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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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은 톰 해저드는 시간에 휩쓸리지 않는 남자다. 그의 원래 이름은 에스티엔느 토마 앙브루아즈 크리스토프 아자르였다. 그는 439살이라는 시간을 살면서 그 후로 많은 이름을 가진다. 나이를 먹어도 그대로인 그의 외모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늙지 않는 마술을 걸었다며 마녀로 몰려 익사를 당한다. 어머님의 유일한 유품인 류트를 들고 런던으로 도망친 그는 시장에서 과일을 파는 로즈와 그레이스 자매를 만난다. 로즈와 사랑에 빠져 매리언이라는 딸도 낳았지만 역시나 그대로인 그의 얼굴은 모녀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어느 날 로즈에게서 매리언이 톰과 같은 증상이 있다는 걸 알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매리언을 찾아야 했다. 수 세기 동안 그는 매리언을 찾는 중이다. 그런 그에게 앨버트로스(앨버트로스를 장수하는 동물로 여겼기 때문) 소사이어티의 수장인 헨드릭을 만나게 되는데...

"8년. 그게 규칙이야. 앨버가 한 곳에 8년 이상 머물면 곤란한 일에 휘말리게 돼 있어. 그게 바로 '8년 규칙'이야. 단 8년 동안만 신나게 사는 거지. 그런 다음엔 내가 보내는 곳으로 떠나야 해, 거기서 새 인생을 시작하는 거야. 과거의 유령이 없는 곳에서."  (p.153)

앨버 소사이어티의 규칙은 한 지역에 8년 동안만 머무는 것 외에 절대로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는 규칙이 존재한다. 하루살이 같은 인간과 사랑에 빠져서는 안된다. 한순간도 긴장을 풀어선 안된다. 실수로 발을 헛딛는 순간 자신을 포함한 모든 앨버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도 했다. 사랑 없이 평생을 산다는 게 가능할까? 그리고 8년이라는 시간이 보통의 사람들에겐 길지도 모를 시간이지만 앨버들에겐 6개월에 한번씩 옮겨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6개월에 한번씩 이사다녀라고 하면... 으아아아~ 요즘 이사 때문에 신경 쓸 게 많아서 그런지 톰의 어려움이 팍! 느껴지더라.

그녀가 류트를 옆에 내려놓고 내게 입을 맞추었다, 내 눈이 스르르 감겼다. 흐릿해져 가던 세상은 금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남겨진 건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그녀는 별이었고, 하늘이었으며, 바다였다. 특별히 주어진 시간의 한 조각. 우리는 그 안에 사랑의 꽃봉오리를 심어 놓았다. 마침내 키스가 끝이 났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밖에서 교회의 종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어느새 세상의 모든 것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p. 211)

