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재취업 처방전 - 내 안의 천재와 접속하기
천경 지음 / 북코리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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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백수(전업주부라는 엄연한 직업이 있음에도)인 내 호기심을 동하게 하는 책을 만났다. 나처럼 지금은 사정상 아이를 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일을 하겠다고 맘먹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증이 생길만한 책이다. 처음에 책 제목만 봤을 때는 <명랑 소녀 성공기>의 주부판 정도 되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은 기회가 된다면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지극히 평범한 주부들의 이야기다.

육아 동지들을 만나면 아이를 잘 키워야겠다는 다짐과 그럼에도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야기한다. 지금은 아직 아이가 어려서, 그리고 맡길 곳이 없기에 서로를 의지, 위로하며 독박 육아를 하지만 아마도 아이가 우리의 손을 점점 떠나면 일을 다시 시작하지 않을까 한다. 그때가 되면 경력은 단절되고,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변해있을 것이다. 또다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건 두렵기도 하다. 그렇다고 떠밀려서 취업전선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경단녀 일자리', '주부 일자리 가능한 곳' 등의 검색어로 일자리를 찾고 싶지도 않다. 언젠가는 엄마보다 엄카를 더 좋아할 밤톨군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해 일하고 싶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이 다 공부를 하니까, 또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니까 공부를 하고, 또 대학에 갔다.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 없이 수능 점수에 내 인생을 맡겨버렸다. 그리고 중간에 바로잡을 생각도 못하고 흘러가는 대로 만족하며 살았던 것 같다. 올해는 나에게 두 번째 고3 시기가 온 듯하다. 문제집 대신에 책을 읽고, 수업 대신에 세상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그리고 20년을 또 살아보고 싶다. 물론 중간에 '이건 정말 아니다!'싶은 때는 과감히 수정을 하겠지만 말이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는 말이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듣는다. 난 아직 반도 못 살았다. 설령 내 생명줄이 남들보다 짧아서 반 이상을 살았다 하더라도 후회하고 싶진 않으니까...

육아서를 읽다 보면 아이들에겐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다고, 다들 천재고 보석이라고 한다. 그래서 잘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나이만 더 먹었을 뿐... 한해 한해 나이를 먹을수록 '난 전공자도 아니잖아.', '아이나 잘 키우자!'란 생각 등으로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은둔해버린 천재가 어디에 숨었는지 찾아봐야겠다.

 

 

 

 

나이가 들수록 신체 기능이 떨어지고 근육량은 줄고 감수성은 둔해질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나이 들수록 세상 보는 안목이 생기고 경험이 풍부해져서, 사고력이 설익은 청춘 시절보다 좋아진다. 나이 들수록 잘할 수 있는 분야의 일들이 많아진다. p.43

그런데 저는 취업을 원하는 모든 분에게 두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당신에게는 ‘뜨거움‘이 있습니까?
가슴이 벅차오르는 간절함이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 안에 있는 천재를 만나셨습니까?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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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문제 - 교양 있는 남자들의 우아한 여성 혐오의 역사
재키 플레밍 지음, 노지양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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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투명한 공 안에 갇혀 있는 여성이 표지인 <여자라는 문제>. 페이지마다 그림이 있기에 가볍고 쉽게 읽히는 책이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무겁고 어렵기만 하다. 

역사 책에 여자가 없는 건 기분 탓인 건가? 심지어 인류의 진화를 보여주는 각종 그림과 모형들도 죄다 남자들뿐이다. 수컷들은 남자가 되어도 암컷들은 여자가 되지 못한 채 원숭이로 남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종의 기원>을 쓴 생물학자 찰스 다윈은 늘 집에만 머무르는 여자들의 성취는 남자들의 성취에 비해선 하잘 것이 없으니 이는 곧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다는 증거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찰스 다윈의 와이프인 엠마는 밥도 주지 말고 그를 굶겨 죽였어야 했다. 어디서 뜨순 밥 먹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설령 빵은 차가웠을지라도 수프는 따뜻했겠지.) 내가 식사 챙겨준 것도 아닌데 다 아깝네. 영국의 비평가인 존 러스킨은 여성의 지성은 발병이나 창조를 위한 것이 아니다, 여성들의 진정한 재능은 칭찬하는데 있다는 헛소리도 했다.

