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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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작가를 처음 만났다. 그동안 문학을 멀리한 탓도 있었고, 특정 작가를 제외하고는 한국문학에 그리 크게 관심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신간소식에서 김연수 작가를 만났다. 그리고나서 상속자들에서 김연수 작가의 원더보이가 나오더라. 요즘 두루두루 읽으려고 노력하는 터라 작가의 문체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바로 스마트폰을 통해 김연수 작가를 검색해보았다. 얼마전 낭독회도 하시고, 벌써 등단 20주년이라는 소식에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정말 나는 김연수 작가의 작품을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일까. 딱히 생각이 들지 않았다가 2009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가지 즐거움'이 떠올랐다. 아, 완전히 처음 만난 것은 아니었구나. 그리고 내가 읽고 싶어했던 책 리스트에도 김연수 작가의 책이 있더라. 도착한 책에 커버를 씌우곤 가만히 바라보았다. 반갑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작가를 인식하게 된 시점부터 남자라는 것을 알았으니 읽으면서 '남자였어?'하고 놀라지는 않았지만, 참 글이 여성스럽다고 생각했다. 읽고 있던 부분의 화자가 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잔잔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단조의 곡같은 느낌이랄까. 무엇인가 뚜렷하지 않은 낡고 빛바랜 것들을 꺼낸 느낌이다.

 

 

  <깊은 밤, 기린의 말>

  인내심이란 뭔가 이뤄질때까지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포기하는 일을 뜻했다. 견디는 게 아니라 패배하는 일. 엄마가 알아낸 인내심의 진정한 뜻이 그게 맞다면, 그 1년이 지난 뒤부터 엄마는 진짜 인내하게 됐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우리 머리 위에는 거대한 귀 같은게 있을 거야. 그래서 아무리 하찮고 사소한 말이라도 우리가 하는 말들을 그 귀는 다 들어줄 거야. 그런 귀가 있어 깊은 밤 우리가 저마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들은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은 거야.

 

  자폐아 태호의 가족들. 여기서 인내의 의미인 포기는 손을 놓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여전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엮여있다. 그리고 포장된 무언가로 위로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자체로 '거대한 귀'가 다 들어준다. 다 포용해준다. 그렇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서귀포시 정방동 136-2번지에서 바다보면서 3개월 남짓 살았어. 함석지붕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그 사람 부인이 애 데리고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시 정도까진 올라가지 않았을까? 그 석 달 동안 밤이면 감독님 품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면서 누워 있었지.

 

  화자의 이모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한 제주도의 집 함석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너무 로맨틱해서 부럽더라. 애틋한 사랑의 기억. 그런 이모의 꿈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죽는 것이었는데,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이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영화감독도, 아이도, 미국에서의 남편도. 이모는 사랑하는 사람을 대신하여 사랑했던 사람의 아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관계를 연결한다.

 

  죽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보게 될 얼굴이 평생 사랑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더라도 그건 불행하다고 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 무조건 결혼을 하고, 그다음엔 아이를 낳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야.

 

 

  <주쌩뚜디피디를 듣던 터널의 밤>

  큰누나는 두사람의 삶이 서로 겹친다는 것을 알게 도ㅒㅆ단다. 그래서 엄마가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 그건 우리도 또 한번의 삶을 사는 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말하면, 우리가 또한번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엄마 역시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렇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터널에서 누군가 노래를 부른다. 화자는 큰누나와 함께 엄마를 찾아 안산의 그 터널로 향한다. 그리고 네 번을 통과하면서 엄마의 이야기를 나눈다. 그 안에는 그들의 추억이 있다. 이제 세상에 없는 엄마와의 추억이다. 화자의 졸업식에 빨간스커트를 입고온 엄마와의 추억. 그리고 죽기전 옷을 다 꺼내서 다시 입어보며 세월을 오가던 엄마와의 추억. 네 번을 오가는 동안 화자는 계속 못듣다가 마지막 터널의 끝에서 "주쌩뚜디피니", "쥐뻬리따꾸피앙상"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다. 여기선 어쩐지 내가 오싹하더라. 저건 프랑스어고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안다, 사랑은 떠나갔으니까. 한번만 더 둘이서 사랑할 수 없을까'라는 내용의 노래라고 한다. 엄마가 죽기전에 반복해서 들으면서 부르던 노래.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나는 누구와 기억이 연결되어 있을까?

