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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야 하는 밤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얼마 전에 읽었던 <차단>을 쓴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신작이 나왔다. <차단>을 흥미진진하게 읽었기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택했다. 이번에는 제목부터가 후덜덜하다. <내가 죽어야 하는 밤>이라니...
몸담았던 밴드가 유명해지기 일보 직전에 간발의 차로 스타가 되지 못했던 드러머인 벤은 어느 날 위기에 처한 여성을 도와주다가 8N8이라는 사이트를 알게 된다. 8N8은 모든 분야에 돈이 부족한, 특히 치안 분야엔 심각한 상황에서 연방 정부와 살인 복권을 합의하기로 했다고 전한다. 10유로만 내면 죽이고 싶은 사람을 추천할 수 있고 8월 8일 저녁 8시 8분에 추천된 모든 후보자들 중에서 한 명을 뽑아 제비뽑기로 선정된 8N8 사냥감은 12시간 동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것이다. 사냥감을 포획하거나 죽이는데 성공한 사냥꾼은 상금 1,000만 유로를 받는다. 첫 번째 사냥감이 너무 잘 숨어서 게임이 원활하지 못한 것에 대비해 추가된 후보가 바로 벤이다. 첫 번째 사냥감은 24살의 베를린에 사는 심리학과 여대생인 아레추다. "아무래도 아빠가 위험에 빠진 것 같아"라는 메시지를 벤에게 보내고 옥상에서 몸을 던진 율레의 병원에서 아레추를 만난다. 둘은 온 세상이 뒤쫓는 살인 게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처음 책 소개를 읽고 영화 <더 퍼지>가 떠올랐다. 사상 최저 실업률과 최대의 범죄율을 잠재우기 위해 1년의 단 하루 동안 모든 범죄가 허용된다는 내용의 영화였던 걸로 기억한다. 보는 내내 쪼는 듯한 영화는 잘 못 보는 편이라 늘 이런 영화는 '출발! 비디오 여행'으로만 본다는 건 비밀. 그런데 뒤에 나온 작가의 말을 보니 <더 퍼지>는 그의 어린 아들이 신생아과에서 죽음을 맞서 싸웠던 때에 본 영화 중 하나였다고 한다. (아이는 지금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하니 걱정마시길...) 아이의 모니터와 연명장치를 계속 노려보고 있을지, 아니면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질지 선택하라는 의료진의 말에 그들은 영화를 보기로 결정했다. 스릴러 영화가 주는 현실 세게의 두려움과 근심을 처리할 수 있었다. 작가는 '미래가 모두가 모두의 적이 된다'라는 아이디어를 '현재 모두가 한 사람의 적이 된다'라는 아이디어로 바꾼다. 그리고 스스로 질문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추천할까?
10유로는 현재 환율(2018일 5월 21일 기준) 12,760원이다. 천 단위 절사해서 1만 원이면 정말로 죽이고 싶은 사람을 추천할 수 있고 살인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누구를 추천할까? 다행히도 그렇게 미운 사람은 아직까지 없어서 추천인은 공란일 것 같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추천했다면? 그리고 내가 사냥감으로 선출된다면? 아~ 생각만 해도 무서워진다. 내가 했던 말들, 행동 등이 떠올랐다. 네티즌 수사대 앞에서 무죄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싸이월드와 카카오스토리를 탈퇴해야 하는 것인가?)
집을 보러 왔을 때 부동산 중개인이 그의 손에 쥐여주었던 건축 회사 팸플릿의 목가적 사진과 똑같은 장면이었다. 부동산 중개인은 팸플릿을 보여주며 "이곳은 아직 정상이에요."라고 자랑했다. 그때 슈바르츠는 경험상 팸플릿이 행복한 곳이라 선전하는 바로 그곳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장소인 경우가 많았다고 대꾸하려다 꾹 참았다. 대개 그런 것은 정면이 아니라 조명이 비치지 않은 이면을 봐야 눈에 띈다. 통계로 봤을 때, 이웃 중 한 명은 아내를 때리고, 딸의 나체 사진을 불법 사이트에서 교환하고, 가시와 독은 개 사료를 놀이터에 두고, 떼쓰는 아기를 라이터로 벌준다는 것을 슈바르츠는 알았다.
(p.p. 251~252)
8N8처럼 무시무시한 게임이 허용이 된다면 어떤 사람들이 참가를 할까? 조폭이나 살인 청부업자들? 그건 아닐 것이다. 100억이라는 어마 무시한 상금이 내걸린다면 남의 목숨을 목숨 걸고 뺏으려 하는 사람들은 넘쳐날 것이다. 절대 악의 기운을 사정없이 내뿜는 사람들이 아니라 누가 봐도 평범한 얼굴을 가면으로 쓴 사람들이 말이다. 인터넷에 어떤 사건이 뜨면 사람들은 자신이 접한 정보가 진실이라고 믿고 정의감에 불타서 행동한다. 상대방의 SNS에 가서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을 서슴없이 뱉고 오기도 한다. 현대판 마녀사냥이다. 대상이 된 사람이 평생토록 트라우마에 시달리든 말든 상관없다. 오늘도 인터넷 속 세상에선 사냥이 한창이다. 다음 대상은 내가 혹은 당신이 될지도 모른다.
군중은 진실을 갈망한 적이 없다.
입맛에 맞지 않으면 증거도 외면해버리고,
자신들을 부추겨주면 오류라도 신처럼 받드는 것이 군중이다.
그들에게 환상을 주면 누구든 지배자가 될 수 있고,
그들의 환상을 깨려 들면 누구든 희생 제물이 된다.
- 귀스타브 르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