해방될 때ㅡ 유한이나 영원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라는 말이 좋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저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디킨슨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이 기쁘다.


  짧은 시간에 디킨슨에 대해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좋은 번역과 해석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당분간 디킨슨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고 다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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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암실문고
브라이언 무어 지음, 고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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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40대 독신 여성의 이야기를 적은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요즘 비혼 혹은 미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곤 하지만 여전히 비주류에 속한다. 그런데 무려 1950년대에 출판된 미혼 여성의 이야기라니! 도레스 레싱 작가는 처음으로 여성의 일상을 소설로 적었다는 업적을 세우며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 책 역시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여성의 인생을 담았다는 그 가치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이유가 있지 않을까?

미혼의 삶에 대한 어떤 용기 같은 것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조금 실망할수도 있다. 요즘 많이 나오는 당당한 비혼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거의 100년 전에 미혼으로 살아온 여성의 이야기를 또 어디에서 읽을 수 있을까. 굳이 모르더라도 지금 당장 내 삶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도 언젠가 주디스 헌과 같은 상황에 놓일 수도 있으니, 혹은 여전히 주변에 남아있는 또 다른 주디스 헌들을 위해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아무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뿐이다.

저 두 문장이 이 책의 전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주디스 헌을 미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난하고 못생긴 데다 미혼이기까지 한 주디스의 인생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책을 읽는 내내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나 역시 주디스를 사랑하지 못한 채로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보통 책을 읽다 보면 주인공한테 무조건 과몰입하는 편이다. 근데 그런 나조차 술에 중독되어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버린 주디스가 이따금 너무 멀게 느껴졌다.

>>주디스가 잘 살았으면 좋겠어.. 근데 왜 자꾸 저렇게 행동하는거지..? 그치만 주디스가 미운 건 아니야... 그래도 내 친구는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았으면 좋겠어.. 대체 내 마음은 뭘까..?<<

이 상태로 계속 책을 읽었다. ㅋㅋㅋㅋㅋㅋ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 마음은 뭘까..? 사실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주변에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왠지 친해지기는 싫은 사람들이 종종 있다. 보통은 약자에 속하는 그 사람들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기분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면하자니 딱히 외면할 이유는 없어서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데 그렇다고 다가가기는 싫은.. 이런 모순된 내 마음을 마주보기가 싫어서 계속 마음이 불편했던 걸까? 책을 읽다 보니 장희원 작가님의 우리의 환대가 생각났다. 주디스도 우리의 환대 속 아들처럼 훌쩍 떠나버린 어딘가에서 자신을 환대해 주는 사람을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마지막까지 그 누구도 진심으로 주디스를 반겨주지 않았던 사회가 너무나도 무정하다. 그렇지만 제일 슬픈 사실은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 그렇기에 이런 소설들이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외롭게 느껴진다.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교양 수업을 대학교 다닐 때 들은 적이 있다. (ㅇㅈㅇ 교수님 잘 지내시죠..?ㅠ) 나는 대체 종교가 어떤 위안을 주길래 사람들이 그렇게 허황된 존재에 매일 기도하는지 항상 궁금했다. 저 수업을 들을 때 처음으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특히 불교 교리는 지금까지도 종종 생각나는 것들이 많다. 그렇지만 역시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대체 종교란 무엇인가..ㅋㅋㅋㅋ 그런 생각이 든다. 주디스는 그렇게 바라던 신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이유가 있었던 걸까? 주디스보다 훨씬 탐욕적이고 비도덕한 사람들이 훨씬 환대받으며 살아가는 그 현실이 내 상식에선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넷플릭스에서 봤던 폭격에서 전쟁으로 죽어가는 어린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신이 있는데도 왜 이런 전쟁이 일어나는 건가요? 수녀님이 대답했다. 신이 잠깐 연필을 떨어트려서 줍고 있을 수도 있다고. 신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너무 달라서 우리에겐 그 찰나가 이토록 길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다고. 주디스의 신도 잠시 연필을 줍고 있었던 걸까? 고작 연필을 줍는 사이에 내 삶이 그렇게 무너질 수도 있다면 우리가 신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어디 있는걸까.. 그런 생각이 든다. 주디스도 마지막엔 그런 생각을 했을까?




마지막 주디스의 말이 계속 생각난다.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주디스의 열정이 마지막까지도 외로웠다고 생각하면 쓸쓸하다.