이 책은 교양 있는 남자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도 아주 유명한 남자들의 우아하기 그지없는 여성 혐오의 역사다. 사실 왜 여성을 혐오하는지 잘 모르겠다. 남자로 태어나는 것도, 여자로 태어나는 것도 그 어떤 것도 내 의지가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우연히 난자와 성을 배정받은 정자가 만났을 뿐인데... 내가 혐오하는 사람이 여자일 수는 있다. 하지만 여자라서 혐오한다는 말은 결코 아닌 것 같다. 내가 우연히 여자라서 그럴지 모르겠으나 여자를 왜 혐오하는지 모르겠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같은 사람으로 대접을 받고 싶다는 게 그렇게 비난받을 일일까?

우리 집은 유교가 종교인 가부장적인 집안이었다. 남자들만 바글바글한 집에 태어난 귀한 딸이라서 아빠한테 엄청 귀여움을 받았다. 그래도 같은 잘못을 해도 내 앞에는 항상 '여자가!'라는 말이 자주 붙었다. 여자가 뭘? 내가 여자인 게 뭘? 친척들이 모이는 명절에는 더 심한 꼴을 봐야 했다. 여자들은 하루 종일 부엌에서 쪼그리고 앉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죽은 조상들(심지어 여자들의 조상도 아니었다)을 위해 밥을 하고, 전을 부치고, 그릇을 씻었다. 가부장적인 할아버지들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티브이나 보고, 신문이나 읽고, 화투나 치면서 명절을 팔자 좋게 늘어지게 보냈다. 그리고 상이 다 차려지면 그제서야 넓고 따뜻한 거실에 둘러앉아 반찬 개수가 부족하니, 간이 맞니 안 맞니 투덜거렸고, 허리 한 번 펴보지 못한 여자들은 차가운 부엌에서 작은 상에 쪼그리고 앉아 남자들이 남긴 음식을 먹었다. 내가 남자들이 자리한 상에 앉아 있으면 그렇게 눈치를 줬다. '그땐 같은 성씨끼리 치사하게 왜 이러나?'라고 생각할 뿐, 내 성별이 여자라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나아졌다고는 하나, 달라진 건 없다. 시댁은 제사만 안 지내고, 겸상을 하지만, 부엌은 여자들의 공간이다. 남자들은 티브이 앞 붙박이가 되어 소파와 한 몸이 되어간다. 커다란 상을 날라야 할 때만 그제서야 남자들의 일(옮기는 것)을 한다. 정말 여자는 열등한 존재라서 부엌에서 찬 손에 물 담가 음식을 하고, 남자들은 우월한 존재라서 소파에 늘어져 있는 걸까?

여성이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주류의 역사가들은 지운 여성들이 일궈놓은 업적들을 역사의 쓰레기통에 넣어버렸고, 불평등은 당연한 거라고 세뇌당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책은 반어적인 표현을 이용해서 억압된 당시의 여성들을 그린다.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고 하나 정말 신나게 웃을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화가 났다. '여자가!'가 무슨 접두사 마냥 붙어있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고, 시댁에 가서 설거지라도 안 하면 불편한 내게 화가 났다. (나도 백 년 손님이라고~!!!) 얇지만 읽는 사람 모두가 불편한 책이길 바란다. 뭔가 잘못된 것임을 알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노력하고 있음을 어린 세대에게 알려주고 싶다. 우리의 어머니들에겐 당연했던 것들이, 우리에겐 불편하고, 우리의 딸들에겐 과거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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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40일 - 손으로 쓰고 그린
밥장 지음 / 시루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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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행 에세이를 좋아한다. 가고 싶은 곳을 다 갈 수 없음에 대한 대리만족이라고나 할까? 다양한 TV 여행 프로그램이 있지만, 여행하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는 건 직접 그곳을 다녀온 사람의 말과 글 그리고 사진이다.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의 그림과 손글씨로 호주를 만나게 되었다.

책을 처음 받아봤을 때 표지가 바뀐 줄만 알았다. 책 안내 표지에는 분명 차가 나왔는데 내가 받은 책은 아저씨가 생선을 자랑하고 계셨다. 뭔가 독특해서 펼쳐보니 밥장의 그림이 한가득이다. 사람마다 여행을 가서 보고 느끼는 게 다른 것처럼 이 책은 사람마다 다른 표지로 읽는 사람을 반긴다.