진짜 키스라는 게 이런 건가? 그렇다면 나는 아직까지 키스란 걸 못 해본 것임이 틀림없다. (내 입술아! 미안하다. 밥만 먹여서...) 수 세기가 지나도록 또렷하게 기억하는 키스라니... 그녀를 별, 하늘, 바다라고 기억하는 톰을 보며 로즈가 내심 부러워졌다. 얼마 전 다른 책에서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는 걸 봤다. 애칭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나는 꺽정씨에게 애칭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조용히 "산또..."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귀여운 어감이라 눈을 반짝이며 무슨 뜻이냐며 물어봤더랬다. 순간 동공의 지진을 느꼈다. 그것은 상또라이...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외쳐보아도 부럽기 그지없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으로 영화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먼저 듣고 책을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가 아닌 다른 톰 해저드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의 행동, 말투, 눈빛 모든 것이 베네딕트 컴버배치였다. 영화로는 어떻게 표현이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다양한 시간과 장소 속에서 르네상스 그림처럼 한결같은 그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이제 분명해졌다. 현재는 매 순간 속에서 영원히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 살아야 할 현재가 많이 남아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면 비로소 시간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나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을 거고. 왜?
내가 바로 미래니까.  (p.p. 498~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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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기술 - 나쁜 감정을 용기로 바꾸는 힘
크리스틴 울머 지음, 한정훈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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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좀 늦된 아기였다. 늦게 뒤집었고, 늦게 기어 다니다가 내 돌잔치 때 처음으로 바나나를 먹겠다는 일념 하에 일어섰다. (그땐 바나나가 귀했다고 한다.)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일어섰으나 다리가 아파도 앉을 수가 없었다. 달라진 눈높이에 두려움을 느꼈을 거다. 한참을 서있다가 울어버렸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거다. 그 후로 난 뛰어다니다가도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그 다음날 다시 넘어지는 걸 반복했다. 너무나 자주 넘어져서 (심지어 매번 같은 자리에서) 엄마는 내가 모자란 아이가 아닐까 의심도 했다고 할 정도니... 어쩜 두려움이란 이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두렵지만 그 감정을 받아들이면 생각보다 두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낯설고 두려운 상황을 자주 직면하게 된다. 그때마다 그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저 바나나를 꼭 잡고 울기만 했던 아기 때로 돌아가곤 한다. 그땐 주위 어른들이 안아주고 조심스레 자리에 앉혀줬지만 지금은 모든 상황에서 주위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두려움이란 감정이 싫어서 앉아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저자인 크리스틴 울머는 미국 모굴 스키 국가대표였다. 그랜드티턴(가장 아찔한 산악 중 하나)을 스키로 강화한 최초의 여성이라고 한다. 아기 때 몸치인 걸 몸소 증명한 나에겐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 하얀 절벽을 스키를 타고 거침없이 내려오는 걸 바라보는 이는 그저 감탄만 하면 되는 일이지만 절벽 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는 건 역시나 두려운 일일 것 같다. 지금은 심리 상담사로 활동하면서 두려움이라는 주제 하나에만 몰입해 연구를 하며 독창적인 두려움 전문 심리 상담 프로그램까지 개발했단다.

두려움은 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두려움을 회피하는 동안 당신은 계속해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없다. 오히려 그 회피가 두려움을 붙드는 역설적인 상황을 가중시킨다. 두려움은 당신의 것이다. 남이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두려움은 당신의 일부다. 당신이 당신 자신과 끊임없는 전쟁,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벌이면 벌일수록 당신의 내면은 아수라장이 된다.  (p.p. 9~10)

평생 동안 두려움에서 도망 다닐 때조차 두려움은 나에게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으로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진다. 도망가기만 한다면 불면증과 스트레스, 불안, 정신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번아웃 등 요즘 문제 되고 있는 것들이 따라올 가능성 또한 높다.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떠올랐다. 주인공 라일리의 주요 컨트롤 감정은 '기쁨'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이사로 인해 라일리는 더 이상 기쁘지 않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감정들은 노력을 하고 '슬픔'을 삶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매번 극복해야 한다고, 이겨내야 한다고 배우는 '두려움' 또한 나의 한 모습이다. 저자는 두려움을 인정하면 강해지며, 현명해지며, 안전함을 느끼며, 선명해지고,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이렇게까지 두꺼울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든다. 원서 편집자가 저자를 좀 막아주었다면 조금 더 완성도 있는 책이 나오지 않았을까? 개인이 이야기가 논지를 벗어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든다. (물론 저자의 아드레날린 넘치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기는 하다.) 현실의 답답함과 미래의 불안함에 오늘도 지치고 두려운 현대인들에게 두려움을 인정하라는 메시지는 신선하다. 아마존 자기계발 1위의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두렵기 때문일 거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원서는 어떤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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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시차
룬아 지음 / MY(흐름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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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기발하거나 흥미진진한 스토리도 없는, 누구나 느낄만한 잔잔한 독백 같은 글을 왜 읽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에세이가 좋아진다. 이 책의 부재처럼 우리가 다르고 닮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사적인 시차>는 인터뷰 웹진 '더콤마에이'의 작가 룬아가 직접 쓴 글과 찍은 사진이 있는 에세이다. 어딘가 시크해 보이는 이름의 뜻이 궁금해졌다.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정관사 'the'와 보편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부정관사 'a' 사이에 있는 콤마. 보통의 것들이 이 공간을 통해 특별해진다는 뜻이란다. 이름만큼 예쁜 글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나 좀 꾸며봤소!'라며 힘이 잔뜩 들어간 문장이 아니라 무심히 걸친 가디건에서 온기를 느끼는 듯한 글이었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늘 생각하지만 그게 쉽게 안된다. 글에도 얼굴이란 게 있어서 타고나는 걸까?

