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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번에는 송년 모임이고 해서 좀 쉬운 책을 읽자고 해서 소설을 하나 읽기로 했습니다. 바로 <앵무새 죽이기>였지요. 첫 부분은 번역이 영 시원찮아서 읽기가 껄끄러웠지만 읽어나갈수록 재미있어지더군요. 하지만 번역은 계속 걸리는 문제였습니다. 번역을 잘 해내는 것도 정말 중요한 일이고 개선되어져야만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말도 잘 해야 한다는 점이 번역가에게는 아주 중요한, 어쩌면 필수적인 요건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요.
그래도 이 모든 번역상의 문제를 풀쩍 뛰어넘도록 만드는 이야기의 힘이 이 소설 속에는 담겨 있더군요. 어린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그 생명력이 여기서도 역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동화와 다른 점은 아이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지요. 하지만 소설이기에 그 문제는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지요. 지난 번에 부산에서 김경연 선생님이 청소년문학을 정의할 때 지금으로서는 청소년이 읽을 것을 상정하고 쓴 이야기라면 청소년문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했던 말씀이 떠오르는데 동화와 소설의 본질적 차이도 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화란 아이들이 읽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과도하게 아이들의 생명력을 떨어뜨리는 묘사로 이끌어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세밀하지 못하고 엉성하고 뭔가 꿈꾸는 듯하고 건너 뛰는 듯한 그런 묘사 말입니다. 그리고 어른이 많이 그려지지 않는 것도 아이에게 방점이 찍혀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삶에서 어린이만 따로 떼어내 그리려고 한다는 느낌이 든단 말입니다. 하지만 소설은 그런 부담이 없으니까 다 그리고 있는 거 같거든요. 그리고 그 사건들의 의미 또한 아이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고 말입니다. 그래서 삶에 대해 총체적 인식을 얻을 수 있는 쪽으로 소설이 우리를 이끌어간다면 동화는 뭐랄까요, 거기까지 이르기에는 좀 역부족인 면이 있는 거 같습니다. 현재 동화들로서는 말이지요.
우리 모두가 일치하면서 처음으로 내뱉었던 말은 아, 이 아버지는 너무나 훌륭한 사람이고 부모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부모 아래서는 아이가 안 될래도 안 될 수가 없다는 거지요. 사랑과 또한 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더군요. 아버지는 철저하게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고 시대가 요구하는 것보다 앞서서 나아가고 있는 진보적인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모두 그렇지만, 특히 아이들은 배워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학교에선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마을이, 이웃이, 삶이 아이를 가르칠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관을 배워가고 있었던 때였지요. 그러나 그 둘 사이에서 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던 때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책임을 지기 싫을 때 다수에 묻혀 가곤 하지요. 그러나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의 의견을 가져야 하고 그 의견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서 그것을 어찌 넘어야 할지 모르고 허둥대고 있었습니다. 아니면 옛것을 완고하게 고집하며 지키려고 하였지요.
옛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는 언제나 갈등과 대립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원만하게 이행되지 않을 때 그 사이에서 희생양이 생겨나게 되지요. 이 작품에서는 그런 존재를 앵무새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앵무새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노래를 불러주는 존재지요. 곡식을 훔치지도 않고 말입니다. 아버지는 총을 갖게 된 아들에게 어치는 죽여도 되지만 앵무새는 절대 죽이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위와 같은 까닭으로 말입니다. 그들은 단지 따라할 뿐이니까 말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어떤 의도도 갖고 있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그저 타고난 본성대로 살아갈 뿐이니까요.
그러나 세상은 그런 앵무새들을 죽이고 있지요. 희생양으로 삼아서 말입니다.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건 누구의 몫일까요? 지금 이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어나갈 수 있는 건 앵무새가 앵무새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들에 의해서일까요? 앵무새들은 그대로 놓아두고 그 양편에 있는 사람들이 맞붙어서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어느 한 쪽편은 늘 치사한 방법을 쓰지요. 거기에 맞서려면 나도 치사해져야 하고 그것을 우리는 용납하기 어렵지요. 그래서 늘 앵무새가 죽어 나가는 건가 봅니다. 앵무새를 지키려면 그래서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거구요.
작가는 이 한 편의 이야기를 끝으로 은둔했다지요. 이 한 편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했다면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정말 많은 이야기가 이 안에서 꿈틀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