 

 "밥장, 호주 가지 않을래?"라는 말이 한 마디로 호주 여행을 함께 하게 된 밥장님. 형님(허영만 선생님), 봉주르(형님의 오랜 친구 김봉주), 총무, 용권 형(사진과 동영상 담당), 태훈 작가(일정도 챙기고 글 쓰려고 뉴질랜드에서 온 김태훈) 그리고 이 책의 저자 밥장. 이렇게 여섯 남자들의 40일간의 호주 여행이 그려진다. 졸지에 사십 대 후반에 막내가 된 밥장은 닉네임에 밥이 들어간다는 단순한 이유로 식사를 맡게 되었다. 정말 닉네임에 밥이 들어가서일까? 혹시 어르신들이 밥하기 싫으셨던 건 아닐까? ㅋ

아침 차리고 점심 차리고 마트에 들러 장보고 저녁을 차렸다. 이동하는 시간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왜 어머니들과 아내가 집안일이 얼마나 힘든지 답답해하는지 어렴풋이 알겠다. 형님들은 설거지가 많거나 밥하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그저 하지 말자, 줄이면 된다며 급 마무리하려 든다. 문제는 일을 나누자는 건데 말이다. 아무리 빵 먹고 굶는다쳐도 누군가는 빵을 사와야 된다. 또 빵만 있으면 되나? 버터도 발라야 하고 가끔 잼도 찍어야 한다. 계란후라이도 구워야 한다. 이러게 말씀드렸더니 봉주르 형님은 조용히 마트에 가서 일회용 접시를 한가득 사오셨다. 와우. 형님, 5분만 나눠주시면 저희는 10분을 벌어요. 그리고 여행하면서 허드렛일을 줄이는 건 불가능하다. 여행이란 진짜 자잘한 허드렛일이 모인 것뿐. 장소가 익숙한 곳이 아니다 뿐이지. 저녁에 카레를 먹으며 회의를 했는데 점점 성토하는 마당이 되었다. 아직 37일이나 남았다. 무려 4천 킬로 가까이 되는 사막도 건너야 한다. 지금 이 멤버 그대로 말이다. p.25

집안일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남자는 어르신들만 가득한 곳에 보내 요리를 시켜야 한다. 그런데 저 멤버에 나이와 상관없이 여성이 함께 있었다면 아마도 자연스럽게 주방장이 되었겠지? 남자들에게 못 미덥기도 하고, 게다가 맛까지 없다면 말이다. 그리고 여자가 당연하게 요리하는 거라고 생각할 테고... 밥장님은 40일간의 요리도 힘들었겠지만, 대부분의 아내들은 적어도 40년간의 식사를 책임진다. 밥 먹을 때 맛있게 먹었다고 얘기하자. 그리고 나만의 요리 하나쯤은 좀 가져보자. 꺽정씨는 김치볶음밥을 잘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머님의 김치가 맛의 8할을 차지하는 거지만...

저렇게 생긴 캠퍼밴 두 대를 타고 이동을 한다. 그림으로 보면 깜찍하지만 실제로 보면 어마어마할 거 같다. 밥장님이 운전할 때 폭이 가늠이 안 될 정도라고 하면... 캠핑카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있다. 아무래도 여행할 때 짐 가방 들고 다니는 건 번거롭고 귀찮으니까.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하는데 집을 작게 만들어서 어느 곳에 가던지 함께 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까지는 아니라도 이동할 때마다 투숙할 곳을 찾아야 하는 수고는 안 해도 되니 좋을 것 같다. 다만 소실점 지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겨운 운전은... 흠... 그렇다면 나는 자율 주행 캠퍼밴이 상용화되면 그때 가봐야지. 어차피 난 운전을 못하니까~ 

평화롭게 주차된 캠퍼밴과 줄에 널려있는 시트까지... 그날의 햇살과 냄새가 여기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다. 아~ 미친 듯이 부럽다. 난 이렇게 세밀하게 그림이 안 그려지던데... 난 낙서 수준이지 뭐. 흑

밥장님의 그림일기를 보니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아마도 난 몰스킨이 아닌 디지털카메라와 핸드폰을 챙겨가게 되겠지. 예전보다 가벼운 장비로 훨씬 더 많은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쉽게 찍는 만큼 또 쉽게 그때의 감정이 잊혀지는 것 같다. 예전에 필름 카메라로 한 장 한 장 정성 들여 필름을 아껴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아무래도 필름값과 현상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리고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고 며칠을 기다려 찾아올 때까지 추억을 새기고, 함께 있었던 사람들과 사진을 나누었다. 느리게 추억을 새기는 것이 더 깊이 새기는 게 아닐까 싶다.  밥장님은 필름 사진보다 더 느리게 추억을 꾹꾹 눌러 담아 몰스킨에 담았다. 밥장의 그림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중간중간에 나오는 형님 짤도 놓치면 안 된다. 나도 모르게 공감하면서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게 된다. 허영만 선생님이 그림과 김태훈 작가의 글, 정용권님의 사진이 담긴 <호주 캠퍼밴 40일>도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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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 일본에서 살아본다면
나무 외 지음 / 세나북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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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제목의 책과 만났다. <한 번쯤 일본에서 살아본다면>은 일본에서 살고 있는, 일본에서 살았던 16명의 작가가 쓴 에세이다. 일본이란 나라는 정겹기도 하다가도 아베가 이상한 말 한마디 하면 재수가 없어지기도 하는 나라다. 아마 우리나라 옆이 아니라 동남아 어딘가에 붙어서 우리와 직접적으로 얽힌 과거가 없다면 지금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느낄 텐데...

