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신화들이 있다. 예전에는 신들이 우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가 신을 만들었다고 얘기한다. 정말 그럴까? 신화의 역사를 거슬러 가다보면 이 답에 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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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역사
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감수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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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우리 신화- 우리 신들의 귀환을 위한 이야기 열두 마당
신동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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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화의 수수께끼- 아주 오래된 우리 신화 속 비밀의 문을 여는 30개의 열쇠
조현설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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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귀의 신화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심재중 옮김 / 이학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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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동물은 수만년 전부터 어울려 살아왔다. 고대에 그들은 서로의 세계를 넘나드는 형제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동물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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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1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 논장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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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2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 논장 / 2000년 1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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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3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 논장 / 2000년 1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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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4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 논장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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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 풀스 데이 - 상 - 데이먼 코트니는 만우절에 떠났다
브라이스 코트니 지음, 안정희.이정혜 옮김 / 섬돌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병이란 나에게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어려서 나는 원인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병과 함께 살아야 했다. 온 몸에는 툭하면 시퍼렇고 커다란 멍이 들었고 그것은 점점 보랏빛과 자줏빛으로 변해갔다. 수도 없이 코피를 흘려야 했는데 코피는 한번 나기 시작하면 멈추지를 않았다. 그러면 이비인후과로 업혀가 코에 기다란 가제를 줄줄이 박아넣어야 했다. 그리고 코피가 멎으면 다시 병원에 가서 그걸 줄줄이 빼내야 했다. 어린 나이에는 그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콧속에 도대체 얼마나 큰 공간이 있길래 그 많은 가제가 다 들어간단 말인가.

나는 나의 병을 한번도 불쾌하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느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거 같다. 나중에 그 병은 백혈병으로 진단을 받고 쓸데없는 약을 한움큼씩 먹어야 했고 그 부작용으로 나는 터질 듯이 부풀어올라야 했다. 그리고 골수검사와 수혈, 끝없는 병원 입원과 퇴원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나는 그랬다. 늘 낙관했다. 나의 삶을. 그 병은 나중에 혈소판 감소증이라는 새로운 병명을 얻게 되었다. 남자로 치면 혈우병과 같은 병이었다.

학교에서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친구 사귈 시간도, 기회도 갖지 못했던 거다. 거기다 성격은 너무나 수줍음이 많아 스스로 외톨이가 되었다. 그래도 가끔 친구가 있긴 했는데 그 아이들은 늘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며 나를 따돌렸다.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내 앞에서, 옆에서 죽음을 이야기했다. 쟤 금방 죽는데.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 얘기를 들었다. 그렇구나, 난 죽는구나. 그래도 슬프지 않았다.

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이 그려놓은 달팽이 놀이 그림을 보면서 그 형태가 갖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혼자 그 선을 따라 걸어들어가곤 했다. 공부할 때도 선생님 말씀에 우주의 그림이 명료하게 그려지며 끝없는 상상과 질문의 나랠 펴곤했다. 처음 나타난 떡볶이 포장마차에 설레이며 그 맛에 감동하고 축구공을 터뜨린 동생의 눈물을 닦아주던, 삶이란 나에게 하나의 경이였으며 따스한 아름다움이었던 거 같다.  죽음도 그랬던 거 같다. 삶과 별반 다를 거 없는 미지의 어떤 것일 뿐이었다.

그랬던 내가 버젓이 자라고 건강해져서 두 아이의 엄마까지 되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이 책을 만났다. 혈우병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 데이먼 코트니를 만난 순간 난 곧 그가 되어 버렸다. 그의 삶이 곧 나의 삶이 되어버렸다. 우리 둘은 얼마나 닮아 있었던지. 아니 데이먼은 나보다 더욱 밝고 나보다 더욱 용감하고 나보다 더욱 위대했다. 그는 삶 앞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다.

나는 나의 병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나서는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내 병으로 인해 어떤 고통을 겪었을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부모님과 형제들은 어떤 영향을 받고 어떤 생각과 느낌으로 나와 함께 살아주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산다는 건 때로는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건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어난 건 무언가 내가 할 일이 있기 때문인 거다.