 

 

  단편들로 이루어진 이번 소설집은 관계에 대해 풀어내고 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서로의 기억과 기억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관계가 연결되어 있다고 작가는 여러 소재들을 들어 이야기 한다. 그렇다. 우리는 그 관계속에서 추억을 만들면서 살아간다. 아름답게. 아름답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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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비틀거릴 때 -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마음앓이 중인 나를 위한 심리카운슬링
랜디 건서 지음, 박미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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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비틀거릴 때

 

   언제나 사랑이 솜사탕같진 않다. 갓 만들어진 솜사탕같이 동글동글하고 달콤하니 입에서 살살 녹는 때가 있는가 하면, 내 눈물로 인해 찐득해진 설탕덩어리가 내 손을 더럽히고 있을 때도 있다. 사랑을 시작할 때는 누구나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다 내놓을 듯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사랑은 햇빛과 같이 강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하나씩 재기 시작하면서 사랑에 안개가 끼기 시작한다. 그 안개 속에서 우리는 질퍽거리는 물웅덩이를 피하기가 어렵다. 그런 장애요인을 혼자서는 헤쳐나가기 어려우니 손 붙잡고 서로를 의지해야 할 것인데, 우리는 그 손을 놓을 생각을 한다. 햇살에 눈부시던 사람이 안개 속의 그 사람과 더 이상 똑같이 느껴지지 않아서. 왜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는 걸까?

 

  처음을 기억하면 헤어질 연인은 없다. 그러나 대화가 필요하다.

  처음은 언제나 달콤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 달콤함이 녹아버리는 걸까? 오해와 실망이 자리하며 미소가 사라진다. 그런 시기가 오면 남자들은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여자들은 친구들을 만나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게 과연 치유가 될까? 서로를 바라보자. 초기 관계를 떠올리는 것이다. 달콤한 그 시절을.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분석한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차분히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서로 상처받은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생각보다 힘들다.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나가면 서서히 두 사람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렇게 두어서는 안 된다. 격양된 상태라면 차분할 때까지 시간을 갖는 것은 괜찮다. 대신 가라앉고 나면 서로 끝까지 진지하게 듣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도 끝까지 온화한 태도를 지켜라. 아울러 상대방이 열린 마음으로 당신의 얘기를 듣고 비난 섞인 반응도 겁내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야 두 사람의 진실된 대화는 이루어질 수 있다.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나는 절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늘 처음을 생각했다. 이 사람을 내가 그렇게 소중하게 대했는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대화가 단절됐을 때, 그것을 표현할 수 없음에 마음이 아팠다. 진지하게 대화를 하자고 하면 그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했고 나는 결국 포기했다. 처음을 생각하며 참아 넘기던 내 마음이 단절된 대화 앞에서 바싹 말라버린 것이다.

 

  내가 실망한 만큼 그도 나에게 실망했다. 실망을 밀어내는 유일한 힘은 신뢰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딱 맞는 옷같은 사람을 찾을 수 없다. 누구나 실수는 한다. 그리고 실망도 한다. 그러나 그게 나만 그러겠는가?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내가 실망한 만큼 그도 나에게 실망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역지사지의 배려가 필요한 게 아닐까? 하지만 정작 내가 서운해지면 그의 마음은 들리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해서 그것을 꿍- 하게 담아두지는 말자.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대화다. 그리고 약속을 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는다. 그렇게 신뢰를 쌓으면 실망은 멀어진다. 물론 말은 쉽고, 세상은 변수가 너무 많다. 그러나 그건 자신을 위한 변명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상대방을 조금만 서로 배려한다면 서로 마음 다치게 하는 일은 줄어들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상대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일까.

  사랑에 빠진 커플들. 특히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여자들은 늘 궁금하다. 나는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일까? 나는 그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을까? 매일 들어도 질리지 않고, 매일 들어도 궁금한 이야기다.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내가 그가 곁에 다가옴으로써 나보다 더 그를 헌신적으로 돌본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지낼 수는 없다. 어느 순간 우리는 이해득실을 따지기 시작한다. 무조건적인 희생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애인이 내 삶을 대신 살아주는 것은 아니니 자기자신을 언제까지나 뒷전으로 둘 수는 없다. 만약 사랑하는 그가 조금 변했다고 생각할 때는 역지사지로 생각해보자. 그가 균형을 잃고 내게 너무 헌신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는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나의 잘못도 인정하면 희망은 있다.