신은 나를 만들 때 눈치를 너무 많이 넣었다.
예민이라든지 민감이라든지 하는 것들도.
귀도 잘 안들리고 눈도 나쁜데 왜 굳이 촉만 좋게 말야.
덕분에 엄청 피곤하긴 하지만 괜찮다.
잘 활용하면 달란트가 되기도 할 테니까.

나는 나의 가장 미숙하고 취약한 부분까지도
좋아하기로 결정한다,
이다지도 비장한 이유는,
저절로 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p.92)

한때 '신이 나를 만들 때' 테스트하기가 유행할 때가 있었다. 그 결과로 나는 순수함을 한 스푼 넣고 귀찮음을 세 스푼 넣고 똘끼를 왕창 붓는 결과가 나왔다. (이번에 기억나서 다시 해봐도 또 같은 값이다. 진짜 그런 건가?) 가끔씩 생각해본다. 나에겐 어떤 달란트가 있는지... 사실 신은 나에게 많은 걸 주셨다. 무언가 해보고 싶어 시도하면 남들보다도 빨리 좋은 결과가 나오곤 했다. 하지만 나의 재능은 그저 다 취미가 되었을 뿐이다. 신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재료 중 하나인 열정과 끈기를 깜빡하셨기 때문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1도 보이질 않는다. 작심삼일이라도 매일 100번 하면 1년이라는데 난 그것마저 열정적으로 하질 않는다. 누굴 탓하랴.

사진을 좋아한다. 아무리 미술관을 다녀봐도 사진전이 제일 좋다. 암실에 들어가본 적도 없고 원리 같은 건 아무리 들어도 잘 이해가 안 가지만 나만의 시선으로 기록을 남긴다는 것, 시간을 시각적인 사물로 잡아둔다는 느낌이 좋다.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없다는 점은 오히려 해방감을 준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사진은 찰나를 잡은 행위다. 같은 장소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사진은 찍을 수 없다. 놓친 순간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사진을 찍은 사람은 스쳐가는 모든 장면에 마음을 던져본다. (p.123)

나도 사진을 좋아한다. 작가처럼 사진전을 더 좋아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책 속 사진들은 내가 흔하게 생각하는 일상과 약간의 거리는 있지만 누군가에겐 그것조차 일상일 테지. 한 여름의 나른함 속에서도 에어컨 바람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청량감이 느껴지는 사진들이 매력적 있었다. 작가의 색깔이 묻어나는 사진들로 가득했다. 나도 내 카메라가 생긴 이후로 무수히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아직도 내 색깔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바라는 사진은 이런 감성적이며 약간 몽환적인 느낌인데 내 사진을 둘러보면 쨍한 색감과 베일 듯한 날카로운 선예도를 자랑한다. 내 취향에 반하는 사진만 찍을 수 있다는 게 참 재미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도 사람들마다 다른 사진을 담는다. 사진의 매력은 그런 것 같다. 나만의 것. 찰나를 영원으로 만드는 것...