데이먼은 무엇을 했던 것일까? 늘 병을 지니고 점점 더 그 병으로 인해 힘들어지고 주위 사람에게 의존해야 하고 나중에는 에이즈까지 감염되었던 그가. 후유증으로 정신병까지 앓게 되었는데. 그는 정말 왜 태어났던 것일까? 그의 삶은 무엇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우리에겐 병과 함께 살아가는 몸이 있다. 그러나 몸의 병을 이겨낼 수 있는 또는 병과 함께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힘이 있다. 그건 바로 영혼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데이먼 코트니는 그걸 보여주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세상의 어떤 병,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긍정성을 찾아낼 수 있고 희망을 볼 수 있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힘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용기를 내라고. 눈에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광대한 무엇인가가 더 있노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병은 이런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찾아오는지도 모르겠다. 데이먼은 우리에게 아픔이란 무엇인지, 아픔과 함께 어떻게 아름답게 살아나갈 수 있는지 얘기해주고 있다. 아픔은 우리를 더욱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해준다고. 내가 지금 여기서 살고 있음을 자각하게 해준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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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derbuch 2007-04-03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영혼의 힘, 바로 그것이었지요.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인간의 위대한 능력...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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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송년 모임이고 해서 좀 쉬운 책을 읽자고 해서 소설을 하나 읽기로 했습니다. 바로 <앵무새 죽이기>였지요. 첫 부분은 번역이 영 시원찮아서 읽기가 껄끄러웠지만 읽어나갈수록 재미있어지더군요. 하지만 번역은 계속 걸리는 문제였습니다. 번역을 잘 해내는 것도 정말 중요한 일이고 개선되어져야만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말도 잘 해야 한다는 점이 번역가에게는 아주 중요한, 어쩌면 필수적인 요건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요.

그래도 이 모든 번역상의 문제를 풀쩍 뛰어넘도록 만드는 이야기의 힘이 이 소설 속에는 담겨 있더군요. 어린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그 생명력이 여기서도 역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동화와 다른 점은 아이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지요. 하지만 소설이기에 그 문제는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지요. 지난 번에 부산에서 김경연 선생님이 청소년문학을 정의할 때 지금으로서는 청소년이 읽을 것을 상정하고 쓴 이야기라면 청소년문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했던 말씀이 떠오르는데 동화와 소설의 본질적 차이도 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화란 아이들이 읽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과도하게 아이들의 생명력을 떨어뜨리는 묘사로 이끌어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세밀하지 못하고 엉성하고 뭔가 꿈꾸는 듯하고 건너 뛰는 듯한 그런 묘사 말입니다. 그리고 어른이 많이 그려지지 않는 것도 아이에게 방점이 찍혀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삶에서 어린이만 따로 떼어내 그리려고 한다는 느낌이 든단 말입니다. 하지만 소설은 그런 부담이 없으니까 다 그리고 있는 거 같거든요. 그리고 그 사건들의 의미 또한 아이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고 말입니다. 그래서 삶에 대해 총체적 인식을 얻을 수 있는 쪽으로 소설이 우리를 이끌어간다면 동화는 뭐랄까요, 거기까지 이르기에는 좀 역부족인 면이 있는 거 같습니다. 현재 동화들로서는 말이지요.

우리 모두가 일치하면서 처음으로 내뱉었던 말은 아, 이 아버지는 너무나 훌륭한 사람이고 부모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부모 아래서는 아이가 안 될래도 안 될 수가 없다는 거지요. 사랑과 또한 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더군요. 아버지는 철저하게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고 시대가 요구하는 것보다 앞서서 나아가고 있는 진보적인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모두 그렇지만, 특히 아이들은 배워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학교에선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마을이, 이웃이, 삶이 아이를 가르칠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관을 배워가고 있었던 때였지요. 그러나 그 둘 사이에서 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던 때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책임을 지기 싫을 때 다수에 묻혀 가곤 하지요. 그러나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의 의견을 가져야 하고 그 의견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서 그것을 어찌 넘어야 할지 모르고 허둥대고 있었습니다. 아니면 옛것을 완고하게 고집하며 지키려고 하였지요.