  초기의 관계에서 많이 멀어졌다고 생각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이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지내고 싶어한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상대방의 잘못뿐만 아니라 당신의 잘못도 기꺼이 바라보자. 자발적인 호기심을 되살리려면 두 사람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연애는 혼자하는 것이 아니니까. 잘못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실망했다면, 그도 실망했고, 그가 잘못했다면, 그 잘못에 대한 영향력의 일부는 내게도 있을 것이다. 상대방을 나무라기 전에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자. 내가 어떤 잘못을 한 걸까? 부부는 일심동체다? 아니다. 부부는 이심이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보며 자란 남녀는 끝까지 이심이체다. 그렇기에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배려한다면 관계 회복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독플레이.

  사소한 일로 자주 실망하면 더 이상 도움을 청하지 않게 된다. 한번 부정의 소용돌이가 시작되면 두 사람은 평행선을 달리고, 결국 각자의 문제를 혼자 처리할 수밖에 없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때는 든든하다는 생각은 커플들이라면 누구나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사소한 실망이 계속 쌓인다면 결국 손을 내밀지 않게 된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보다 체념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게 팀워크는 와해되고 철저한 단독플레이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은 습관이 된다. 오래될 수록 고치기 힘든 습관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습관으로 배어버리기 전에 의식하는 것이 제일 극복하기 좋겠지만, 습관으로 배어버렸다고 해도 이는 두 사람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같이 만들어야 하는 보금자리 지수.

  상대방에게 안식처같은 존재인지 생각해보자. 나는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손을 내밀 때 믿고 잡을 수 있는지 자신에게 그리고 그에게 물어보자. 처음에는 누구든지 아무 조건 없이 서로를 돕지만 관계가 무르익을수록 늘 제공하기는 어려워진다. 더군다나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단독플레이를 하게 되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다.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행복해지니까. 

 

 

  나는 참 많이 울었다. 유난히 생각나는 상황들이 있었다. 그로 인해 내 마음 속에 자리한 상처가 다시 터져버린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내 마음이 다치지 않기를,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다음 걸림돌들을 정리해본다. 실망, 권태, 갈등, 돌봄, 집중, 단독플레이, 보금자리, 동행. 바로 이 여덟가지 걸림돌. 관계에 있어 이 걸림돌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 걸림돌을 극복하고 디딤돌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나 실수는 한다. 안아플 수도 없고, 관계가 언제나 처음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은 두 사람이 노력하는 만큼 행복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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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퀘스천 One Question - 내 인생을 바꾸는 한 가지 질문
켄 콜먼 지음, 김정한 옮김 / 홍익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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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퀘스천

 

  우리는 살면서 난관에 봉착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그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 해답은 여러 곳에 숨어있다. 그 중 하나는 멘토를 만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 명의 멘토가 아닌 여러 명의 멘토를 만난다. 인생에 대한 멘토, 연애에 대한 멘토, 직업에 대한 멘토 등등 삶의 분야는 아주 다양하기 때문이다. '원 퀘스천'은 다양한 멘토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내 갈림길에서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기회

  우리는 기회를 스스로 시작하고, 끝내고, 심지어 만들기도 ㅏ지만 대부분의 경우 앞으로 무엇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런 일을 아주 능숙하게 해나가는 데 반해서 어떤 사람은 번번이 실패하고, 탈락하고, 그리하여 아주 형편없는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그런 차이는 도대체 어디서 시작되는 걸까요? 나는 여러 요인들 가운데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으로 두려움 없이는 기회도 없습니다. 바로 두려움이 우리 삶의 나침반 구실을 한다고 여겨지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기회를 만나고 만든다. 그리고 그것들을 맞대응하기도 하고, 흘려보내기도 한다. 기회는 선택이다. 그리고 선택에는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기회비용이 따라온다. 결국 선택은 변화를 암시한다. 내가 갈림길에서 선택했을 때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기도,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내가 그것을 지나쳤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선택했을 때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대개 선택에서 갈등한다. 그 이유는 바로 선택에서 오는 변화의 두려움 때문이다. 사람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기에 우리는 변화로 인해 나타나는 알 수 없는 안개같은 두려움에 대해 갈등한다. 하지만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급변하는 현 사회에서 도태된다. 그렇기에 변화에서 오는 두려움에 대해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지금의 안락함 속에서 현상유지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생각해볼 것은 그 현상유지가 과연 현상유지일까, 도태되는 것일까? 누군가가 수백 번, 수천 번 말해준 들 자신의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어렵다. 그렇기에 스스로 생각해보자. 기회는 인생에 단 한 번 오는 것이 아니다. 실패해서 아주 형편없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많은 기회들이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그 기회를 맞이할 준비를 미리 하는 것은 어떨까? -실패는 운과 외부영향도 있지만, 자기 자신이 그 기회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얼마나 되어있는 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실패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기쁘게 기회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꿈을 찾고 도전하려면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인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말은 꿈을 찾아 도전하는 청년들에게 딱 어울리는 조언입니다.