두 사람 사이의 시차란
불편하고도 묘하게 사적이다. (p.187)

<사적인 시차>란 제목이 좋다. 시차는 한 물체를 두 개의 다른 시선으로 보았을 경우에 생기는 물체 위치의 차이를 의미한다. 시간의 차이를 의미하기도 한다. 거리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 생기는 차이를 시차라고 표현한 게 재미있다. 시차는 다름이다. 틀림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도 정답은 없을 거다. 다양한 다름들이 존재할 뿐... 그래서 우리는 다르고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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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동물원
진 필립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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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 네 살 생일이 지난 링컨과 함께 동물원에 온 조앤은 폐장 시간에 맞춰 출구로 향하려고 할 때 무언가 터지는 소리를 듣는다. 허수아비들이 길게 줄지어 서있는 연못에선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이리저리 허수아비들이 쓰러져있다.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허수아비라고 하기엔 너무나 작은 팔이 움직인다. 그리고 총을 든 사람을 발견한다. 그녀는 링컨을 꽉 붙들고 안아올린다. 그리고 달린다. 지금 아이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그녀 밖에 없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아주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p.73)

아이를 낳고 나서야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밤톨군을 낳기 전에 나는 애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우는 아이는 시끄러웠고, 얼굴에 이유식 범벅을 한 아이는 너무 지저분했다. 끝도 없는 "왜?"라는 질문에 짜증이 절로 났고,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애들은 좀 묶어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때도 많았다. 지금은 우는소리를 들으면 안쓰럽고,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가짜 울음을 보면 귀엽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아기 새처럼 이유식을 받아먹는 모습을 보면 기특하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늘어놓고, 통통 튀는 발걸음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이젠 내 아이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발을 헛딛거나 밤톨군보다 더 큰 아이가 장난으로라도 위협을 가하면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다. 만약에 소설 같은 일이 생긴다면? 아~ 이건 정말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차오르려고 한다.

나와 다르게 조앤은 침착하고 좋은 엄마였다. 내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공포 속에서도 아이의 질문에 눈높이에 맞춰 답해주며 아이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한다. 아이의 딸꾹질에도, 배고픔에 칭얼거려도 침착하게 대처한다. 나라면 밤톨군의 입을 막거나 불안함에 화를 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나도 엄마이기에 밤톨군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 하겠지. 밤톨군에 비하면 내 목숨 따위...

엄마는 총알도 막을 수 있어. 그녀는 그렇게 덧붙이고 싶다. 엄마는 절대로 널 다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뭔지는 모르지만 엄마는 저 밖에 있는 것보다 강하고 빠르고 똑똑해. 사실은 할 필요조차 없는 말이다. 링컨은 이미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그녀 자신도 그 말을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p.114)

보통 책을 읽는 도중에는 다른 사람의 리뷰를 읽거나 맨 뒷장을 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예외로 두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있는 스포 없는 스포를 다 읽고 난 뒤에 읽어도 조마조마해서 책장을 넘기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내가 이렇게도 간이 조막만 했던가?) 링컨과 조앤의 이야기가 먼 나라의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엄마와 아이의 이야기이다 보니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다. 수시로 긴장감에 책장을 덮어버렸다. 사랑스러운 링컨의 묘사가 나올 때마다 더 진정이 안된다. 어두운 곱슬머리와 깜빡이면 기다란 속눈썹을 가진 포동 포동하고 부드러운 아이가 잘못되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손이 떨려서 그다음 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럴 땐 행복한 삶의 방식을 논하는 책을 도중에 읽었다. 내 마음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아마 밤톨군을 낳기 전에 읽었더라면 콜럼바인 사건이나 미국의 각종 총기 사건을 비판하며 읽었을 테지만 소중한 아이가 있는 지금은 그렇지를 못하다. 그저 무섭고 떨리기만 한다.

<밤의 동물원>은 나처럼 간이 조막만한 사람은 함부로 시작하면 안 되는 책이다. 너무 재미있어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는 책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덮었다가 폈다가를 계속 반복하게 된다. 아이가 있는 엄마에겐 그 어떤 소설보다 공포스럽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난 안 볼 거다. 소설로도 미칠 것만 같은데 영화로 보면 심장 터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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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빙 미스 노마 - 숨이 붙어 있는 한 재밌게 살고 싶어!
팀, 라미 지음, 고상숙 옮김 / 흐름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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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한 표지의 책을 만나다. 해맑은 표정의 사람보다도 더 커 보이는 개와 긍정 기운 폴폴 풍기시는 할머니께서 새빨간 오픈카에 앉아 계신다. 숨이 붙어 있는 한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할머니의 에세이이려나?

