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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칼 세이건이 인류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
칼 세이건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12월
평점 :
에필로그. 마지막에 쓰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노년의 과학자가 세계를 조용히 관망하면서 치열한 논변 사이 사이에 생략해 놓은 감상들, 감동적인 단상들을 쓴 책일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책은 과학, 응용과학 및 연관 제분야을 대중에게 이해시키고자 쓴 어렵지 않은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중 가장 마지막 챕터인 '에필로그'는 자신의 죽음이 닥쳐왔을 때 느꼈던 주변사람에 대한 소중함 등을 적고 있는데 몇페이지 안되고, 책이 나오기 전 '감사하다'라는 글 정도의 비중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다.
주요 내용은 1부 : 우주의 신비에 대해서 밝혀진 것들(전문 과학적 용어를 동원하지 않고!)을 쉽게 설명하고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있으며, 2부 : 인간이 가져온 환경적 재앙의 원인 및 해결의 큰 원리들, 3부 : 과학이 사회와 정치(가장 크게는 핵무기와 관련된 사항) 및 윤리적인(낙태 및 전쟁의 문제) 문제에 개입되는 방식을 세련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낙태에 대한 챕터(15장)는 분석적인 전통에서 어떠한 주장의 한계와 함축이 무엇인지 검토하면서(인간을 죽이는 것과 생명을 죽이는 것에 대한 구분,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규준 마련 등) 이와 동시에 정치, 역사적 맥락(낙태가 불법으로 공론화된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으며, 낙태를 반대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스탈린과 히틀러라는 사실 등) 역시 놓치지 않고 있다. 무척 인상적인 논리 전개 방식이었다.
인상적인 챕터를 더 꼽자면, 14장 공동의 적은 미국과 (구)소련에 동시 발표된 에세이인데, 양국 어느 나라도 비난에서 면죄될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통쾌!하다. 거기다 소련에서 어떻게 검열했는지도 첨부되어 있는데, 그것 역시 허탈한 재미를 준다.
16장 게임의 법칙은, 도대체 어떤 행동이 옳은 행동인가, 선한 행동인가, 우리는 어떤 행동을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다루는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적 입장의 철학자들처럼, 그는 이 문제를 '어떤 행동이 유용한가'라는 문제로 대체하는 것 같다. 사실 처음 서두 부분의 몇 문장에 크게 비중을 두지 않는다면 그의 문제의식이 애초부터 '옳음과 유용함'이 아니라 '어떤 것이 유용함'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게 바람직하다. 바람직하다기보다 글이 더욱 정합성을 갖게 된다. 만약 유용함으로 선함을 대체하려고 의도했다면, 그 부분의 논변은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 챕터는 게임 이론을 설명함으로써 개인과 개인 뿐만 아니라 국가 대 국가의 보편적 행동 규범에 힌트를 주려는 것 같다. 그것도 우려를 잊지 않고서 말이다. 그는 아주 정직한 이론가이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본 부분은 3부(14장 공동의 적, 15장 낙태에 대한 찬반 논쟁, 16장 게임의 법칙, 17장 전쟁과 평화, 18장 혁신의 세기)이지만, 이 책의 가장 주요한 부분은 환경을 다루는 2부이다. 이미 십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 독자 대부분이 프레온이나 온실 가스 등 많은 내용을 이미 접했을 것이다. 그런데 참신함이랄까, 그의 세계관을 언뜻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환경 문제는 인류가 저지른 범죄인데, 이 문제는 전세계적인 문제라서, 해결되기 위해서는 전 인류가 한 뜻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를 한 마음으로 만드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앞장에서는 우주를 논하며 인간이 우주에서 얼마나 작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그 다음장에서는 인류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범죄와 실수를 많이 저질렀는지 보여주었지만, 그의 기본적인 관점은 자신이 속한 나라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인간 중심적이지 않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바라고 생각한다.
그는 무신론자다. 확실하다.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그가 죽음에 거의 대면했을 때, 많은 종교인들이 그를 위해 기도했다는 것이다. 에필로그 챕터를 얼핏 보면, 그는 죽음 앞에서 완벽하게 의연하지는 못했지만, 용기있는 무신론자답게 죽음을 받아 들였던 것 같다. 잠깐, 누구더라, 죽음 앞에서 의연했던 유명한 무신론자이자 빼어난 지성인이었던 사람이. 아, 맞다. 바로 데이비드 흄이다.
전체적으로 아주 교육적인 책이다. 과학 교양서적으로는 아주 휼륭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목이 적절하지 못하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회고나 감상의 성격은 이 책에서 거의 없다. 정확한 자료, 빈틈없는 논변, 현실적이며 긍정적인 전망 등이 책의 대부분을 이룬다. 나는 다음 부분을 인용하면서 리뷰를 마치려 한다. 이 책에 거부감을 느낄 잠재적 독자들은 이 부분을 읽으며 칼 세이건과 그의 입장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에게 가장 괴로웠던 과학 혁명의 부산물은 아마도 우리에게 대단히 소중했고 커다란 위안이 되어 주었던 지구와 인간 중심의 믿음의 붕괴된 것일 것이다. 작고 아늑한 고대 원형 극장의 무대는 이제 차갑고 썰렁하고 광대무변한 우주 공간으로 바뀌어 버렸고 그 속에서 인간은 평민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광대한 우주가 출현하는 것을, 그리고 그 우주에는 우리의 조상이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질서가 내재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주가 몇 개의 자연 법칙에 의해 이해 될 수 있다면, 신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든 자연을 지탱해 주는 특별한 이성을 바로 그 법칙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