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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멋스러운 무단횡단 - 아이들과 함께 유럽 자유여행을 꿈꾸는 부모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이은경 지음 / 착한책방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난 여행을 좋아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주 가지 못한다. 아무래도 여행이라는 거창한 단어에는 무엇보다 돈도 많이 들고 꺽정씨가 시간 내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집돌이인 밤톨군을 설득하는 게 가장 어렵다. 나도 기본적인 집순이라 집에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심심할 겨를도 없는 타입이지만 이상하게 밖에만 나가면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진다. (물론 예외는 있다. 밤톨군과 놀이터에만 가면 그렇게도 집이 그립다.) 그런데 가족과 함께 여행은 살짝 망설여진다. 꺽정씨와 단둘이 여행은 꽤 재미있지만(그랬던 걸로 기억하지만) 밤톨군은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먹는 것부터 자는 것까지 몇 배의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해낸 사람이 여기 있다. 밤톨군만큼 어린 건 아니지만 이제 초등학교 2,3학년인 연년생 두 아들과 유럽 자유여행을 떠났다.
과연
여행에 적당한 때가 있는 걸까.
일상을 멈추고 여행지로 떠나기 가장 적당한 때는 언제일까.
그럴 때가 있긴 한 걸까. (p.27)
진짜 여행에 적당한 때는 있을까? 때가 있다 한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돌아다닐 만큼의 체력이 남아있을지도 의심스럽다. 맨날 말 버릇처럼 밤톨군이 사춘기가 올 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거라고 다짐한다. 내 인생에서 언제나 1순위는 '나'인 이기적인 엄마라 여행도 혼자 가는 것만 계획한다. 우리 셋의 가족 여행, 그러니까 유럽처럼 먼 여행은 언제가 적당한 걸까? 아마 그런 때는 오지 않겠지. 여행은 지르는 거야. 급하게 가까운 동남아라도 검색해본다.
아닐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그래서 놀랐던 아줌마의 증상들 몇 가지. 난 아닌데?라며 발 빼지 마세요. 함께 해주세요. 솔직하게.
1. 여전히 예쁘고 싶다.
2. 완전 날씬하고 싶다.
3.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이 끝없다.
4. 여전히 어려 보이고 싶고 나이가 있으니 이제는 세련돼 보이고도 싶다.
5. 잘 나온 사진 한 장에 기분이 최고다.
(하지만 이럴 확률이 100분의 1 정도로 줄어들었다.)
6. 예쁜 여자를 보면 부럽다.
7. 예쁘다는 말과 살 빠졌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최고다.
(얼굴살은 절대 빠지면 안 됨)
8. 예쁜 곳에 다니고 싶다.
9. 여행 다닐 땐 아줌마도 들뜨고, 아줌마도 멋 부리고 싶다. (p.146)
대박 공감이다. 1에서 9까지 다 내 맘이다. 예전엔 어렸고, 날씬해서 티셔츠에 청바지 하나만 입어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내 기억 속에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근데 이젠 내 나이보다 젊어 보이되 어려 보이고 싶은 마음이 눈에 확 보이는 옷을 입어선 안된다. (왜? 왜 안되냐고? 세일러 카라의 티셔츠 사고 싶다고 했더니 꺽정씨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프리사이즈는 이제 더 이상 프리하지 않다. 더 이상 어리지도 예쁘지는 않아도, 이젠 아줌마란 호칭이 더 익숙해져도 여전히 예쁘고 싶은 여자의 마음이다. 그런데 사진 속 저자는 이런 말하면 안 되는 거다. 싱그럽고 날씬하고 예쁘더라. 빼애애액!! 경!고!
"자기는 어디가 제일 그리워?"
"그립긴 왜 그리워. 난 아무 곳도 그리운 곳이 없는데?"
"그럼 그립지는 않아도 다시 가보고 싶은 도시는 어디야?"
"한 번 다녀왔으니 다음에 다른데 어디 가면 좋을지 생각 중인데?"
대화가 잘 통해서 결혼을 결심한 건데, 이렇게 안 통한다. 후회해도 늦었다. (p.187)
이 대목에서 빵 터졌다. 나는 다행히도 여전히 대화가 잘 통하는 남편과 잘 살고 있지만 그 외에는 갈수록 안 맞는 것 같다. 데이트할 때도 소박하게 김밥천국 같은 곳도 좋아했던 남편이라 소박한 사람이라고 좋아했는데 그냥 입맛이 그런 거였다. 내가 신경 써서 한 요리보다 달걀말이를 더 좋아한다. 회도 안 좋아하고, 내장탕도 싫어한다. 난 없어서 못 먹는데... 게다가 책 취향은 갈수록 더 멀어진다. 하아~
다시 오리라.
꼭 다시 와보리라.
몇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꼭 다시 오겠노라 다짐했다.
또 얼마나 기울어져 있을지 유심히 보리라 다짐했다.
누구와 어떤 모습으로 피사를 다시 찾을지. 정말 다시 찾게 될지 궁금해진다. (p.192)
영국에 있을 때 독일로 열흘 정도 놀러 갔을 때가 떠올랐다. 혼자 여행한 게 아니라 독일인 친구의 집에 놀러 간 거였다. 같이 무단횡단하고 무임승차하고... 그렇게 아낀 돈으로 매일매일 맥주를 마셨더랬다. 독일어로 할 줄 아는 말이라곤 '배고파','이름이 뭐니?''사랑한다' 밖에 없는 내가 독일어로 더빙된 영화도 봤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 중 한 명인 에드워드 존 번스의 그림을 실제로 봤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지를 못한다. 독일 여행의 마지막 날, 난 여기에 또 올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친구는 언제든지 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십 년도 훨씬 더 지났는데 유럽 근처에도 못 가봤다. 꼭 다시 가보고 싶다. 그리고 가보지 못한 곳에도 가고 싶다. 꺽정씨와 밤톨군과 함께...
책을 읽고 나니 취향이 갈수록 차이가 나는 꺽정씨와 아직도 낮잠이 안 끊겨서 업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 많은 밤톨군과 함께 멀리멀리 떠나고 싶어졌다. 잠시 공항에만 머물렀던 프랑스, 이틀 밖에 머무르지 못했던 스위스, 가보지도 못한 이탈리아 등을 그들은 보고, 느끼고, 음미했다. 고사성어와 일러스트 그리고 보기만 해도 빠져드는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내 안의 역마살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예쁜 여행 사진을 남기기 위해 지르고 싶은 렌즈에 대한 고민이 한층 더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