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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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좋아한다. 아마 대부분의 애서가들이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 책을 '읽는' 것만큼 책을 '다루는' 것도 좋아한다. 책을 사모으고, 책장에 나만의 방식으로 배열하고, 그렇게 놓여진 책을 훑어보며 뿌듯해하고 책에 관한 메모들을 적어두는 것. 책의 내용과 형식 모두를 사랑하는 일. 그것을 떠올리며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벌써 뱃속이 간질간질한 긴장과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이런 자칭 책벌레인 내가, 언젠가 <독서의 기술>을 읽고 그 지루함에 놀란 적이 있었다. 분량이 얼마 되지도 않는 그 '책에 관한 책'을 읽으며 과연 내가 진정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가를 의심하기까지 했었는데, 이 <서재 결혼시키기>를 읽고, 그 이유를 알아냈다. 책을 읽는 일은 순수한 개인적 정신 활동이다. 그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행위를 타인들과 공유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 있어 책을 읽는 일이란, 책의 저자뿐 아니라 그 책과 관련된 모두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는 적어도 '책을 나만큼 좋아한다'는 사람이라면 일단 관심을 가지게 된다. 사람의 향기가 나지 않는 책의 책, 어떻게 읽느냐에 관한 얘기는, 원체 건조한 나조차도 그 꺼칠함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지점에서, 반대로 이 책의 미덕은 그런 것이다. 책에 관한 얘기이면서, 동시에 사람에 관한 얘기라는 것. 책을 무엇보다 사랑하지만, 사람과의 삶을 놓치지 않는 저자의 일상이 너무나 멋지다. 부모님이 작가였다는 행운도 빼놓을 순 없지만, 그건 단 한가지 조건일 뿐, 저자 자신이 글을 깨치고, 책을 가지고 놀고 낭독을 듣고 시를 쓰고 산문을 쓰고 공부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해주고……. 내가 아는 한 사람 간의 아름다운 만남의 최선은 서로를 북돋워가며 끝없는 지성의 길로 달려가는 모습이다. 사람이 사고를 하고 삶을 사는 데 지성을 추구하는 일보다 더 사람다운 일은 없는 것 같다. 아니 이렇게 거창하게 지성 운운할 것도 없이, 한 가족이 책에 둘러싸여 책을 가지고 놀며 성장하고 토론하고 뭔가를 나누는 모습, 인간이라는 공통점 외에 서로를 가르는 기준없이 만나는 이 모습은 너무나 따뜻하다.

더불어 이 책을 읽는 누구나가 느낄, 저자의 재치있으되 냉소적이지 않은 유머와 지적 탐구심과 애교는 붙잡은 즉시 책을 '먹어치울' 수 있게 하는 맛깔스러운 천연조미료다. 오랜만에, 골방에 처박혀 책에 파묻히고 싶게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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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수희 옮김 / 열림원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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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끔 하루키의 소설이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사람들의 관계에 치이거나 일들이 복잡하게 얽혀버릴 때, 특히 마음 속 감정들이 모두 일어나 소용돌이를 이룰 때 그렇다. 하루키의 소설은 늘 단순하면서 간결하고, 사람 마음을 온건하게 가라앉혀준다. 마치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하루키의 다른 소설에서처럼, 여기에서도 그의 냄새가 물씬 난다. 혼자 사는 30대 중반의 남자 '나', 끊임없이 등장하는 맥주와 와인들, 가만히 있는 '나'에게로 접근하는 여자들, 옷입는 양식과 요리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 오래된 영화와 소설들. 삶을 이루는 '디테일'에 대한 이러저러한 그의 '법칙들'은 마치 따라하기를 은근히 요구하는 권유처럼 보인다. 물론 그는 아무 의도도 없다 하겠지만. 어쨌건, 그럴듯해 보이도록 입고 먹고 보게 만든다. 그래서 이런 구체적 품목들을 내 실제 생활에 써먹으면서 나는 '하루키'를 아주 쉽게 만끽할 수 있게 된다. 아주 작은 하루키의 미덕이랄까.

