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 How To Read 시리즈
레이 몽크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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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 투 리드 비트겐슈타인

신비적인 철학자라기보다 신비스럽게 포장된 이 철학자를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레이 몽크는 그의 철학을 연대기적으로 구성하여 첫 번째 글 “캠브리지 리뷰”부터 마지막 글 “철학적 언급들”까지 배열하고 있다.

논리 실증주의를 주장한다고 간주되는 “논리철학논고”의 주장은 이러하다. 언어에는 논리적 구조가 있으며, 이를 통해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단어는 대상을 반영하며, 명제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세계는 사실의 총합이고, 우리의 언어는 명제의 총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 이는 사실이 아닌 것은 명제로 표현될 수 없으니 표현하려 하지 말라는 뜻이다. 윤리적 사실, 미적 사실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언급하는 명제 역시 의미가 없다. 철학적인 사실 따위도 없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다음 치워 버리라는 은유를 사용한다.

후기 철학에서는 “명제가 사실의 반영”이라는 주장을 반대하며, 명제들(단어들)이 다양하게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름명사처럼 ‘대상-단어’의 구조로 모든 명제를 환원하려고 한 것은 과학주의에 의해 추동된 소견일 뿐이다.

사적 언어에 대한 주장은 이렇다. 그것은 고통같은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가 화자에게만 알려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가 고통받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가에 대해서 가지는 의문을 해결하려 한다. 답은 이렇다. ‘안다’라는 어휘의 일상적 용법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상자 속에 딱정벌레를 넣고 그것을 봄으로써 대상을 아는 것처럼, 우리의 언어를 대상-단어 식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명시적 정의나 지칭 대상으로 언어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타인의 고통을 아는 것은 문제가 된다. 그러니까 전제를 버리라는 것이다. 애초에 ‘믿음’ ‘욕망’ ‘고통’ 등은 공적인 용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감각 지각’자체는(소여는, 고통을 표현하는 언어 말고) 아무것도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그것들은 무언가도(언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닌것도 아니다. “결론은 그저 아무것도 말해 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낫다. 우리를 여기까지 밀고 온 문법을 거부했을 뿐이다.”

그는 후기 저작 철학적 탐구 2부에서 과학적 문화와 대립시키는 예술적 문화에 대해 언급하고, 계량적 증거에 반하는 비계량적 증거를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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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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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 아는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소설이 있다. 과연 그 녀석이 아들일까? 사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뇌에 꽃이라도 심어놓으려는 듯이 묘사는 소설에서 계속된다. 그 묘사들은 당시의 비참함과 어울려 무언가 숙연하면서도 운명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폴 오스터 소설에 나타나는 우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가 게으른 작가라서? 아니면 빌어먹을 유에프오나 신봉하는 멍청이라서? 아니다. 그는 우연을 신뢰하며, 우리의 삶에서 그것을 왜 제외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싫어한다. 수십년을 살면 누구나 우연이지만 정말 기막힌 일을 겪는다. 그리고 바로 그것들이 이야깃거리가 된다.

하지만 우연을 자연스럽게 - 필연적으로 엮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삶의 '그럴 수 있는 일상이라고' - 표현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는 끊임없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그 간극을 매워낸다. 신비하고 기억하게끔 되는 현실의 우연과 수백 페이지 안에서 생산되는 싸구려 이벤트 사이의 간극을.

죽음이 가까워진 나이, 아내와 이혼하고 하나뿐인 자식과 싸운 주인공은 상처입은 개처럼 브루클린으로 기어들어온다. 그리고 이 곳에서 또 다른 삶, 첫번째 삶 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일을 겪는다. 주인공의 처지는 한껏 고양되었다가 나락으로 다시 떨어지고, 회복할 길 없어보이는 그곳에서 다시 한번 몸을 추스린다.

그러니까 이 소설을 어찌될지 뻔하다라고 여기는 독자가 있다면 - 폴 오스터에 대한 옆다리 평가만 듣고 - 난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싶다. 서점에 오지 말라고. 인터넷 서점을 포함해서. 도대체 뻔한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고난을 극복한 결말, 결국에 실패한 결말, 이 둘은 exclusive한 관계라서 모든 이야기는 이 둘에 귀결된다. 이는 빨간 사과와 그렇지 않은 사과가 세상에 있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모든 사과의 생김새가 틀리고 미묘하게 맛이 틀리고 좋은 사과와 그렇지 않은 사과가 있는 것처럼, 소설 역시 마찬가지이다. 폴 오스터는 '우연의 음악'외에는 불행하게 결론 짓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실은 내가 그를 좋아하는 두번째 이유이다.