옛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는 언제나 갈등과 대립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원만하게 이행되지 않을 때 그 사이에서 희생양이 생겨나게 되지요. 이 작품에서는 그런 존재를 앵무새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앵무새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노래를 불러주는 존재지요. 곡식을 훔치지도 않고 말입니다. 아버지는 총을 갖게 된 아들에게 어치는 죽여도 되지만 앵무새는 절대 죽이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위와 같은 까닭으로 말입니다. 그들은 단지 따라할 뿐이니까 말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어떤 의도도 갖고 있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그저 타고난 본성대로 살아갈 뿐이니까요.

그러나 세상은 그런 앵무새들을 죽이고 있지요. 희생양으로 삼아서 말입니다.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건 누구의 몫일까요? 지금 이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어나갈 수 있는 건 앵무새가 앵무새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들에 의해서일까요? 앵무새들은 그대로 놓아두고 그 양편에 있는 사람들이 맞붙어서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어느 한 쪽편은 늘 치사한 방법을 쓰지요. 거기에 맞서려면 나도 치사해져야 하고 그것을 우리는 용납하기 어렵지요. 그래서 늘 앵무새가 죽어 나가는 건가 봅니다. 앵무새를 지키려면 그래서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거구요.

작가는 이 한 편의 이야기를 끝으로 은둔했다지요. 이 한 편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했다면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정말 많은 이야기가 이 안에서 꿈틀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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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이인웅 옮김, 외젠 들라크루아 외 그림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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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나온 <파우스트> 1,2권을 읽었는데 1권은 정말 재미있었지요. 근데 2권은 지루하고 졸리기도 하고 재미가 없는 거예요. 공통적으로 느꼈던 거지요. 늙으면 사람은 왜 다 그렇게 되는 거야? 하고 한 동무가 말했답니다. 1부는 괴테가 젊었을 때 썼던 거고 2부는 노년에 쓴 거니까요. 아직 우리가 젊어서 그런 걸까요. 1부는 파우스트가 지상에서의 욕망을 추구하는 이야기고 2부는 영원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한 파우스트의 노력이 담겨 있는 이야기니까요. 그 차이일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아직 지상에서 우리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놀라웠던 점은 시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이었는데요. 마치 노래처럼 흥겨움이 묻어나오는 시들이었지요. 독일어로 썼다면 운을 맞춰 써야했을 테니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었을까요. 그러면서 우리 나라의 시들은 왜 그런 형식이 철저히 사라져버렸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한시에도 서양의 시에도 일본의 하이쿠에도 그런 것들이 남아있는데 말이지요. 우리나라에는 간신히 시조가 그 맥을 잇고 있지만 너무 미약하지요. 아이들의 전래동요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긴 하지만 동요에서 그 전통을 이어온 것 같지도 않구요. 아마 말장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동요에 있어서는요.

하지만 형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데에는 어떤 까닭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외우기 쉽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틀이니까요. 그 틀도 내용에 맞게 짜여지는 거겠지요. 그렇다면 그 틀에 걸맞는 내용이 있었다는 거겠지요. 지금은 그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서 틀 자체가 다시 짜여진 거라고 보아야 하겠구요.

괴테는 자신의 시에 작곡을 하지 말라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합니다. 자신의 시 자체가 노래이므로 그러니 자신의 시를 외울 때는 노래하는 것처럼 하라고 했다지요. 그리고 노래가 되었다고 하지요. 슈베르트가 괴테의 시 마왕을 작곡했을 때 그래서 괴테는 흥미조차 갖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가 가지고 있는 음악성은 수학적이기도 한 거지요. 그건 어떤 규칙을 가지고 있을 테구요. 아,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근데 이런 건 독일어로 읽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걸테구요. 우리 말로 번역되어 있는 건 잘 모르겠습니다.

<파우스트>의 주인공은 어떻게 보면 파우스트라기 보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인 것도 같은데요. 정말로 매력으로 똘똘 뭉친 현대적인 인물이더군요. 홀라당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겠더라구요. 악마만 아니라면 딱 제 스타일인 거예요. 악마인데 전통적인 개념의 악마가 아니라 자기 말로도 진화했다고 하지만요. 인류의 발달에 따라 익살꾼처럼 바뀌어진 악마인 거지요. 놀라운 화술, 본질을 꿰뚫어보는 천리안, 시들지 않는 유머감각, 마르지 않는 부,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요소들이지요. 그러니 앞다투어 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자 줄을 설 수밖에 없겠지요.