  아이디어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그 아이디어가 기획이 되고 표면으로 드러날 때 그 아이디어는 자신의 것이 된다. 브레인스토밍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온다. 가령 예를 들어 예전 브레인스토밍 때, 장난삼아 '과일 소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당시에는 향만 첨가한 몇 가지의 과일 소주가 유행이었다. 향만 첨가한 후 일반 소주값보다 꽤 높게 책정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한 사람이 말했다. '수박을 잘라서 껍질만 남도록 파내고 소주와 수박을 같이 넣어주면 안돼?' 그 말이 나오고 2년 뒤쯤이었을까. 실제로 소주가 과일에 담겨나오기 시작했고, 향이 아닌 과일과 소주를 믹서기에 넣고 갈아서 나오는 과일주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렇듯 누구나 생각은 하지만 쉽게 실행으로 옮기진 못한다. 꿈을 꾸고 있다면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말로만 꿈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결단력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부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버릇에 길들여져 있다. 인생의 목표에 대한 확신도 없이 대학에 진학한다.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가질지 선택을 못했기 때문에 전공을 고르는데도 미적거리게 된다. 그러다 대학 1학년 동안 꿈에 그리는 직업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때 필요한 것은 그런 고민이 아니라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요점은 이렇다. 젊은 시절에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는 버릇을 들이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우유부단하게 살게 될 것이다.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기로 결정했다면,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운 일들에 주눅 들지 말아야 한다. 어떤 방향이든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려고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진보하게 된다.

  요즘은 변화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주입식 교육이 팽배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결단을 내리기 보다 정해진 이정표에 따라가는 것에 더 익숙하다. 그에 따라 우리의 결단력을 그리 많이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결단력을 가지는 일에 대해 매우 소홀한 편이다. 열심히 하라는 것을 바라보고 행했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대학진학 시 전공선택이나 대학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아직까지 대학진학에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전공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점수에 의해 따라가는 경향이 많다. 그렇기에 대학 진학 후 고민한다.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이 길을 선택했는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말이다. 딱히 지금의 전공에서 자신이 갈 길을 못찾았을 경우 자퇴를 하고 전과를 하고, 반수를 하고, 휴학을 한다. 아니면 물 흐르듯이 대학생활을 마치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인생은 누군가가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다. 한 번뿐인 내 인생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결단력이 필요하고, 그 결단에 대한 실행력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용서

  우리는 '용서하고, 잊어버리자'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상처받았던 순간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울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소한 이미지, 극히 짧은 말 한마디조차도 그때의 상황을 되살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들에 붙잡혀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그것들이 결정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상처는 남지는 곪아터지지 않게 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한 번의 행동이라기보다 하나의 연속되는 과정이라고 게일은 말한다. 용서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과 마주 앉아 저녁식사를 할 수도 있고, 신뢰가 깨진 관계에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첫발을 내딛어야 할 수도 있다. 또한 용서는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일 수도 있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비록 상처는 깊게 받았지만, 그 상처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어. 난 당신에게 나쁜 감정을 갖지 않기로 선택한 거야."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런 우리는 흔히 용서를 할 수 있다와 없다의 갈림길에 놓인다. 용서는 사랑과 같다. 누구나 뼈아픈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미 나는 그를 용서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가지의 상황 모두 그 기억을 지울 수는 없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 그것과 전혀 무관한 이야기에서도 떠올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용서의 의미를 다시 짚어볼 수 있다. 용서는 그때 그 상황들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떻게 행동을 하고 있는지에 달린 것이다. 내가 용서한 사람과 용서하지 않은 사람을 대할 때 내 마음이 어떻고, 내 행동들이 어떤지 비교해보면 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가?

