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에 지다 - 상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장바구니담기


아니, 날이 추운 탓이 아니야, 할복이 힘든 것은.
나리의 말대로 푸욱 배를 찔러 죽고 싶어도 나는 할복의 예법을 모르오이다. 고향에서는 지도 사범 대리까지 지냈던 내가 배 가르는 방법을 모른다는 건 참으로 우스운 소리요만.
아무도 내게는 할복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소. 왜냐하면 나는 사무라이인지 농사꾼인지 알 수 없는 천한 말단 사무라이였는지라, 혹시라도 배를 갈라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거지요.-30쪽

거 어딜 가든 그런 인간이 한 사람쯤은 꼭 있잖아. 무엇이건 빠지는 거 없이 다 잘하고 가만 따져보면 참 훌륭한 인물인데, 암만해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으로는 안 뵈는 그런 사람.-62쪽

그래, 그게 무사라는 거야. 속내와 껍데기가 항상 달라. 사무라이는 그야말로 괴물이지. 우리는 모두 무사도라는 귀신에 씌였던 거야. -90쪽

"공자님 말씀에, 부귀는 모두가 원하는 것이나,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곳에 머물지 않느니라. 빈천은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나, 그것이 비록 정당하게 얻게 된 것이 아닐지라도 부당한 방법으로 벗어나려 하지 않느니라."-103쪽

인간은 말야, 그저 강하기만 해서는 안 돼. 그 강한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지혜가 있어야지.-107쪽

말뚝처럼 멀뚱하니 선 채로 부르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더라니까. 그자는 그 힘줄 불거진 손으로 자식들 머리를 쓰다듬고 마누라를 품고 사람을 칼로 베었어. 똑같은 손 하나로 무슨 짓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내란 참 고생스런 것이지. 요시무라의 손은 손가락이 길쭉길쭉해서 참 다정스럽게 보였어.-118쪽

농사꾼만의 세상이었다면 나는 애초부터 검술도 학문도 하지 않고 열심히 밭을 갈았으리라. 사람 죽이는 일도 없이, 배를 가르는 일도 없이.-135쪽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더이상은 싫다. 전투는 죽기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전투를 하는 것이다. 죽고 싶지 않아 남을 베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군께서 군세를 다시 정비하실 시간을 벌어주려는 사석(捨石) 노릇은 나는 사양하겠소.
높으신 분들이 한결같이 말단 무사에게 죽어라 죽어라 다그치는 것은 스스로 죽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던가. 전장에서 죽는 것이야말로 무사의 영예라니, 대체 어느 누가 그런 바보 같은 말을 시작했단 말인가.
내 나름대로 사서오경을 배우며 뼈에 사무치게 생각한 바가 있었다. 공자님은 그런 말씀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주군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고는 하셨어도 충효를 위해 죽으라고는 하지 않으셨어.
그렇다면 번교의 자제들에게 무어라 가르쳐야 하는가. 살아남는 것이 무사라고, 살아서 있는 힘껏 충효를 다하고 다다미 위에서 곱게 죽는 것이 무사의영예라고, 나는 그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르치고 싶었다.
(중략)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다시 한번 난부의 아이들에게 일러주고 싶구나.
이번 전쟁에서는 관군이고 적군이고 그런 거 상관없느니라. 전장에서 죽어서는 안 되느니라.
도쿠가와 세상이건 사쓰마 조슈 세상이건 상관없느니라. 살아라, 어떻게든 살아서 백성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무사의 영예니라.
(중략)
너희만은 부디 알아다오.
요시무라 선생은 추호도 존왕양이의 뜻을 이루기 위해 탈번한 것이 아니니라.
그저 살기 위해 고향을 버렸느니라.-236-238쪽

"쓰러지더라도 검은 떨구지 마라! 아무렇게라도 좋으니까 휘둘러. 숨이 차거든 상대의 허리에 들러붙어. 숨이 차거든 상대의 허리에 들러붙어. 검술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라는 거, 잊지 마라!"-267쪽

뭐야, 이것들은, 이라니, 그건 우리가 할 소리예요. 신판 후다이 사무라이들이 주가의 위급을 어떻게 그렇게 남의 일처럼 수수방관하고 있는지, 참 신기할 정도였어요. 지체 높은 사무라이란 게요, 여차하면 그런 겁니다. 배 터지게 좋은 밥 먹고 살던 놈들은요, 제 안위밖에 생각을 못 해요.
그런데 우리는요, 배 쫄쫄 곯던 말단 사무라이하고 벼락사무라이들로만 모인 부대여서 오히려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어요.-369-370쪽

요시무라 선생님, 마누라를 얻었어요. 별로 예쁘지는 않아도 얼굴 꼴사나운 내게 안겨준 마누라에요.
요시무라 선생님, 아들이 생겼어요. 손자가 태어났습니다. 새 가게를 내 손으로 냈습니다.
요시무라 선생님, 내 손으로 돈을 벌어 세금을 듬뿍듬뿍 내고, 주제넘게 기부 같은 것도 했더니만 도쿄 시장님께서 감사장을 주셨네요.
요시무라 선생님, 저는요, 인간입니다. -395-396쪽

우리를 역적으로 몰아세운 모든 분들께 한말씀 드리리다. 근왕파도 막부파도, 무사도도 충군도, 그런 시시한 것이야 어찌됐건 좋소이다.
돌을 깨고 피어나려는 꽃을 어찌하여 원수 보듯 하시오. 북풍을 향해 피어나려고 애쓰는 꽃을 어찌하여 불의라 하시오.
그것이 아니라면, 그대들은 빈천을 악이라 하시는 것이오? 부귀를 선이라 부르짖는 것이오?
그렇다면 나는 긍지 높은 빈과 천을 위해 싸우겠소이다. 단연코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소이다.-412쪽

칼에는 두 개의 힘이 머물고 있소이다. 하나는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의 힘. 또 하나는 살해될 것이라는 두려움이지. 두 개의 힘은 항상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칼 속에 머물러 있소. 기량이 팽팽한 자들끼리 검으로 맞섰을 때, 자칫하면 서로에게 머문 두 개의 힘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달리는 일이 있소. 맞아,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끌려가는 것처럼 마구 달리게 돼.-441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룸 2005-08-27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가락 분질러지는줄 알았슴당!! 단편이랑 밑줄긋기 덕분에 학교때도 안늘던 타자실력이 점점 늘고 있어요...헐...TㅂT

어룸 2005-08-27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네, 알겠슴당, 지금 가겠슴당^^

돌바람 2005-09-05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우선 땡스투 먼저 눌렀어요. 인사도 못 드렸는데, 담에 와서(지금은 여우가 없어서리...) 천천히 인사올릴 게요.^^*

어룸 2005-09-05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반가워요, 돌바람님!! (^^)(__) 다른분서재에서도 자주 뵈었는데 직접 인사드리는건 첨이옵니다...(꾸벅~) 저도 종종 찾아뵙겠사옵니다!! ^ㅂ^ ㅎㅎㅎ땡스투까지해주시다니 너무나너무나 고맙숨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