치열하게 살아온 주디스의 삶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겁다. 그 외에도 책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 19세기 벨파스트에서 일어났던 문제들이 현대와 겹쳐 보이는 것도 유감스럽다. 말은 서로에게 닿아 언어가 되어 우리를 소통하게 만들어준다. 소통할 사람이 없던 주디스에게 남은 것은 외로운 독백뿐이라는 사실이 마지막까지 신경 쓰인다. 서로의 말이 언어가 될 수 있도록, 누군가 주변의 주디스 헌을 반겨줄 수 있는 사회가 찾아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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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보다 Vol. 1 얼음 SF 보다 1
곽재식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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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새로운 sf 단편집이 출판됐다. sf보다.. 첫번째 주제는 얼음.. 구경하다가 유명한 작가님들이 많이 참여했길래 꼭 읽어보고 싶었는데 우주 최고의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에서 가제본 도서를 보내주셨다. 우리 집에 정말 지독한 sf소설 광인이 살아서 나는 공상과학.. 우주.. 그런 책들을 많이 읽는 편이다. 그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책을 고르라면.. 천개의 파랑.. 천개의 파랑... 한때 나는 지독한 천개의 파랑 무새가 됐었다.. 그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주로 읽었던 sf소설은 애슐러 르귄.. 할란 엘리슨.. 그런 류의 외국 소설이 많았다. 작가의 상상력과 소재에 감탄하며 읽게 되는 그런 책들,, 그리고 그런 책들은 이미 고전 명작들이 너무 많아서 굳이 한국 작가의 책을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몇 년 전에 펀개의 파랑을 처음 읽고 이 책은 한국에서만 나올 수 있는 책이라고.. 한국에서 sf소설이 나온다면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혹시 나.. 뭐 돼..?)





  아무튼 그래서 천선란 작가님을 사랑하게 됐는데 새로운 단편을 미리 읽어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그리고 참여하신 다른 작가님들 중에도 유명한 분들이 많았는데 특히 박문영 작가님을 다시 봐서 신기했다. 귓속의 세입자를 읽는데 너무 재밌어서 작가님 이름을 찾아봤다. 처음 보는 작가님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몇 년 전에 읽었던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라는 단편집에도 참여하셨던 작가님이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내 기억력RIP.. 그때도 재밌다고 여기저기 추천하고 다녔었는데.. 잊고 있던 작가님을 다시 보게 돼서 너무 반가웠다.





  얼음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다양한 주제로 적힌 단편들이 나온다. 그중에서 제일 좋았던 단편은 구병모 작가님의 채빙이다. 원래 작가님의 소설은 따뜻한 느낌의 문장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얼음이라는 주제처럼 차가운 이미지의 표현들이 많이 나와서 새로웠다. 위로와 따뜻함을 주는 이야기를 많이 적는 작가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이야기도 잘 적으신다는 걸 알게 됐다. 구병모 작가님 비슷한 책 아시는 분 추천plz..


 주인공은 대체 누구일까 추측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너무 좋아서 한참 멈춰있었다. sf소설을 읽다 보면 냉동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렸거나 재난 상황에 인간을 얼렸다가 미래에서 깨어나게 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지금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 발명이 가져올 파장이나 기술에 대해 상상한 이야기는 많이 봤지만 생명을 멈춘다는 근본적인 행위에 집중한 소설은 처음 읽어서 너무 새롭고 좋았다. 프리저브드 플라워는 꽃집을 지나가다 보면 진열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말린 꽃과 달리 프리저브드 플라워는 이름 그대로 생화처럼 꽃의 느낌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꽃 내부에 수분 대신 특별한 용액을 넣어서 만드는 프리저브드 플라워는 겉으로 보기엔 생화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알 수 없는 용액으로 몸이 구성된 책 속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책 속의 주인공은 본인조차 본인의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피 대신 들어있는 용액이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스스로를 잃어버린 모습처럼 보인다. 프리저브드 플라워는 생화처럼 겉으로 보기엔 정말 아름답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어딘가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은 시들었다 다시 꽃을 피우는 일을 반복한다. 우리가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에는 이런 순환에서 느껴지는 경이로움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피고 지는 생명의 활동을 무시한 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멈춰진 그 물체를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생명이 가진 그 유한함이 현재를 더욱 가치 있고 소중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속이 텅 비워진 프리저브드 플라워처럼, 멈춰진채로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정말 행복한 일인지 생각해 봤다.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에 정말 이런 기술이 생긴다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될까? 이런 일들을 생각하다 보면 다가올 미래가 무섭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평소라면 하지 못할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있다는 게 sf소설을 읽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내가 제일 기대했던 천선란 작가님의 운조를 위한.. 붉은 눈의 생물과 토끼가 겹쳐지는 장면을 읽을 때 카페에서 눈물이 와르르르르..ㅠ 쏟아졌다..ㅠ 어릴 때 토끼의 죽음을 직접 경험한 뒤로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살던 운조,, 그런 운조가 로타를 통해 다시 삶과 연결되는 그 순간이 너무 아름다웠다. 공상과학 소설이라고 하면 로봇과 발전된 기계들의 모습이 막연히 떠오른다. 인공지능이 점점 발전하며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사회에 퍼져가고 있기도 하다. 그런 잔혹한 미래를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삶에 대한 예찬을 말하는 이 과학 소설이 너무 경이롭게 느껴져서 눈물이 났다. 역시 천선란 작가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sf소설이라는 단어와 얼음이라는 주제가 합쳐져서 나에게 이 책은 어딘가 차가운 이미지를 준다. 실제로 몇몇 단편은 그런 내용의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그런 이야기들도 너무 좋았다. 그렇지만 책의 마지막에 시작된 운조의 새로운 도전을 보면 내 마음도 조금은 뜨거워진다. 운조가 꼭 로타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내 꿈에서라도,,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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