 

  감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사를 선택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의무 사항에 더 가깝다. 결국엔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 못지않게 감사를 필요로 한다. 포크 감독을 만난 그날은 나에게 감사의 의무라는 게 무엇인지를 깨다게 해주었다. 하지만더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것은 내가 그 만남을 통해 감사할 줄 아는 힘을 키웠다는 것과 이제 다시는 그 힘을 잃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사실이다.

  오늘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생각한 혹은 말한 사람이 있는가? 나는 우리엄마다. 지금도 철들진 않았지만, 지금보다 철이 없던 시절 엄마에게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설날, 부모님 결혼기념일, 어버이날, 엄마생신 등 기념일이나 명절에만 그랬던 것 같다. 사실 부끄럽기도 하고 해서 말을 제대로 못했다. 그래서 그 때만이라도 열심히 편지를 썼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SNS가 발달함으로 인해 엄마와 메신져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면서 엄마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예전보다 감정표현도 많아졌다. 출근하는 딸래미를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밥상을 차려주시는 엄마. 가끔은 내가 평소보다 일찍 출근할 때면 일어나셔서 꼭 잘다녀오라고 배웅해주신다. 그런 엄마에게 오늘 제일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감사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한다. 자신이 하루에 해야 할 리스트 순위에 올라와있는 '하루에 한 번이상 감사하기.' 항목.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할 때가 아닐까?

 

  세상은 넓고,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을 하며, 그 선택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조언'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얻고 싶어하는 그 '조언'들은 너무 분야가 많고 다양해서 우리는 속속 그 답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럴 때, 이 책을 읽어보면 어떨까? 원하는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 안에서 공감할만한 '조언'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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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위하여 -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
김형경 지음 / 창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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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위하여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

 


  책 이름을 보았을 때, 남자에 대해서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과연 현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들은 예전보다 사는게 더 좋아졌을까? 더 어려워졌을까? 참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양성평등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걸려있는 지금은 너무 힘들다. 어쩌면 과도기의 오류로 여자에게 더 좋은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몇 남자의 습성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나는 아직 남자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의 인생에서 사라지는 남자들
  남자들이 여자로부터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이유 중에는 책임감에 대한 부담이 가장 클것이다. 그중에서도 결혼은 남자들이 가장 큰 중압감을 느끼는 인생 일대사다. 어떤 남자는 여자가 결혼을 재촉하면 이별을 통보하고, 어떤 이는 결혼을 약속한 후에 사라진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들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남자에게 결혼은 책임감이다. 맞는 말이다. 남자들은 사랑하는 여자와 같이 생활할 수 있다는 즐거운 생각보다 아마 한 가정의 가장이 된다는 중압감을 느낄 확률이 더 크다. 결혼은 그저 1차관문이다. 더 크고 무거운 2차관문인 '임신'을 거치면 남자의 책임감은 나날이 무거워지고 술이라는 것이 친한 친구가 되기 일쑤다. 현재 맞벌이 부부도 늘어나면서 서로 가계나 육아에 대해서 분담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남자들에게는 '가장'이라는 단어가 따라 붙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좋은 일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암담하지만 그것을 툭 터놓고 말못하고 웃어야 하는 사람, 그게 바로 남자다.

 

