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혐오 - 탈진실 시대에 공통진실 찾기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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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눈

저자는 장자연 사건을 바라보는 두 종류의 눈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생명을 죽이는 폭력적 축적과 치부에 취해 흐리멍텅해진 눈, 즉 가해자의 눈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생명을 기억하며 그에 대한 진실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해 부릅뜬 눈, 바로 피해자의 눈이다. 
피해자의 부릅뜬 눈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보아야 할 것을 절대 놓치지 않는 다초점의 눈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분명한 초점으로 공격의 화살이 날아올 방향, 자신을 수렁에 빠트릴 함정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동시에 생존의 출구를 면밀히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흐리멍텅한 눈의 가해자들이 하는 노력이란 오직 피해자의 부릅뜬 눈의 초점이 자신에게 모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추악한 욕망과 더불어 발생한 끔찍한 범죄의 증거를 없애는 집중 한다.

홍가혜와 윤지오

윤지오의 증언 논란을 겪으면서 희미해졌던 이름 '홍가혜'가 다시 떠올랐다. 등장 당시 홍가혜는 윤지오처럼 강한 울림으로 그때의 현장은 증언하고 고발한 사람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온몸으로 현장을 증언하던 그의 음성과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이후 그는 엄청난 마녀사냥에 휩쓸렸다.  그가 논란에 휩싸일 때 나는 사실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예 관심 밖이었다는 말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심심치 않게 그에 관한 온갖 악성 루머가 들려왔다. 그때 나의 반응을 굳이 글로 옮기자면, "그런가? 그래서? 그게 뭐?"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당시 나는 결코 가해자의 편에서 그들과 같은 시선으로 홍가혜를 바라보지는 않았다....고 철썩같이 믿었다. 
분명한 건 내가 피해자의 편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가해자들의 공격을 예의 주시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나의 그런 태도는 사실상 흐리멍텅한 눈을 가진, 따라서 온 세상이 흐리멍텅한 눈만으로 가득하길 원하는 가해자들에게 매우 반가운 것이었다.  당시 나의 눈은 치부의 쾌락에 홀린 흐리멍텅한 눈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가해자들이 제멋데로 날뛰며 피해자를 공격하는데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그들이 뿌려데는 모래가 눈에 들어갈까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외면하느라 여념없는 흐리멍텅한 눈이었다. 내가 '그런가?' 정도로 생각하며 흐리멍텅하게 지내는 동안 무고한 증인은 말도 안 되는 실형을 사는 되돌릴 수 없는 고통을 겪고야 말았다.

저자는 홍가혜에게 가해진 공격과 윤지오에게 가해진 공격이 역사의 반복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반복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반복되고 있을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비극의 역사만을 반복 재생하려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저자는 그들의 그 기술과 작동방식을 파고들어간다. 폭주 기관차처럼 모든 것을 짓밟으며 달려가는 그들의 엔진을 멈추기 위해서.

이 책은 가해자들과 가해자들의 편에 선 무뢰한들이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뿌려데는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고글이다. 우리의 눈이 그들의 공격으로 덩달아 흐리멍텅해지지 않도록, 부릅뚠 눈을 다치지 않고 피해자의 편에서 함께 당당히 외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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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판의 문법 - 살아남은 증언자를 매장하는 탈진실의 권력 기술 아우또노미아총서 68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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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한 범죄와 피해사실을 증언하는 증언자를 매장하는 것은 곧 다중의 공통장을 파괴하는 것이다. 공통장의 파괴는 역사적으로 늘 권력자들의 최우선 과제였다. [까판의 문법]은 지금 살아 움직이고 있는 수구 권력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 기술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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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혐오 - 탈진실 시대에 공통진실 찾기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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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혐오, 성소수자 혐오 등. ‘혐오‘라는 말은 이제 사회를 이야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증언혐오]는 작년 한 해 우리를 들끓게 했던 또 하나의 혐오에 관한 이야기다. 도대체 무엇이 범죄를 증언하는 증언자를 혐오하게 하고 또 심지어 범죄화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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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과 여신 -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 지음, 윤영삼.조윤정 옮김 / 콘체르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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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신과 성모마리아>

 
 교회와 성당을 구별하는 단순한 방법이 하나 있다. 각 장소에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어찌 대하는지 보면 된다. 마리아를 믿고 숭배하면 그곳은 성당이고 그렇지 않으면 교회다. 나는 이 구별법을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 같은 반 친구에게 처음 들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이 이야기는 엉터리였다. '교회'와 '성당'을 기독교의 두 종파를 구별하는 별칭으로 사용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하지만 때론 엉터리 같은 이야기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진실 쪽으로 우리를 안내하기도 한다.
 앞 이야기에서 '성당'과 '교회'는 각각 '천주교'와 '개신교'를 거칠게 칭한 것이었다. 마리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가지고 두 종파를 나누는 이 구별법은 지금도 암암리에 유포되고 있다. 인터넷 등을 통해 퍼지고 있는 관련 글들을 읽다 보면 흥미롭게도 이 구별법이 애초에 보여주려 했던 것과는 좀 다른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 양 진영이 이 구별법의 진의를 두고 논쟁을 벌이면서도 마리아에 대해서만큼은 놀랍도록 비슷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먼저 한쪽에서 "우린 믿지 않는다!"라고 외치면 곧이어 다른 쪽에서 "우리도 믿지 않는다!"라고 받아치는 식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마리아는 두 종파를 가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공통의 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만, '절대 믿지 않음을 증명해야 할 대상'이라는 자격을 지니고서 말이다. 
 