일본은 우리나라랑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참 다른 나라다. 영국에 있을 때 유럽 애들이 가득한 곳에서 일본인 친구들은 친근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보다는 외모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더 편하기도 했고... 어느 날 한국인 무리(그래봤자 여자 서너 명)와 일본인 친구랑 영화를 보러 갔다. 우리는 영화를 고르고 있었고 일본인 친구인 다이고는 콜라를 사러 갔다 온다고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이고는 콜라 한 잔만 손에 들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 꺼도 사 올 줄만 알았던 우리들은 다이고에게 어떻게 딱 하나만 사 올 수 있냐고 잔소리를 해댔지만 다이고는 이해를 못했다. 다이고가 눈치가 없었던 건지, 아니면 일본 사람들이 전반으로 그런 건지 알 수는 없겠으나 그때 일본과 우리나라가 참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공부하며 일하며 일본에서 산다는 것>, <사랑하며 일본에 산다는 것>, <일본에서 산다는 것>, <변주> 이렇게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여러 사람들의 생생한 생활기가 펼쳐진다. 그중에서 난 <사랑하며 일본에 산다는 것>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아무래도 영국에서 함께 있었던 언니가 다이고와 결혼하여 일본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 거다. 언니도 글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언니의 이야기도 이들 못지않게 독특하다. 다이고(형부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형부라는 말은 어색하다. 게다가 일본에는 '형부'라는 말이 없다고 했다.)는 요코하마에 있는 절에 주지스님으로 있다. 그래서 언니와 다이고 가족은 일반 가정이 아닌 절에서 살고 있는데(일본에서 불교는 선종이 중심이라 가정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언니가 영상통화로 보여준 절은 아담하면서도 참으로 예뻤다. 언니의 시부모님이 은퇴하시고, 언니가 절 살림을 맡다 보니 한국에 와도 잠깐 들렸다가는 정도라 못 본지 꽤 되는 것 같다. 흥부자라 춤도 잘 추고, 맥주도 좋아하던 언니가 주지스님 내조한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상상이 잘 안된다. 게다가 일본에선 어린이집에 보낼 때도 준비하는 게 많다며, 언니가 준비한 것들을 카카오 스토리에 올릴 때마다 놀라곤 한다. 일본에서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글자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이건 진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자기 물건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바라기, 강아지 그림 등으로 표시를 한다. 언니는 물건마다 해바라기 자수하느라 힘들었다고... 그런 언니를 보며 나도 밤톨군 물건에 표시를 예쁘게 해주고 싶었으나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했다간 유난 떠는 엄마로 보일까 봐 그저 가슴 깊이 묻어두었다.

책에서는 공부를 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 살기 위해, 한국이 답답해져서 등 다양한 이유로 일본에서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 상대적으로 시급이 세기 때문에 일하면서 공부할만하다고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자리를 잡은, 혹은 좋은 추억을 가지고 돌아온 이야기를 전해준다. 외국인이란 편견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책의 작가들이 스며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 일본으로 보면서 우리나라는 어떤지 생각해보았다. 내 주변에 중국인 지인들이 몇 명 있는데(내가 중국어를 잘 하는 게 아니라, 이들이 나보다 더 한국말을 잘 하는 것임을 알려둔다), 이 책의 저자들과 비슷한 이유로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다. 그들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한 번쯤 한국에서 살아본다면 어떨까라고 호기심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줄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 해도 무언가 참고 극복해야 할 문제들은 비슷한 강도로 존재했을 것이다. 어차피 계속해서 새로운 일에 부딪히고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 중간쯤에서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새롭게 인생이라는 그림을 다시 그리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다. 오히려 낯선 곳에서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면 조금은 더 용기를 낼 수 있는 것 같다. 평균 수명 80세 시대, 인새의 절반쯤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낯선 곳에서 지내도 괜찮지 않을까? 때로는 한 번의 용기가 미처 생각지 못한 많은 보물을 얻게 해 준다. p.32

"네가 한국에서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과거에 갇혀 살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너를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p.35

그러나 일본은 천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일상을 소중히 사는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오직 ‘당신만을 위한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곳이라고 전하고 싶다.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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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스테판 가르니에 지음, 김선희 그림, 이소영 옮김 / 이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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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하우스에서 서평단 이벤트로 받은 책이다. 생각보다 얇은 책이 도착해서 깜짝 놀랐다. 하긴 무심의 결정판 같은 고양이에겐 이게 더 잘 어울린다. 표지의 고양이는 금방이라도 나를 향해 "야옹~" 소리를 내며 조그맣게 말을 걸 것만 같다.

