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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40일 - 손으로 쓰고 그린
밥장 지음 / 시루 / 2017년 12월
평점 :

난 여행 에세이를 좋아한다. 가고 싶은 곳을 다 갈 수 없음에 대한 대리만족이라고나 할까? 다양한 TV 여행 프로그램이 있지만, 여행하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는 건 직접 그곳을 다녀온 사람의 말과 글 그리고 사진이다.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의 그림과 손글씨로 호주를 만나게 되었다.

책을 처음 받아봤을 때 표지가 바뀐 줄만 알았다. 책 안내 표지에는 분명 차가 나왔는데 내가 받은 책은 아저씨가 생선을 자랑하고 계셨다. 뭔가 독특해서 펼쳐보니 밥장의 그림이 한가득이다. 사람마다 여행을 가서 보고 느끼는 게 다른 것처럼 이 책은 사람마다 다른 표지로 읽는 사람을 반긴다.

"밥장, 호주 가지 않을래?"라는 말이 한 마디로 호주 여행을 함께 하게 된 밥장님. 형님(허영만 선생님), 봉주르(형님의 오랜 친구 김봉주), 총무, 용권 형(사진과 동영상 담당), 태훈 작가(일정도 챙기고 글 쓰려고 뉴질랜드에서 온 김태훈) 그리고 이 책의 저자 밥장. 이렇게 여섯 남자들의 40일간의 호주 여행이 그려진다. 졸지에 사십 대 후반에 막내가 된 밥장은 닉네임에 밥이 들어간다는 단순한 이유로 식사를 맡게 되었다. 정말 닉네임에 밥이 들어가서일까? 혹시 어르신들이 밥하기 싫으셨던 건 아닐까? ㅋ
아침 차리고 점심 차리고 마트에 들러 장보고 저녁을 차렸다. 이동하는 시간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왜 어머니들과 아내가 집안일이 얼마나 힘든지 답답해하는지 어렴풋이 알겠다. 형님들은 설거지가 많거나 밥하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그저 하지 말자, 줄이면 된다며 급 마무리하려 든다. 문제는 일을 나누자는 건데 말이다. 아무리 빵 먹고 굶는다쳐도 누군가는 빵을 사와야 된다. 또 빵만 있으면 되나? 버터도 발라야 하고 가끔 잼도 찍어야 한다. 계란후라이도 구워야 한다. 이러게 말씀드렸더니 봉주르 형님은 조용히 마트에 가서 일회용 접시를 한가득 사오셨다. 와우. 형님, 5분만 나눠주시면 저희는 10분을 벌어요. 그리고 여행하면서 허드렛일을 줄이는 건 불가능하다. 여행이란 진짜 자잘한 허드렛일이 모인 것뿐. 장소가 익숙한 곳이 아니다 뿐이지. 저녁에 카레를 먹으며 회의를 했는데 점점 성토하는 마당이 되었다. 아직 37일이나 남았다. 무려 4천 킬로 가까이 되는 사막도 건너야 한다. 지금 이 멤버 그대로 말이다. p.25
집안일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남자는 어르신들만 가득한 곳에 보내 요리를 시켜야 한다. 그런데 저 멤버에 나이와 상관없이 여성이 함께 있었다면 아마도 자연스럽게 주방장이 되었겠지? 남자들에게 못 미덥기도 하고, 게다가 맛까지 없다면 말이다. 그리고 여자가 당연하게 요리하는 거라고 생각할 테고... 밥장님은 40일간의 요리도 힘들었겠지만, 대부분의 아내들은 적어도 40년간의 식사를 책임진다. 밥 먹을 때 맛있게 먹었다고 얘기하자. 그리고 나만의 요리 하나쯤은 좀 가져보자. 꺽정씨는 김치볶음밥을 잘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머님의 김치가 맛의 8할을 차지하는 거지만...

저렇게 생긴 캠퍼밴 두 대를 타고 이동을 한다. 그림으로 보면 깜찍하지만 실제로 보면 어마어마할 거 같다. 밥장님이 운전할 때 폭이 가늠이 안 될 정도라고 하면... 캠핑카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있다. 아무래도 여행할 때 짐 가방 들고 다니는 건 번거롭고 귀찮으니까.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하는데 집을 작게 만들어서 어느 곳에 가던지 함께 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까지는 아니라도 이동할 때마다 투숙할 곳을 찾아야 하는 수고는 안 해도 되니 좋을 것 같다. 다만 소실점 지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겨운 운전은... 흠... 그렇다면 나는 자율 주행 캠퍼밴이 상용화되면 그때 가봐야지. 어차피 난 운전을 못하니까~

평화롭게 주차된 캠퍼밴과 줄에 널려있는 시트까지... 그날의 햇살과 냄새가 여기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다. 아~ 미친 듯이 부럽다. 난 이렇게 세밀하게 그림이 안 그려지던데... 난 낙서 수준이지 뭐. 흑

밥장님의 그림일기를 보니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아마도 난 몰스킨이 아닌 디지털카메라와 핸드폰을 챙겨가게 되겠지. 예전보다 가벼운 장비로 훨씬 더 많은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쉽게 찍는 만큼 또 쉽게 그때의 감정이 잊혀지는 것 같다. 예전에 필름 카메라로 한 장 한 장 정성 들여 필름을 아껴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아무래도 필름값과 현상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리고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고 며칠을 기다려 찾아올 때까지 추억을 새기고, 함께 있었던 사람들과 사진을 나누었다. 느리게 추억을 새기는 것이 더 깊이 새기는 게 아닐까 싶다. 밥장님은 필름 사진보다 더 느리게 추억을 꾹꾹 눌러 담아 몰스킨에 담았다. 밥장의 그림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중간중간에 나오는 형님 짤도 놓치면 안 된다. 나도 모르게 공감하면서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게 된다. 허영만 선생님이 그림과 김태훈 작가의 글, 정용권님의 사진이 담긴 <호주 캠퍼밴 40일>도 읽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