  경쟁 그 속성

  남자에게 경쟁은 삶의 기본 속성이며, 유희이며, 일종의 의식이다. 그들의 놀이나 대화는 경쟁 요소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경쟁을 통해 조직의 위계질서를 정립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다.
  남자는 특정한 개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경쟁한다. 물론 여자도 포함된다. 여자는 항상 부당하게 공격당했다고 느끼며 모든 것을 성차별로 해석하는데, 실은 남자의 언어를 오해한 것이다. 남자는 모든 타인을 차별하는 것이지 특별히 여자만 차별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습성이다. 왜 경쟁이 삶의 기본 습성인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게 후천적인 것인지, 선천적인 것인지조차도 모르겠다. 무조건 후천적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경쟁? 그게 그냥 기본 습성이니까 이해하세요.'는 납득이 어렵다. 예전에 있었던 일을 하나 끌어오자면 이렇다. 요즘 스마트폰 게임이 참 열성적이다. 그 중에 나는 몇몇 게임을 하곤 했는데, 새 게임이 나와서 내가 하고 있으면 당시 남자친구가 바로 깔고 시작하더라. 그리고는 꼭 나를 이길 때마다 이겼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다른 사람한테 보내는 것도 아니라, 오로지 나한테만 말이다. 정말 처음에는 그렇게 자랑하고 싶었나 싶은 마음에 그저 귀엽다 봐주고 웃어넘겼는데, 자야하는 새벽에도 게임하고 보내서 나를 깨우니 결국 나는 그 게임을 지우고 수신거부를 걸었다. - 아마 새벽에 보낸 메시지가 잘자라던지, 사랑스러운 말이었다면 이렇게 기분 상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 놈의 경쟁심을 나한테만 곤두세우는지 모르겠다. 이건 정말 '나한테만'이었다. -

 

  술 한잔 해요.

  "술이나 하자."
  남자들은 술잔 가득 술을 부어주는 것으로 모든 대화를 했다고 생각한다. 술을 따라주는 것이 안부를 묻는 일이고, 술잔을 서로 부딪치면서 상대를 위로하고, 각자 자기 잔의 술을 마시면서 슬픔을 느낀다. 술자리에 마주 앉기, 함께 술 마시기, 함께 취하기, 그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남자는 위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는 말을 할 줄 모르고, 상대방을 감싸안아 편안하게 해주는 행도을 할 줄 모른다.
  술자리는 그 자체로 남자들이 감정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그들은 슬프다고 말하는 대신 술을 마시고, 기쁘다고 말하는 대신 노래방에 가서 큰 소리로 노래 부른다.
  현 시대의 술은 여자든 남자든 다 잘 마시는 시대같다. 누군든지 어떤 이유를 붙여서든지 술을 찾는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점은 인정한다. 여자들은 술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마시진 않는다. 술자리를 가지고 이야기 '수다'를 떨어 스트레스를 풀어내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다. 그러나 남자들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주변을 둘러보자, 요즘 말 많은 남자 많다! 그런데 그게 과연 전부인지는 모른다. 여자도 전부를 말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거늘. 남자들은 책임감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한 잔 또 한 잔 기울인다. 그리고 노래방에 가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그게 말하지 않고 모든 감정을 주고받는 형식이란다. 나는 여자라서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그저 서글프게 느껴진다.

 

  의존성 그리고 폭력성

  "남자들의 의존성은 여자들의 그것보다 더 치명적이다."
  전세계적으로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는 유사하다.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지 않거나 논쟁하는 일, 돈이나 여자 문제를 꼬치꼬치 캐묻는 일, 제때에 식사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고 오해한 경우, 여자가 섹스를 거부할 때 등이다.
  위 항목들을 읽어보면 폭력적이 되는 것은 자기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몸이든 마음이든 여자가 돌봐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좌절당했을 때 남자들은 폭력을 휘두른다.
  '남자답게', '여자답게'라는 말을 우리는 어려서부터 종종 듣는다. 그 말의 의미는 참 가혹하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구분지어버리는 것. 그로 인해 박탈당하는 자신의 감정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른다. 요즘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무리는 대개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여자들이 보이쉬한 매력을 지닌다 해도 흠이 아니다. 여자들의 역할범위와 행동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있다. 물론 남자도 그러하지만, 비율로 따진다면 여자가 훨씬 넓다. 하지만 아직 가부장적 제도의 잔재가 남아있는 현 시대에서는 성별에 따른 기본적인 습성을 요구한다. 남자가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가 단지 다혈질만이 아니다. 도리어 남자의 의존성 때문이다.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그들은 폭력을 휘두른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때문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여자들은 모른다. 왜 그들이 그랬는지를. 그렇기에 그저 남자들의 폭력은 단순히 화를 못참은 '폭력'으로만 인정된다. 하지만 폭력은 안 된다는 것이 무조건적인 견해다. 한 번이 어렵지 다음은 쉽다는 말은 누구나 안다. 남자들의 폭력성을 이해는 하지만, 그 폭력을 어떤 식으로서든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남자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질투와 의심 그리고 사랑
  "깊이 사랑하지만 의구심이 가시지 않고, 의심하면서도 열렬히 사랑한다."
  남자의 질투는 여자의 질투보다 무섭다고 한다. 예전에 칠거지악은 여자에게만 한정되었다. 그 안에는 투기라는 것이 있었다. 여자의 질투는 일찍이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질투에 대해서 논해진 적은 없다. 그것은 전부 온전한 사랑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 사회가 그렇게 받아들일 사회던가? 현 사회에서의 남자의 질투는 여자의 질투보다 훨씬 강하다. 나는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 종종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질투를 할 때, 나는 그에게서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니까. 이렇게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지인들도 전부 그렇게 생각하더라. 물론 정도를 지나치면 안 되겠지만. 지나치면 의심이 된다. 그리고 그 의심이 지나치면 집착이 되고, 사람은 애인에서 스토커로 변한다. 그러니 정도를 지키자. 여자든, 남자든 모두 말이다.

