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만 좋고 뒤로 갈수록 얕아지는 글에 (내가 다) 부끄러워진다. 어딘가의 추천사로 인해 잘못된 기대로 펼친 책. (24. 10. 3)
이제 나는 열정적 포개짐보다 고요한 포옹이 좋다. 당신이 간직한 금이 혹시 나로 인해 부서지지 않도록 가만가만 다가서는 포옹이 좋다. 등과 등에 서로의 손바닥이 닿을 때, 가벼운 포개짐이 좋다. 고양이처럼 코끝으로 인사하며 시작하고 싶다. 끔찍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금 간 것을 계속 살피고 보호하려는 마음을 키우고 싶다. 어렵더라도. (11) - P11
현재가 따분하거나 미래가 아득하게 느껴질 땐 자꾸 옛날을 불러낸다. 담벼락에 서서 옛 친구를 부르듯이, 턴테이블에 추억의 레코드판을 올리듯이 기억을 꺼내보는 거다. 옛날은 부르면 쉬이 오고, 눈 깜박이면 사라진다. (33) - P33
자신을 한곳에 내버려두고 먼 곳을 다녀오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멀리 갈 때는 불러 세우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놀라기 때문에 부르기가 두려운 사람. 그들은 내 앞에 자신을 앉혀놓고 자기를 찾으러 나선다. 이곳에 당신이 있어요.말해줘도 믿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자기보다 더 높은 곳에서, 혹은 더 낮은 곳에서 자신을 찾기 때문에 자기와 온전히 포개져 스스로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가는 사람. (34-35) - P34
어떤 사람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지나치게 의식한다. 태어난 후에도 스스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내 앞의 나, 그 앞의 나...... 수많은 자신이 일렬로 서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 남의 몸을 빌려 사는 듯, 그렇게 산다. 방법은 없다. 본인이 스스로를 알아봐야 한다. 이게 나구나, 이렇게 태어난 게 나구나, 받아들여야 한다. (44) - P44
첫 책이 어떤 얼굴로 태어나 어떻게 살아갈지는 누구도 모른다. 쓰는 사람은 모르는 채로 견디며 나아가야 한다. ‘어떤‘이란 형상, 미리 알 수 없는 책의 얼굴, 그것은 쓰는 자가 끝까지 홀로 지고 가야 하는 무겁고도 빛나는 휘장이다. (44) - P44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를 성장시키고 떠난 인연들을 내 깊은 곳에 품는 것. 그리고 고독 속 내 얼굴에서 그들을 찾아내며 새로운 아픔을 살아내는 것. (2024. 9. 19)
얘들아, 감정이 모든 걸 좌우한다. 무엇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인생이 풍족할 수도 빈곤할 수도 있어. 감정을 고양시키면 큰 재산이 되기도 하고 그게 싹 사라져버리면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인생이 되기도하는 거야. (44) - P44
메리 매카시(소설가, 비평가이자 활동가로 뉴욕 지성계를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는 자신의 분신인 소설 속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 남자들을 가차 없이 평가했다. 남자가 똑똑하면 웃기게 생겼다. 남성미가 넘치면 머리가 비었다. 이러한 등식은 마치 어렵사리 체득한 지혜처럼 느껴졌고 내 또래들에게도 그러했다. 우리는 허구한 날메리 매카시를 인용하면서 승리감에 차 올랐다. 그의 우아한 문장을 통해 우리는 괜찮은 남자가 없다고 불평하는 여자가 아니라 인생의 진실을 파악한 인간으로 승격되었다. (205) - P205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저미는 듯해 그 고통을 감히 느낄 수조차 없을 것 같다. "정말 그렇네." 나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세월만 가버려"엄마의 부드러운 얼굴이 결심이라도 선 듯 확고하고 단단해진다. 나를 보더니 강철 같은 목소리로, 이디시어로 이야기한다."그러니까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 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엄마는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 바, 그 혹독한 진실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엄마한테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나도 모른다. (300-301) - P300
"오랜만에 맞는 말 하셨네." 우리는 동시에 웃기 시작한다. 누가 됐든 우리 둘 다 악의적인 말은 피차 한 문장 이상 내뱉지 않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 같다. 내 생각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에만 골몰하는 대신 더도 덜도 말고 딱1분이라도 그저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됐을 정도로 그 긴긴 세월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우리 두 사람 다 감격하는 듯하다. (311) - P311
인생의 신비와 약속을 관통하는 진리가 아닐까. 엄마와 나는 더 이상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있지 않는다. 드디어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영구적으로 성취되었다. 나는 우리 둘 사이의 거리를 흡족하게 엿본다. 약간의 공간이 나에게 이따금 찾아오는 일용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내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날 것이라는 믿음. (311) - P311
사는 날 동안 옆에 두고 삶의 지침서로 쓰려 한다. 친밀한 관계에 대하여, 그 어떤 책보다도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마냥 관념적이지도 않은 가르침을 준다. 내 과거와 현재를, 감정과 기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명확하지만 따뜻하게 제시한다. 뻔하지도 않고, 곳곳에 머리에 냉수를 붓는 통찰들이 있다. 데이비드 리코를 비롯해 이 책을 내고 번역해준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24.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