난 예전에 강아지과에 속한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나보다도 먼저 주위에서 다 알 정도였으니까...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꼬리를 상대방 옆에 다소곳이 앉아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내 이름만 불러도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고, 부르면 달려나가기 바빴다. 상대방보다 내가 더 많이 사랑했고 그래서 더 많이 아파했다. 내가 가진 패를 몽땅 보여주고 시작한 게임이니 지는 건 당연했다. 어느 날 지인이 연애는 고양이처럼 하는 거라고 말했다. 옆에서 처량하게 울고 있는 내 모습이 참 딱했었나 보다. 간식 하나 못 받아먹은 강아지처럼 풀이 죽어 있었으니... 지인은 좋아할수록 무심한 듯 행동하고, 그 사람이 예상하지 못했을 때 은근히 마음을 드러내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고양이는 늘 그랬다.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속상한 날은 어찌 알고 내 곁을 빙글빙글 돌며 쓰다듬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그렇다. 연애는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고양이 코치는 나에게 연애를 알려줬고, 이번엔 가진 것 없이도 풍요롭게 사는 삶을 알려주었다.

읽는 동안 나의 고양이었던 '보리'가 떠올랐다. 하품을 하곤 혀 넣는 걸 잊어버려 메롱을 즐겨 하던, 궁디팡팡을 좋아하지만 흥분하면 내 손을 물던,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창밖을 관찰하는 걸 좋아하던, 내가 콤콤한 발 냄새 맡는 걸 좋아하는 걸 알고(이건 좀 변태 같군... ㅋ), 가끔씩은 먼저 발을 내밀던, 머리 감기 귀찮아서 누워있으면 혀로 단장 시켜주던, 골골송 부르는 걸 좋아하던 보리가... 생각해보면 내가 보리를 키운 게 아니라 보리가 날 키운 게 아닐까 싶다. 하루 종일 눈물 속에서 살던 때가 있었다. 밥 먹는 것도 잊고 그저 침대 속에서 웅크리고 울었다. 그때 날 건져준 건 보리였다. 나를 돌보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 것도...

이 책은 저자인 스테판 가르니에가 15년 동안 함께한 자신의 반려묘인 '지기'를 관찰하며 고양이의 행동과 원하는 걸 얻는 방식을 46가지로 정리한 것이다. 고양이에 관한 명언과 고양이 일러스트가 중간중간에 들어있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나 자신을 잃은 것 같은 사람들에게도 재미있게, 그리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따뜻한 곳에 자리해서 나른하게 누워있는 고양이처럼 긴장을 풀고 행복하게 사는 지혜가 얇은 책 속에 꽉 차 있다.

부록으로 고양이 지수(CQ)를 평가할 수 있는데, 당장 고양이를 입양해야 하거나, 아기 고양이 상태, 그리고 고양이로 합격으로 나눠진다. 나는 당당히 고양이로 합격점을 맞았다. 알게 모르게 보리에게 고양이처럼 사는 법은 배웠나 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행복한 거구나... 낮은 점수를 받은 질문들은 관심을 기울이고 내 삶 속에 조용히 스며들도록 해야겠다. 고양이 코치님! 고마워요~

 

고양이가 추구하는 삶의 철학은 ‘먹기, 놀기, 잠자기, 편안함에 신경 쓰기, 마음에 다는 것만 하기‘라는 몇 단어로 요약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자신의 행복에만 집중하는 고양이의 삶은 우리의 삶에 비하면 나아도 훨씬 낫다.
이 쾌적한 삶의 방식 덕분에 고양이는 스트레스 없이 산다. 고양이의 유일한 우선순위는 바로 자신의 평안이기 때문이다. 지기의 행동을 지켜보고,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나는 또 다른 시각과 또 다른 세계관을 갖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성숙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독자 여러분도 어서 고양이의 시선과 생각, 철학 속으로 들어와 고양이처럼 삶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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