하루키 소설에는 대체로 단조롭던 삶을 크게 바꾸는 기/발/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특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제목도 의미심장한 이 소설에서도 우리의 생각 너머에 있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이 강렬한 어떤 일임에 분명하지만, 절대 내게 혼란이나 복잡함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늘상 결말이 하루키식의 '그저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지요'하는 담담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아무럴 것도 없는 일인 것이다. 세상사는 대체로 호들갑일 뿐이라는 듯. 그러나 그것이 곧 'nothing happened'라는 것은 아님을, 읽는 우리는 책을 덮을 때쯤엔 알게 된다.

항상 두터운 완충제를 몸에 두른 듯, 그(인지 '나'인지)는 담담하다. 마치 마음 속의 티끌 하나를 응시하는 듯. 이 소설도 그렇다. '세계의 끝'이라는 곳도 실은 어느 특정한 장소라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의식이 만들어낸 완벽한 마음의 장소다. 그리고 '나'는 결국 탈출을 포기한다. 결국 한 개인은 자신이 만든 그 곳에서 높다란 벽에 둘러싸인 채, 심지어 존재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 영원히 살아가고 있다. 그 곳에는 모든 것이 있지만, 또한 아무 것도 없다. 타인도, 자아도, 감정도, 죽음도. 들어갈 수는 있지만 빠져나올 수는 없는 곳.

개인에게 지금 현세는 얼마나 달콤한가. 모든 것이 있기에 아무 것도 없으면서 불행하지 않다. 빠져나올 수 없지만 그것은 당연한 사실이기에 그저 잠깐 씁쓸할 뿐, 불행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유토피아를 머릿 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재미일지도 모른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지칭되는 생활에서 잠시 지친 육체와 영혼이 세계의 끝을 꿈꾸는 것. 모두들 각자의 순수한 구멍을 파는 곳. 목적이 없는 행위, 진보가 없는 노력,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는 보행이 있는 곳. 그래서 아무도 상처입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으며 아무도 앞지르지 않고 누구에게도 추월당하지 않는다. 이것이 멋지다고 생각되는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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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3
장정일 지음 / 하늘연못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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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3

장정일은 너무나 흥미로운 작가이다. 사디즘의 원초작가라는 등의 평가는 그닥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를 너무나 좋아한다.

그의 소설은 사실 전혀 끌리지 않는다. 그가 독서일기 중간중간에 밝히는 그의 소설에 대한 해설만 읽어보아도 충분하다. 그는 자기모멸에 대한 연작시리즈를 썼으며 몇 년전에 판매금지된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마지막이라고 했던 것 같다. 나는 그의 주제가 '자기모멸'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겐 충분한 영감을 주며, 애써 시간을 들여 그의 소설을 읽고 싶지는 않다. 또한 그가 자주 사용하는 사도 마조히즘에 대해 상식 이상으로 알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그것의 소설화는 더욱 보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의 해석 혹은 그의 시들, 잡문이 더욱 좋다.

고로 나는 그의 독서일기를 너무도 즐겁게 읽었다. 남들은 뭐라건 나는 그가 최대의 행복을 누리며 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일년에 읽어대는 그의 책들이 전부 그의 행복이며 그가 이 세상에서 하고싶은 일이다. 혹자는 남이 읽은 2차적인 글을 읽을 것이 아니라 그 원본을 보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느냐고 하나, 그것은 원본콤플렉스로 설명되는 하나의 강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독서일기를 읽으면서 나도 이런 일기를 쓰고프다는 질투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그보다 더 이런 2차적인 읽기를 통해, 즉 그의 해석을 통해 책들을 읽는 것 자체도 하나의 독서라고 생각되며 어차피 내 주관이 있고 스스로의 읽기 능력이 있는 한 내가 원본을 읽을 경우에도 결코 그의 언설에 넘어가서 그것이 내 고정관념이나 일차적인 꺼풀이 되지는 않으리라 확신한다. 오히려 내 경험상으로, 독서 후에 끌렸던 책을 읽고 비교해가면서 그가 주목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 더욱 절실히 느끼고 더불어 나의 다른 관점에서 보는 그 책의 평가와 비교하는 것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다들 책읽기는 최고의 취미이자 지식인-우리 나라 모든 부모들이 자식에게 되기를 바라는-이 되기 위한, 혹은 교양인이 되기 위한 기본코스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책읽기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거부감도 없고 오히려 장려되어 마땅하다 생각되지만 사람들의 그 만사형통이라는 책의 편견에는 반대한다. 또한 책을 읽고난 후에 좋았다, 재미있다로 도배된 서평도 저주한다. 아무리 텍스트가 기원적인 목적과 주제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 주제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과 평가의 스펙트럼이 나올 수 있을진대, 그것을 통한 책의 선별에는 무관심하다. 또한 그 책 자체의 훌륭함만 칭찬할 뿐, 그것을 양식삼아 일어나는 독서자의 변화에는 대체로 너무도 rough하다.