첫번째 이유는? 서술자의 독백. 난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다. 세상을 다 꿰어차고 있으면서도 실패를 거듭하는, 나쁜일이 무엇인지 알면서 남을 단죄하지 않는, 예의를 알면서 무례하게 구는 그들의 독백을 듣고 있노라면, 난 문득 - 독서 중에도 - 소설 밖으로 나와 폴 오스터를 한번 만나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와 악수를 하는 상상을 한다. 난 신Shin이오. 난 폴Paul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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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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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이 소설을 두고 작가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 어쩌구 들이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의 수준이 의심스럽다. 작가가 불행했든지 아니든지, 왜 그것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작가와 이 책의 관계에 대해 내가 아는게 있다면, 작가의 배경이 이 책을 평가 절하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커트코베인이 자살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어도 그의 음악은 여전히 훌륭하다는 사실과 다를바가 없다.

이 소설의 아름다움(!)은, 내 생각에는, 보여주기를 통한 묘사다. 끊임없이 이상한 이미지나 들이대면서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해대는 소설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여운들, 어려운 말들이나 지껄이는(작가는 무언가 알면서 이런 말들을 내뱉는 것일까?)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으면서는 불가능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기발함 등등이 이 소설에는 가득 차 있다. 대표적으로는 '호밀밭의 파수꾼'도 그렇고 '앨리의 시가 적힌 야구 글러브' '장기판에 떨군 눈물'  '변호사에 대한 욕' 등등 한두가지가 아니다.

당신이 인정하고 싶든 그렇지 않든, 이런 소년들은 많다. 홀든 같은 표현력을 가진 이는 드물겠지만, 그리고 그처럼 순수한 이도 드물겠지만, 많은 소년들, 많은 성숙한 소년들이 방황을 한다.  당신이 방황에 대해서는 병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라도, 그쯤은 알 것이다. 이 소설은 선생의 매나 일시적인 사회의 관심, 동정, 역겨운 이해심보다 훨씬 더 나은 방황과 고뇌의 치료약이다. 외롭지 않다는 것만큼이나 힘이 되는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이 소설은 교양소설이다. 한 청년이 성숙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당신이 좋아하는 방식 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방황하고 극복하고 사회적으로는 큰 성공을 못하지만 결국은 자아를 실현하고 순수한 사랑을 얻는 그런 소설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류의 교양소설보다 더 현대적이고, 더 도시적이고, 더 재즈적이다. 그런 류의 소설보다 더욱 그런지grunge하고,  더욱 신선하며, 무엇보다, 더욱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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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wasulemono > 지적 엄정성과 정당성으로 본 문학비평

90년대 이후 우리 문학비평은 시류나 정치적 동향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지금까지 지겹도록 언급되어온 얘기를 여기서 입 아프게 반복할 생각은 없다. 우리 문학비평은 맑시즘을 건너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생태학주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등 전공자가 아니면 선뜻 이해할 수 없는 각종 주의에다 푸코, 들뢰즈, 크리스테바, 비트겐슈타인 같은 이론가들의 이름들을 무수히 건너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수한 주의와 이론가들에 대한 섭렵과 언급이 과연 지적 엄격성과 현실적 정당성을 깊이 캐묻는 방식으로 이뤄져왔는가. 여기서 이 책은 시작하고 있다.

저자 김영건은 영미분석철학 전공자답게 논리적 엄격성이라는 난마같은 도구를 가지고 우리의 문학비평에 대해 비판적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가라따니 고진의 글을 표절했다는 의혹으로 곤혹을 치른 문학비평의 대가 김윤식에 대해서는 그의 지적 고민의 근저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그의 논의가 지적 엄격성과 논리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각종 현란한 어구로 말의 성찬을 늘어놓는 식의 젊은 비평가들의 문학비평에 대해서도 날라리같은, 그 플라넬같은 성격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책을 읽으면서 동감하는 부분이다. 해마다 문학비평은 그 현실적 정당성에 대한 캐묻기를 생략한 채 마치 유행에 따라 철지난 옷을 벗어던지듯 새로운 것만을 향해 나갔다. 물론 사유는 항상 새로운 것에 목말라 하고 학문적 논의가 반드시 현실과 정확히 부합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문학비평은 김영건의 비판에서 상당 부분 자유롭지 못하다.