그는 왜 그렇게 매력이 있는 걸까요. 사람들은 왜 그렇게 그에게 깜빡 속아넘어갈까요. 현대는 어쩌면 수많은 메피스토펠레스들이 활동하고 있는 시대일 텐데요. 쉴 새 없이 사람들 귀에 너의 욕망을 추구하라고 속삭이고 있을 텐데요.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하고 말이지요. 그것도 아주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주면서 말이지요. 어떻게 보면 개인주의의 극단으로 사람을 몰고 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고 하나의 개인도 그의 영혼과 몸을 분리시키는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부름을 듣지 못하고 악마의 꾀임만을 듣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이는 하나님이 허용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면서 파우스트는 결국은 그 안의 선한 마음을 다시 찾아낼 거라고, 그 선한 마음이 올바른 방향을 가리킬 거라고 믿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런 하나님의 믿음을 비웃으며 자신의 목적이 달성될 것임을 또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인간에 대한 두 관점이 충돌하지요. 인간에 대해 이렇게 신과 악마가 다르게 바라볼 수밖에 없고 또한 둘 다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이겠지요. 나약하지만 또한 강인함을 지니고 있는,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이니까요. 우리 안에 공존하는 선과 악, 어느 것을 따를 지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거라구요.

어쩌면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런 우리의 자유의지를 시험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일깨워주는 존재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더욱 매력이 있는 걸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를 살살 꼬드기고 우리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를 불러 일으키고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복돋워주니까요. 거기에 저항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큰 힘을 우리 안에서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메피스토펠레스는 결코 자신을 강력한 악의 화신으로 나타내지는 않으니까요. 우리는 두려움 없이 그에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빗물처럼 우리에게 젖어들려고 하지요. 달콤한 말로 쉴 새 없이 속삭이죠. 그러니 현대인들은 더욱 똑똑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늘 깨어있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자들은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지요. 그건 아마 그들이 구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매력을 뿜어내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닌가 하구요. 괴테는 말하니까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올린다구요. 나쁜 남자에게 끌릴 때 내가 과연 메피스토펠레스를 이겨낼 자신이 있는 지를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겠더라구요. 그러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이 나쁜 남자를 택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있으니까요. 자신의 여성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면 모두가 구원에 다다를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러나 누가 그런 삶을 원할까요.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원형으로써 그러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파우스트>에서도 그레트헨은 파우스트에게 속고 버림을 당하고 가족도 죽고 아이도 죽이고 자신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요. 그러나 그레트헨은 파우스트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파우스트의 영혼을 영원한 곳으로 이끌어가지요. 언젠가 라즈니쉬가 한 말이 제 가슴속에 남아 한동안 괴로웠던 적이 있는데요. 라즈니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성은 한 남자를 완전히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도에 이를 수 있다구요. 정확히 이 표현은 아니었지만 이런 뜻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화가 났더랬지요. 뭐야? 도대체 얼마나 더 하라구? 왜 여자만? 하는 심정이었던 거지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 싫어 무던히도 많이 싸웠더랬습니다.

근데 그런 것 같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정말 다른 존재더군요. 여성성과 남성성이 다르듯이요. 내 안에서 이 두 성을 조화롭게 할 수 있다면 삶에서도 그럴 수 있겠더군요. 그러나 이제 그레트헨의 시대는 갔습니다. 새로운 여성의 삶이 필요한 거지요. 그레트헨이 보여준 것이 여성성의 상징이라면 그것은 그저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있을 뿐인 거지요. 그러니 새로운 상징이 될 수 있는 여성의 삶이 필요합니다. 영원한 여성성을 드러내며 우리 모두의 삶을 높은 곳으로 이끌어올려주는 새로운 삶의 양식 말입니다. 어디선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면 우리 눈에 들어오겠지요. 그들을 위하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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