고로 나의 이러한 의견에 동감하는 사람이라면 장정일의 독서일기 씨리즈를 충분히 즐길 수 있으며 또한 그 씨리즈의 4권까지밖에 없음이 쉬울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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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 아동용 사계절 아동문고 40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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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화가 싫었다. 의당 그래야 할지도 모를 유치하다면 유치한 문체와, 하나의 결점도 없이 완벽하게 착한 주인공, 항상 이유도 없이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들. '동화'라는 어감이 주는 위선과도 같은 몽환감도 막연히 거부했다. 말하자면 동화란 진실로 어린이를 위한 책이 아니라 공정하지 않게 세상의 선과 악을 가르고 선이라 이르는 것들을 미화시키는, 위선자들이 써대는 거짓말이나 자기위안으로 이해했다.

책을 고를 때도, 이런 나의 구미에는 '마당을 나온 암탉'같은 반항적인 캐릭터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을까 여겼다. 나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나 보다. 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음을 알아채고 그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이루기 위해서, 남과 다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는 좁은 닭장을 뛰쳐나와 소망이었던 알을 품어 마침내 깨워낸 잎싹! 그녀의 행동은 무의미한 충동에 의한 반항이 아닌, 절실하게 원한 자신의 삶을 이루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이었다. 필요한 양을 훨씬 넘는 자유와 넘쳐날 뿐인 음식과 옷을 가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그것들이 어떻게 해서 나에게 주어진 과분한 선물인지를.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이 이야기의 미덕은 모든 독립된 개체의 삶이 존재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닐까. 잎싹이 주어진 닭장 속의 삶을 거부하며 먹이를 찾아헤매는 어미일 때, 역시 족제비도 잎싹처럼 자식을 먹여살려야만 하는 어미였다. 더욱이 눈도 뜨지 못한 연약한 새끼들. 족제비가 마당식구들을 노리고 있을 때의 긴장과 초조함은 잎싹이 초록머리를 지켜줄 때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족제비에게도 삶이 있으며 잎싹이 잡아먹는 작은 땅 위의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뿐이랴. 심지어 양계장 속의 닭들 중 누군가는 잎싹이 알지 못했던 행복을 누리며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도 있으리라. 그 닭들에 대해서 괜한 우월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것을 잎싹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냉소적이며 감상에 있어 무딘 내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감동깊게 읽은 부분은 초록머리와 잎싹의 헤어짐이었다. 마치 한 몸에 붙은 두 개의 머리처럼 비록 낳아주고 길러준 엄마일지라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헤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어린 초록머리도 서서히 알아챈다. 자신의 삶을 위해 노력해온 잎싹이 그 필연적인 헤어짐을 모를 리 없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곧 초록머리가 원하는 바는 아니며 초록머리에게도 살아가야 할 삶이 있음을 인정하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떠나보냄을 아프게, 아프게 겪어낸다.

어느 부모와 자식간의 헤어짐이 이와 같지 않을까. 자식이 보호와 양육을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부모가 얻는 댓가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존재'라는 스스로에 대한 허무함과 허전함일 테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자식의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무력감까지 얻게될 지도 모른다. 독립한 뒤 내가 누릴 자유와 갖게될 나만의 세계에 도취되어 있던 내게, 미안함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을 안겨주는 대목이었다.

