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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 풀스 데이 - 상 - 데이먼 코트니는 만우절에 떠났다
브라이스 코트니 지음, 안정희.이정혜 옮김 / 섬돌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병이란 나에게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어려서 나는 원인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병과 함께 살아야 했다. 온 몸에는 툭하면 시퍼렇고 커다란 멍이 들었고 그것은 점점 보랏빛과 자줏빛으로 변해갔다. 수도 없이 코피를 흘려야 했는데 코피는 한번 나기 시작하면 멈추지를 않았다. 그러면 이비인후과로 업혀가 코에 기다란 가제를 줄줄이 박아넣어야 했다. 그리고 코피가 멎으면 다시 병원에 가서 그걸 줄줄이 빼내야 했다. 어린 나이에는 그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콧속에 도대체 얼마나 큰 공간이 있길래 그 많은 가제가 다 들어간단 말인가.
나는 나의 병을 한번도 불쾌하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느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거 같다. 나중에 그 병은 백혈병으로 진단을 받고 쓸데없는 약을 한움큼씩 먹어야 했고 그 부작용으로 나는 터질 듯이 부풀어올라야 했다. 그리고 골수검사와 수혈, 끝없는 병원 입원과 퇴원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나는 그랬다. 늘 낙관했다. 나의 삶을. 그 병은 나중에 혈소판 감소증이라는 새로운 병명을 얻게 되었다. 남자로 치면 혈우병과 같은 병이었다.
학교에서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친구 사귈 시간도, 기회도 갖지 못했던 거다. 거기다 성격은 너무나 수줍음이 많아 스스로 외톨이가 되었다. 그래도 가끔 친구가 있긴 했는데 그 아이들은 늘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며 나를 따돌렸다.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내 앞에서, 옆에서 죽음을 이야기했다. 쟤 금방 죽는데.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 얘기를 들었다. 그렇구나, 난 죽는구나. 그래도 슬프지 않았다.
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이 그려놓은 달팽이 놀이 그림을 보면서 그 형태가 갖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혼자 그 선을 따라 걸어들어가곤 했다. 공부할 때도 선생님 말씀에 우주의 그림이 명료하게 그려지며 끝없는 상상과 질문의 나랠 펴곤했다. 처음 나타난 떡볶이 포장마차에 설레이며 그 맛에 감동하고 축구공을 터뜨린 동생의 눈물을 닦아주던, 삶이란 나에게 하나의 경이였으며 따스한 아름다움이었던 거 같다. 죽음도 그랬던 거 같다. 삶과 별반 다를 거 없는 미지의 어떤 것일 뿐이었다.
그랬던 내가 버젓이 자라고 건강해져서 두 아이의 엄마까지 되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이 책을 만났다. 혈우병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 데이먼 코트니를 만난 순간 난 곧 그가 되어 버렸다. 그의 삶이 곧 나의 삶이 되어버렸다. 우리 둘은 얼마나 닮아 있었던지. 아니 데이먼은 나보다 더욱 밝고 나보다 더욱 용감하고 나보다 더욱 위대했다. 그는 삶 앞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다.
나는 나의 병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나서는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내 병으로 인해 어떤 고통을 겪었을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부모님과 형제들은 어떤 영향을 받고 어떤 생각과 느낌으로 나와 함께 살아주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산다는 건 때로는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건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어난 건 무언가 내가 할 일이 있기 때문인 거다.
데이먼은 무엇을 했던 것일까? 늘 병을 지니고 점점 더 그 병으로 인해 힘들어지고 주위 사람에게 의존해야 하고 나중에는 에이즈까지 감염되었던 그가. 후유증으로 정신병까지 앓게 되었는데. 그는 정말 왜 태어났던 것일까? 그의 삶은 무엇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우리에겐 병과 함께 살아가는 몸이 있다. 그러나 몸의 병을 이겨낼 수 있는 또는 병과 함께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힘이 있다. 그건 바로 영혼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데이먼 코트니는 그걸 보여주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세상의 어떤 병,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긍정성을 찾아낼 수 있고 희망을 볼 수 있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힘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용기를 내라고. 눈에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광대한 무엇인가가 더 있노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병은 이런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찾아오는지도 모르겠다. 데이먼은 우리에게 아픔이란 무엇인지, 아픔과 함께 어떻게 아름답게 살아나갈 수 있는지 얘기해주고 있다. 아픔은 우리를 더욱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해준다고. 내가 지금 여기서 살고 있음을 자각하게 해준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