 

  남자들의 거짓말

  "남자가 거짓말을 하면 그냥 속아줘. 그건 너에게 잘 보이고 싶고,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는 뜻이잖아."
  사실 여자들은 남자의 사소한 거짓말을 대체로 알고 있다. 남자들의 거짓말 창작 능력에 대응해서 여자들이 발전시켜온 능력이 있다면 거짓말을 간파하는 직관이다.
  남자들이 거짓말을 하면 그렇게 속속 걸리더라. 아마 이건 누구나 있을 법한 경험일 것이다. -없다면 맹하거나, 정말 솔직한 남자이거나!- 어찌나 속속 걸리던지 내 이상형 항목에 들어갔다. '거짓말하지 않는 남자.' 물론 선의의 거짓말 이런 것들은 대개 넘어가준다. 그다지 별탈 없으면 싸우기 싫어서 넘어가준다. 그런데 그게 넘어가다보면 밑도끝도 없이 할 때가 있다. -내가 못된 남자를 만났던 것인지.- 그러다보니 내게 잘보이기 위해서라고 해도 제발 거짓말은 안 해줬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남자들의 이중 부담
  한편으로는 가정과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강인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자가 요구하는 민감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즘 여자들이 얼마나 까다롭던가.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남자가 되기도 하고, 온갖 기념일에 눈만 봐도 감잡을 수 있는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 인정받는다. 사회의 과도기에 걸려있는 남자들은 힘들다. 예전처럼 가장노릇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가족을 등에 업고 오늘도 술잔을 기울인다. 그런 남자에게 오늘은 아무 말없이 술 한 잔 주고 받아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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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토피아, 미래에 중독된 사람들
마이클 달렌 지음, 이은주 옮김 / 미래의창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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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넥스토피아, 미래에 중독된 사람들

 

  '내일은 어떨까?' 우리는 항상 현재를 살고 있지만, 미래를 꿈꾸며 산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가 있기에 우리는 현재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고민하고 행동한다. 미래는 항상 기대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아직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은 그 무언가에 대한 소망을 갖게하는 그런 능력이 있다. 그러나 미래는 아무렇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항상 자신을 예고하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미래는 동떨어져있는 무언가가 아닌 우리의 현재와 붙어있는 무언가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미래를 예상할 수 있고, 그 미래를 불쾌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애니월드

  'any'라는 단어가 예전에는 '아무것도 없다(there isn't any)'는 의미였지만 현재는 '언제(anytime), 어디서든(anywhere), 누구나(anybody), 무엇이든(anything)'이라는 의미로 변화되었다. 그것은 현재 사회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스마트폰이 손에 쥐어지면서 전 세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사람들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대상을 망라하여 모든것이 가능한 any의 세상, 즉 애니월드(world of any)에서 살아간다. 불과 몇 년전만 해도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서적을 뒤지고 직접 찾아나서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것을 손 안에서 자유자재로 얻을 수 있다. 미국 십대 소녀들이 모든 활동을 제치고 쇼핑을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획기적인 결과가 아니겠는가? 내가 십대였을 때만 해도 쇼핑이 취미인 여학생은 없었다. 내가 어릴 때에만 해도 펜팔이 유행했었다. 편지를 주고받는 것인데, 지금은 이팔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이메일을 주고 받는 것이다. 또한 나날이 줄임말과 신조어가 탄생한다. 이렇게 문화는 사회에 맞춰 변화하고 있다.

 

  시간이 돈이다.