내가 가졌던 편견을 깨고 동화를 열린 눈으로 바라보게 해준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무기는 공정함이다. 먹는 족제비나 먹히는 암탉, 갇힌 닭이나 돌아다니는 닭, 집오리나 무리 지어 옮겨 다니는 청둥오리. 그 누구도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존재가 아니며, 그 모두의 삶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든 각자는 살아가야 하는 법이라는 존재의 공정함과, 떠나는 자만이 신나고 자유롭거나 혹은 떠나보내는 자만이 외롭고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감정과 관계의 공정함을, 동화라고 해서 얘기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이 동화는 부드럽고도 찬찬히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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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나남창작선 29 나남신서 10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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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박경리하면 읽은 '토지'에 비추어서만 판단하고 짐작해왔고, 다른 책을 읽어볼 필요성을 느끼던 차, '장정일의 독서일기3'에 하필 첫 책으로 이 책이 올라있었음은 독서의욕을 더욱 촉발시킨 동기라 하겠다.

사람이 허구를 가정한다는 것은 경험의 한계가 있는 것인지 역시 이 소설도 토지와 매우 비슷하다. 우선 한 가문의 몰락이 중심 제재라는 것부터 최치수나 김약국같은 조용하면서 고집센 노인, 그 주변에는 언제 어디서나 드글거리는 탐욕스러운 인간무리들, 또한 사랑에 의한 여러 엇갈린 인간관계와 그들의 인생, 다양한 부모 자식의 형태,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유사점은 몰락을 회생시키거나 그나마 가문을 건재하도록 하는 열쇠를 쥔 마지막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과 출생에 대한 어두운 비밀과 그에 기인한 고통스럽게 붙박힌 개인의 삶이 길게 깔려있다는 점이다.

내가 박경리의 소설을 읽고 싶어하는 이유 중 가장 우선하는 것은 난무하는 사투리다. 토지를 읽을 때도 느꼈던 한 가지 의구심은 도대체 이 지방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이 소설을 무슨 맛으로 읽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진한 사투리로, 그 단어와 그 어투가 아니면 안되는 간결한, 뉘앙스를 가지는 말들의 잔치다.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하게 말하는 그들의 말들을 보면서 정말이지 나는 매 순간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물론 그 말이 아니더라도, 박경리가 만들어내는 그 다양하고도 하나같이 다른 그 인물들은 활력을 가진다. 어느 하나 두리뭉실한 인물이 없이, 모두 또렷하다. 욕심이 있건, 포악하건, 착하건, 되바라졌건 간에 나름대로 할 말이 있는 성격의 일관성과 개성이 있다. 그 모두가 박경리의 손바닥 안에서 노니는, 제각각의 분신들이다.

박경리는 항상 아주 미약하지만 가녀리게 숨쉬는 희망을 보인다. 그는 진정한 강자에 대한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폭력이나 힘을 뛰어넘는, 조용한 인간의 힘에 굉장한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서희나 김약국의 둘째 용빈이 대표적인 인물들. 그들의 차분함과 냉정함, 이성과 사고의 힘, 그 뒤에 숨은 유약함과 애정들, 책임감. 보이지 않는 강한 힘을 은연 중에 내포하면서 이야기를 결론 짓는다.

무엇보다 박경리가 내게 읽히는 이유는, 나의 끊을 수 없는 관심사인 '가족'이다. 근원적이며 가장 원초적인, 노골적인 욕망들이 넘실대는 그 곳의 이야기들. 모든 사회와 조직는 이 가족들의 확대화에 지나지 않는가. 생활에 밀착해 있어 가장 리얼하기에, 내가 내 삶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에 부닥칠 때 가장 명확하게 비교하면서 생각해보게 만드는 그 소설들.

덤으로 장정일의 이 책에 대한 짤막한 서평에 대해 언급하자면, 장정일은 토지를 필히 읽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장정일이 언급한 p.242-250의 확장에 대해서 전혀 공감할 수 없다. 그 부분은 박경리의 소설에 있어서 아주 미세한 디테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의 말대로 그 부분이 더 많은 소설이었다면 새로운 소설이 되었을 망정, 박경리를 내게 또렷이 부각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박경리는 집합적인 민중의 힘이나 국가에 대해서보다, 한 개인의 힘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과 기대를 보이기 때문이다.

약간 서두가 급하고 너무 간략한 것이 숨이 가쁘나, 중세의 영화처럼 고고한 맛을 느끼고 싶다면 필독할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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