또 하나 이 책에서 주목을 요하는 부분은 김영민을 시발로 한 탈식민주의적 글쓰기에 대한 비판이다. 다만 여기서는 김영민의 글이 주 대상이라서 조한혜정같은 사람의 논의에까지 정당성을 가진 비판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한때 논문중심주의에 갇힌 우리 학문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새로운 글쓰기를 주창해서 참신한 느낌을 주던 김영민의 생각이 여기서는 무참히 깨지고 있다. 김영민의 진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김영민 자신도 논문이라는 형식 자체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지나치게 안일하고 폐쇄적인 성격을 띤 학문 풍토를 비판하는 매개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라는 그의 저서에서도 얼핏 느끼는 것이지만 그와 같은 김영민 식 글쓰기 자체의 가치도 상대적임을 면치 못한다. 우리 현실에 기반한 학문은 중요한 가치지만 그렇다고 학자가 논문 형식에서 벗어난 수필류의 글만 쓴다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섣부른 탈식민성이 오히려 알맹이 없는 잡담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과연 우리가 바랄 바인가? 루카치나 아도르노같이 논문 형식을 탈피하면서도 논문 이상의 의미를 담은 자유로운 글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적 엄정성과 상당한 공부가 수반되어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김진석처럼 섣불리 대가 흉내를 내는 것에 대해 김영건씨도 지나가면서 비판했지만 나 역시도 같은 느낌이다.

김영건은 요즘들어 가장 주목받고 있는 생태문학과 생태주의에 대해서도 그 논의의 엄정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지적 사대주의와 그 대척점에서 생태주의가 지적 엄정함을 상실하며 낭만주의적 유아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우려때문이다. 그런데 그보다 비중이 덜하지 않은 페미니즘이나 90년대 이후 독자적인 입지를 굳힌 신보주의적 동양주의 문학비평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의아함을 던져준다. 저자 자신의 관심 분야가 아니기 때문일까. 아니면 준비 부족 탓일까. 이 책에서 보여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저자에게 신뢰를 느낄 수 있지만 특히 페미니즘에 대한 전적인 침묵은 저자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유보하게 만드는 맹점이다. 검증할 수 없는 탓이다.

김영건은 문학 비평에 대해서 할 말을 했지만 문학비평가 그 누가 나서서 이 성실한 비판에 답을 해줄까. 기다려보자. 아마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명의 논객을 상대하기 귀찮아서이거나 누구나 가진 약점에 대해 고달픈 변명을 늘어놓기 뭐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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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칼 세이건이 인류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
칼 세이건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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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마지막에 쓰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노년의 과학자가 세계를 조용히 관망하면서 치열한 논변 사이 사이에 생략해 놓은 감상들, 감동적인 단상들을 쓴 책일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책은 과학, 응용과학 및 연관 제분야을 대중에게 이해시키고자 쓴 어렵지 않은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중 가장 마지막 챕터인 '에필로그'는 자신의 죽음이 닥쳐왔을 때 느꼈던 주변사람에 대한 소중함 등을 적고 있는데 몇페이지 안되고, 책이 나오기 전 '감사하다'라는 글 정도의 비중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다.

주요 내용은 1부 : 우주의 신비에 대해서 밝혀진 것들(전문 과학적 용어를 동원하지 않고!)을 쉽게 설명하고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있으며, 2부 : 인간이 가져온 환경적 재앙의 원인 및 해결의 큰 원리들, 3부 : 과학이 사회와 정치(가장 크게는 핵무기와 관련된 사항) 및 윤리적인(낙태 및 전쟁의 문제) 문제에 개입되는 방식을 세련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낙태에 대한 챕터(15장)는 분석적인 전통에서 어떠한 주장의 한계와 함축이 무엇인지 검토하면서(인간을 죽이는 것과 생명을 죽이는 것에 대한 구분,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규준 마련 등) 이와 동시에 정치, 역사적 맥락(낙태가 불법으로 공론화된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으며, 낙태를 반대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스탈린과 히틀러라는 사실 등) 역시 놓치지 않고 있다. 무척 인상적인 논리 전개 방식이었다.

