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누구나 다 아는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소설이 있다. 과연 그 녀석이 아들일까? 사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뇌에 꽃이라도 심어놓으려는 듯이 묘사는 소설에서 계속된다. 그 묘사들은 당시의 비참함과 어울려 무언가 숙연하면서도 운명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폴 오스터 소설에 나타나는 우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가 게으른 작가라서? 아니면 빌어먹을 유에프오나 신봉하는 멍청이라서? 아니다. 그는 우연을 신뢰하며, 우리의 삶에서 그것을 왜 제외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싫어한다. 수십년을 살면 누구나 우연이지만 정말 기막힌 일을 겪는다. 그리고 바로 그것들이 이야깃거리가 된다.

하지만 우연을 자연스럽게 - 필연적으로 엮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삶의 '그럴 수 있는 일상이라고' - 표현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는 끊임없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그 간극을 매워낸다. 신비하고 기억하게끔 되는 현실의 우연과 수백 페이지 안에서 생산되는 싸구려 이벤트 사이의 간극을.

죽음이 가까워진 나이, 아내와 이혼하고 하나뿐인 자식과 싸운 주인공은 상처입은 개처럼 브루클린으로 기어들어온다. 그리고 이 곳에서 또 다른 삶, 첫번째 삶 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일을 겪는다. 주인공의 처지는 한껏 고양되었다가 나락으로 다시 떨어지고, 회복할 길 없어보이는 그곳에서 다시 한번 몸을 추스린다.

그러니까 이 소설을 어찌될지 뻔하다라고 여기는 독자가 있다면 - 폴 오스터에 대한 옆다리 평가만 듣고 - 난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싶다. 서점에 오지 말라고. 인터넷 서점을 포함해서. 도대체 뻔한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고난을 극복한 결말, 결국에 실패한 결말, 이 둘은 exclusive한 관계라서 모든 이야기는 이 둘에 귀결된다. 이는 빨간 사과와 그렇지 않은 사과가 세상에 있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모든 사과의 생김새가 틀리고 미묘하게 맛이 틀리고 좋은 사과와 그렇지 않은 사과가 있는 것처럼, 소설 역시 마찬가지이다. 폴 오스터는 '우연의 음악'외에는 불행하게 결론 짓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실은 내가 그를 좋아하는 두번째 이유이다.

첫번째 이유는? 서술자의 독백. 난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다. 세상을 다 꿰어차고 있으면서도 실패를 거듭하는, 나쁜일이 무엇인지 알면서 남을 단죄하지 않는, 예의를 알면서 무례하게 구는 그들의 독백을 듣고 있노라면, 난 문득 - 독서 중에도 - 소설 밖으로 나와 폴 오스터를 한번 만나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와 악수를 하는 상상을 한다. 난 신Shin이오. 난 폴Paul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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