 신의 아들을 잉태한 성스러운 존재. 하지만 결코 신의 지위로까지 격상되어서는 안 될 존재. 마리아를 향한 기독교인들의 마음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런 애증의 감정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알파벳과 여신』은 이 질문에 흥미로운 답들을 제시한다. 저자 레너드 쉴레인이 책을 저술하게 된 중요한 동기도 바로 마리아에 관한 전설이었다. 
 
 쉴레인은 그리스 유적지를 여행하던 중 마리아에 관한 전설을 듣게 된다. 마리아가 죽기 전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이 있는 에페수스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였다. 예수의 어머니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찾은 곳이 하필 이교도의 여신을 섬기는 곳이었다니! 이 기묘한 이야기는 곧장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저자는 마리아의 전설과 함께, 그리스를 여행하던 내내 자신의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 하나를 떠올린다. "고대 서양의 여신들이 사라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질문과 함께 『알파벳과 여신』은 시작한다. 고대 여신들의 비극적인 운명과 현재 기독교에서 마리아의 애매모호한 지위. 그사이에 숨어있던 연결고리가 쉴레인의 흥미진진한 서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다. 
 
 『알파벳과 여신』의 가장 독특한 점은 여성을 향한 폭력과 억압의 역사를 알파벳이라는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연결해 설명한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저술에 들어가기 전 저자가 세운 가설은 다음과 같았다. "여신과 여자들의 지위가 추락한 것과 무자비한 가부장제와 여성 혐오가 출현한 것이 글을 읽고 쓰게 된 사건과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 아마도 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알파벳)을 익히는 과정에서 인간의 뇌에 어떤 구조적 변화가 발생한 것은 아닐까?" 저자는 자신의 가설을 해명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시대와 공간을 아우르며 재앙이라고밖에 설명할 길 없는 폭력의 역사를 독자의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준다.

<상보성 vs 극단성>

 

 『알파벳과 여신』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이원론적 관점이다. 저자는 이원론적 대립 구도로 모든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이러한 방법은 어떤 사건과 현상들을 선명하게 보여 주기에는 매우 유용하다. 하지만 적용 지점에 혼돈이 일어나면 자칫 극단으로 흐르기도 쉽다. 책의 초반부에 저자는 우선 인간이 지닌 가치, 혹은 인간 문화의 가치를 대립 쌍들로 보여준다. 책에서 가장 중요해 보이는 3가지 대립 쌍은 바로 여성과 남성, 우뇌와 좌뇌, 그리고 이미지와 문자다. 이 가치 쌍의 양쪽은 말 그대로 각기 상반되는 특징을 지닌다. 예를 들어 여성적 시선의 특징이 총체적, 동시적, 종합적, 구체적이라면, 남성적 시선의 특징은 선형적, 순차적, 환원적 추상적이다. 저자가 이러한 가치 쌍들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각각의 특징을 넘어 인간이 혹은 문화가 지녀야 할 상보적 태도다. 각각의 가치는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절대 말할 수 없다. 문제는 항상 상보성이 사라질 때, 즉 상반되는 힘이 함께 작용하지 못할 때 일어난다. 한데 이상하게도 구체적인 역사 서술 속에서는 종종 저자 자신이 무엇보다 강조한 상보성이 사라지는 듯하다. 역사의 매 순간 대립적인 각각의 특성이 마치 상보성과 극단성의 대표선수인 양 출현한다. 특히 '우뇌'는 가치 쌍의 어느 한 측면을 담당하다가도 돌연 홀로 상보성의 가치를 대표하며 좌뇌보다 우월해진다.
 
 이처럼 극단으로 흐르는 서술은 어쩌면 역사적 폭력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알파벳이라는 특정 매체를 지목한 순간 이미 예고되었던 것일지 모른다. 좀 더 근본적인 투쟁은 알파벳과 여신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상보성과 극단성 사이의 투쟁이 아니었을까? 이런 아쉬움이 들 때쯤 새롭게 등장하는 저자의 통찰 하나가 반갑다. 저자는 어느 순간부터 알파벳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한 사회에 갑자기 등장했을 때에 발생할 수 있는 혼란과 그로 인한 폭력의 문제"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책은 끝난다.
 
 레너드 쉴레인은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이미지 중심으로 바뀐 20세기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그린다. 이 또한 문자와 이미지라는 대립 쌍 중 '이미지'를 상보성을 대표하는 우월한 가치로 설정해 버린 데서 발생한 한계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완결된 한 권의 책을 어떻게 경험하고 배울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 아니겠는가? 『알파벳과 여신』은 이원론적 관점의 효과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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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부
알렝 꼬르벵 / 동문선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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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26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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