아흔 살의 노마 할머니는 남편을 떠나보내고 자궁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죽음이 그녀에게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녀는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병원에서 각종 약을 먹으며 삶을 이어나가는 것 대신 아들 내외와 함께 캠핑카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햇살 좋은 8월 어느 날 아침, 그들은 여행길에 오른다. 이 책은 노마의 아들과 며느리의 기록이다.

노마 할머니는 미시간을 떠나 그동안의 그녀가 겪은 것과는 다른 새로운 일들로 그녀의 남은 삶을 차곡차곡 채웠다. 열기구 타기, 승마, 페디큐어, 새로운 헤어스타일 등 수많은 생애 첫 경험을 한다. 아흔 살의 나이로도 삶을 즐기고, 죽음에 직면하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에 작은 감동이 일었다. 결혼 후 67년 동안 미시간 주를 떠나본 적 없는 그녀에게 32개 주 여행은 큰 용기가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 같다. 말기 암 환자라 힘든 점도 많았겠지만 할머니는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여행길의 모든 걸 흡수한다. 난 그녀의 나이의 반조차 살지 않았는데도 새로운 것에 시도보다는 반복적인 일상에 익숙해하고, 이 나이에 내가 뭘...?이라는 생각도 꽤 자주 한다. 할머니 입장에선 핏덩이인 내가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삶은 부서지기 쉽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 머릿속에만 있을 뿐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우리는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항상 우리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못 본척하며, 말로 표현해야 할 것을 다음으로 미루곤 한다. 팀과 내가 계속해서 다음에 하자고 미룬 것은 바로 팀의 부모님과 나이 듦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는 것, 그중에서도 특히 부모님이 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목구멍에 걸려있던 그 말을 꺼내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왜 우리는 항상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피하기만 했을까? 그 순간이 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삶의 마지막에 직면하는 순간 부모님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p.p.27~28)

나에게 내일이 있다고 당연하게 믿는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래오래 내 곁을 지켜줄 것이라고 늘 믿는다. 하지만 이제 결혼식 자리가 줄어드는 만큼 장례식에 가야 할 일이 생긴다. 언젠가는 우리 엄마, 시부모님의 장례식을 가야 할 때도 올 것이다. 하지만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으신지 여쭤보는 건 상상도 못하겠다.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지고, 그저 회피하고 싶다. 대신 엄마와 하고 싶었던 것 하나만이라도 더 하도록 노력해봐야겠다. (그런데 엄마랑 긴 여행은 자신이 없네.)

하지만 내 죽음에는 내가 관여하고 싶다. 그저 병원 침대에서 매일매일 아픈 사람들과 함께 보내고 싶진 않다. 할머니처럼 캠핑카를 타고 자유롭게 여행하는 건 불가능할지라도 말이다. 예쁘게 죽음을 준비하고 싶다. 영화 <파니 핑크>를 보고 내 취향에 맞게 관을 짜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집에 둘 곳이 없다. 창고가 있는 서양 것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대신 내 수의는 내가 만들자라고 다짐했다. 삼베에 무명실로 곱게 한 땀 한 땀 꽃수를 놓을 테다. 저승길만은 패셔니스타가 될 테다.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할지, 멀지 알 수는 없나 기왕이면 예쁜 옷 입고 가고 싶다.

노마 할머니는 여행 중 일기를 썼다. 죽음의 두려움이나 질병의 고통 같은 기록은 전혀 없었다. 대신 삶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들로 채웠다. 삶은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다. 그래서 삶은 여행이라고 하나보다. 시작도 끝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여행. 여행은 어떤 사람과 함께 가느냐가 상당히 중요하다. 불평쟁이와의 여행은 불만이 가득하고, 초긍정꾼과 함께하는 여행은 작은 것 하나마저 소중하다. 난 어떤 사람일까? 마지막까지 함께 하고픈 여행 친구이길 바라본다.

엄마는 나에게 인생에 대해서 "Yes!"라고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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