인상적인 챕터를 더 꼽자면, 14장 공동의 적은 미국과 (구)소련에 동시 발표된 에세이인데, 양국 어느 나라도 비난에서 면죄될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통쾌!하다. 거기다 소련에서 어떻게 검열했는지도 첨부되어 있는데, 그것 역시 허탈한 재미를 준다.

16장 게임의 법칙은, 도대체 어떤 행동이 옳은 행동인가, 선한 행동인가, 우리는 어떤 행동을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다루는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적 입장의 철학자들처럼, 그는 이 문제를 '어떤 행동이 유용한가'라는 문제로 대체하는 것 같다. 사실 처음 서두 부분의 몇 문장에 크게 비중을 두지 않는다면 그의 문제의식이 애초부터 '옳음과 유용함'이 아니라 '어떤 것이 유용함'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게 바람직하다. 바람직하다기보다 글이 더욱 정합성을 갖게 된다. 만약 유용함으로 선함을 대체하려고 의도했다면, 그 부분의 논변은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 챕터는 게임 이론을 설명함으로써 개인과 개인 뿐만 아니라 국가 대 국가의 보편적 행동 규범에 힌트를 주려는 것 같다. 그것도 우려를 잊지 않고서 말이다. 그는 아주 정직한 이론가이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본 부분은 3부(14장 공동의 적, 15장 낙태에 대한 찬반 논쟁, 16장 게임의 법칙, 17장 전쟁과 평화, 18장 혁신의 세기)이지만, 이 책의 가장 주요한 부분은 환경을 다루는 2부이다. 이미 십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 독자 대부분이 프레온이나 온실 가스 등 많은 내용을 이미 접했을 것이다. 그런데 참신함이랄까, 그의 세계관을 언뜻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환경 문제는 인류가 저지른 범죄인데, 이 문제는 전세계적인 문제라서, 해결되기 위해서는 전 인류가 한 뜻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를 한 마음으로 만드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앞장에서는 우주를 논하며 인간이 우주에서 얼마나 작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그 다음장에서는 인류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범죄와 실수를 많이 저질렀는지 보여주었지만, 그의 기본적인 관점은 자신이 속한 나라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인간 중심적이지 않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바라고 생각한다.

그는 무신론자다. 확실하다.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그가 죽음에 거의 대면했을 때, 많은 종교인들이 그를 위해 기도했다는 것이다. 에필로그 챕터를 얼핏 보면, 그는 죽음 앞에서 완벽하게 의연하지는 못했지만, 용기있는 무신론자답게 죽음을 받아 들였던 것 같다. 잠깐, 누구더라, 죽음 앞에서 의연했던 유명한 무신론자이자 빼어난 지성인이었던 사람이. 아, 맞다. 바로 데이비드 흄이다.  

 

전체적으로 아주 교육적인 책이다. 과학 교양서적으로는 아주 휼륭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목이 적절하지 못하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회고나 감상의 성격은 이 책에서 거의 없다. 정확한 자료, 빈틈없는 논변, 현실적이며 긍정적인 전망 등이 책의 대부분을 이룬다. 나는 다음 부분을 인용하면서 리뷰를 마치려 한다. 이 책에 거부감을 느낄 잠재적 독자들은 이 부분을 읽으며 칼 세이건과 그의 입장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에게 가장 괴로웠던 과학 혁명의 부산물은 아마도 우리에게 대단히 소중했고 커다란 위안이 되어 주었던 지구와 인간 중심의 믿음의 붕괴된 것일 것이다. 작고 아늑한 고대 원형 극장의 무대는 이제 차갑고 썰렁하고 광대무변한 우주 공간으로 바뀌어 버렸고 그 속에서 인간은 평민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광대한 우주가 출현하는 것을, 그리고 그 우주에는 우리의 조상이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질서가 내재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주가 몇 개의 자연 법칙에 의해 이해 될 수 있다면, 신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든 자연을 지탱해 주는 특별한 이성을 바로 그 법칙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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