  인터넷의 발달은 전세계를 하나로 만들었고, 정보를 눈앞으로 데려왔다. 그렇다면 그것이 낳은 결과는 무엇일까? 바로 시간과 인내심이다. 당장 손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인내심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빨리빨리'라는 것이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특징이었다면, 그것이 이제 한국인만의 특징이라고 하기엔 멋쩍은 상황이 되었다.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에 따라 모든 상품은 시간과 돈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본질적 특성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신이 '하지 않은 행동'보다 '한 행동'을 더 많이 후회한다는 점이다.

  행동을 하고 무언가를 사고 기회를 잡는 등의 행위를 하는 순간에 우리는 다른 무언가를 놓치게 된다. 그러고 나서는 그렿게 놓쳐버린 것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 왜 내가 이걸 선택했지? 저걸 선택했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람의 특성이 그렇다고 한다. 한 행동에 대한 후회. 그것은 기대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무슨 일이든지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발생한다. 게다가 인간은 특성상 가진 것에 대한 만족감보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크게 느낀다. 가진 것에 대해서는 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의식하고 바라보니 참 신기하고 웃음이 난다. 아, 사람의 심리는 참 요물같은 거구나!

 

  이에 따라 우리는 행복도 논할 수 있다. 기대사회에서는 행복을 살 수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다. 저자는 행복이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독이 된다고 하는데, 이런 말은 또 처음 접해본다. 행복한 상태를 유지하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계속해서 에너지를 소비하면 우리는 앞으로 전진하지 못한다고 한다. 나는 사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행복에 대한 관점은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마치 '구'의 형태에 다가가는 느낌이랄까. 다음 부분을 살펴보면 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바로 넥스토피아다.

 

  넥스토피아

  삶의 만족도를 점수로 매기고 점찍어보자. 기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다. 그것은 어떤 주제를 말하던지 간에 대개 V곡선을 그린다. 지금 과거의 첫사랑과 현재의 사랑과 미래의 사랑을 상상해보자. 어떠한가? 난 그렇다. 꼭 현재가 제일 점수가 낮고, 미래가 가장 높더라. 우리는 가장 최고의 미래를 꿈꾸며 산다. 우리는 한 순간 미래에 도달할 수는 있어도 그 미래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미래는 늘 넥스토피아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계속 달리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곳이 바로 넥스토피아다. 다행스러운 점은 '도달'할 수는 없더라도 '생각'은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 자체가 우리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우리를 긍적으로 만드는 힘이 된다. 결국 넥스토피아는 행복이 임백해있다는 희망이자, 미래는 분명 멋질 것이라는 믿음이 만들어 내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미래를 불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장미빛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현재는 힘들더라도 분명 미래는 빛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열심히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살짝 빗나간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지금의 내가 있다.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까닭도, 책을 읽는 이유도, 일을 하고 있는 이유도 결국 내가 꿈꾸는 미래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나는 미래를 꿈꾸며 활동하고 있는 이 순간이 행복하다.

 

  기대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자신의 드라마를 찍어내는 것과 같다.

  우리의 사회는 기대사회다. 이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드라마를 찍어내는 것과 같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결말을 알지 못하는 드라마를 찍고 있다. 소설 한 권을 쓰고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생각은 할 수 있지만, 알 수 없는 반전들로 가득하다. 그런 사회를 살아가기 때문에 꿈을 꿀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래서 오늘도 행복하다. 꿈꾸고 미래를 기대할 수 있으니까.

 

  넥스토피아 마케팅

  기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래는 매우 두근거리는 곳이다. 마치 영화의 예고편처럼. 다음에는 어떤 것이 나올까 두근거림을 가지고 사는 그런 사회. 그런 사회에서 전적인 예시는 바로 애플이다. 사람들에게 미리 예고편을 살짝 흘린다. 그 예고편을 접한 사람들은 기대감에 달아오르고, 아이폰이 나왔을 때 애플의 주가는 치솟았다. 그리고 아쉬운 점들을 개선해나가는 방향으로 하며 계속해서 예고편을 흘린다. 계속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기대감을 갖게 만들면서 욕구를 충족시키는 전략이다. 앞으로는 이러한 기대감에 대한 가치는 계속 높아질 것이다. 대신 명심할 점은 그 기대감에 맞는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앞으로 이어질 기대감을 기대할 수 있을테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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